山行 閑談 43

서석대에 올라 뭔가를 옹골지게 거둬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 - - 


 
 

 

 어느덧 병술년(丙戌年) 끝자락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유달산을 바라보면서 틀에 박힌 듯한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꾸려가다 보니 곶감 빼먹듯 일년이 훌쩍 지나간다. 돌이켜보니 아쉬움도 많지만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니 왠지 가슴이 뿌듯해진다.

 

 이맘때면 의례적인 모임이 많아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가 버거울 지경이다. 그러나 성탄 연휴에 어느 산정(山頂)에 올라가 서운함을 토로하면서 묵은해를 보낼까 며칠간 궁리했지만 장손(長孫)이 내려온다는 한마디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 헝클어져 하는 수없이 선걸음에 다녀올 요량으로 무등산에 간다.
 

 낯 뜨거운 얘기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가면서 재롱을 피우는 손자 녀석이 어찌나 귀여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흔히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것을 영원한 짝사랑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젊은 시절 자기자식들을 키워내면서 다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일까?
 

 지난주에 눈보라가 휘몰아쳐 안타깝게도 서석대를 건너다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꼭 오르기로 작심하고 지난번과 같이 토끼등을 거쳐 동화사터로 향한다. 불과 일주일이 지났는데 오름길은 확연하게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질퍽거리고 봄날처럼 푸근해 발걸음이 더디지만 좋아서 오르기에 마냥 흥겨울 뿐이다.
 

 중봉에 올라서 정상을 건너다보며 심호흡으로 워킹패스를 조절한다. 작전도로로 내려와 다시 서석대로 오르는 가파른 오름길로 들어선다. 응달진 곳이라서 아직도 설원(雪原)을 이루고 있다. 반들반들한 내리받이를 내려오는 산객(山客)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댄다. 요즘 주말이면 외지(外地) 관광버스가 여러 대 주차되어 있는걸 보면 무등산이 겨울산행지로 꽤나 인기가 있나보다.
 

 미끄럼을 타듯 내려오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발을 헛디뎌 순식간에 넘어져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아찔했으나 다치지 않아 다행스럽다. 산정(山頂)이 훤히 쳐다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젠을 챙기고 오른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살다가 넘어져 떫은맛을 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넘어졌을 때 오뚝이처럼 일어서려고 발버둥치지 않고 좌절해 버린다면 절대로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중국 춘추 전국시대 노(魯)나라 좌구명(左丘明)은 눈이 멀었을 때 국어(國語)라는 역사책을 썼으며, 천하제일의 역사책인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은 궁형(宮刑)을 당하고 나서 저술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지른 진시왕(秦始王)도 유일하게 불사르지 못한 책이 주역(周易)인데 이 책의 저자인 주(周)나라의 시조 문왕(文王)도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썼다고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남도(南道)문화답사 일번지인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방대한 저서를 남겼으며, 친형이신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은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남겼다. 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제주도 귀양살이 9년 동안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고 한다.
 

 요즘 인기가 많은 책이「해리포터」 시리즈다. 이 작품을 쓰고 있는 영국의 여류작가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은 이혼하고 어린 딸을 키우면서 우유를 살 돈이 없어 맹물을 먹이는 어려운 생활을 이겨내고 집필에 전념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았으며 백만장자가 되어 세계 최고의 부호(富豪)클럽에 합류했다. 

 

 이처럼 자신들이 처한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대업(大業)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의 원천(源泉)은 어디서 솟아날까. 그것은 곤경에 빠졌을 때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꿋꿋하게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끄지 않았기에 가능했지 않았을까? 보통사람들은 이럴 경우 쉽게 절망하고 모든 것을 체념하면서 자포자기하는 것이 속성이기 때문이다.
 

 삼십여 년 넘게 뭔가에 쫓기듯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상(日常)에 온갖 열정을 쏟아왔다. 그러나 종착지점이 점점 가까워지니 조급증(躁急症)이 밀려들어 마치 연말(年末) 같은 들뜬 기분에 휩싸여간다. 이럴 땐 뭔가를 한 옴큼씩 옹골지게 거둬들인다면 흐뭇해하겠지만 만약에 아무것도 거둬들이지 못한 체 한숨만 푹푹 쉰다면 어떻게 할까? 
 

 오뉴월 두엄 썩듯 속만 썩인다고 무슨 소용 있겠는가. 늦은 것 같지만 늦은 것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 일어서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아직도 털어버릴 일들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면 과감하게 털어내는 용단(勇斷)을 내려야한다.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인들 그 생채기가 지워지리라 생각한다면 꿈속을 헤매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벌써부터 마케팅 전략인지 몇 십 년 만에 돌아온 황금 돼지띠라고 야단법석인 정해년(丁亥年)이 다가온다. 새해에는 모두가 만사형통(萬事亨通)하시고 부자(富者)되시기를 기원하면서 서석대를 돌아선다. 산하가족 여러분! 복 많이~ 받으세요.(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