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산


 

          *산행일자:2008. 9. 6일(토)

          *소재지  :강원철원/화천

          *산높이  :대성산1,175m

          *산행코스:말고개-683.1봉-대성산-절골고개-1,041.5봉-수피령

          *산행시간:10시25분-15시50분(5시간25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 회원20명

          (24기 이규성 회장, 김남진/김양미, 김주홍/김경옥, 백인목, 이명재, 이기후,

           함기영, 우명길, 27기송기훈, 조동식, 29기정병기/김의정, 유한준, 오창환,

           김정호, 박성재, 30기박승욱, 초대손님 박현출)

 

                            (대성산을 오르며 뒤돌아 본   적근산 모습)


  강원도 철원과 화천을 어우르는 대성산은 이제껏 두 눈으로 바라만보는 망산(望山)의 대상이었지 두 발로 오르는 등산(登山)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남북한이 통일되거나 평화협정을 맺기까지는 앞으로도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산 전체를 군부대가 관할해 사전허가를 받지 않고는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을 가르는 피어린 600리의 휴전선이 멀지않은데다 휴전선 너머 북한의 산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고산이어서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상 징후 발견 시 즉각 대응하기에 가장 적합한 산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산에 군사기지가 세워지고 그래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것은 당연한 조치여서 이제껏 이 산을 오르겠다는 것은 그저 꿈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한북정맥에 첫발을 들인 작년 9월에 대성산 서쪽아래 수피령을 들머리로 해서 맞은편의 복계산을 오른 일이 있습니다. 마침 북상 중인 태풍이 먹구름을 미리 보내 대성산을 에워싸는 바람에, 날씨만 좋았다면 한 눈에 이산을 조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수피령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굽이진 군사도로가 구름을 뚫고 간헐적으로 모습을 내보여 저쯤에 정상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 가늠해볼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머리통이 밖으로 내다보일까 엄청 조심스러워하는 대성산이 실체가 아닌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한 겨울 우리 장병들이 고생하는 전방의 날씨가 얼마나 매서운 가를 알려주고자 기상청이 항상 이산의 아침기온을 통보해준 덕분입니다. 방송에서 이산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한 번 오를 수 없을까 안타까워하다가 어제야 비로소 군 당국의 허가를 받아 망산(望山)의 대성산을 등산(登山)하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이동을 지나고 백골부대를 거쳐 다다른 와수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마현리를 지나면서 군부대의 검문을 받았습니다. 서울보다 위도가 훨씬 높은 철원 뜰에 가을이 먼저 내려앉아 어느새 황금색으로 많이 변한 벼들이 길 섶 논 자락에서 넘실댔습니다. 초가을 정경이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마현리의 논 뜰을 지나 올라선 해발640m(?)의 말고개를 막 넘어 금성지구전투전적비 앞에서 하차하자 젊은 장교 한명이 저희들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이 산의 개요 및 큰 길에서 벗어나지 말 것과 정상에 이르기까지 사진촬영을 금한다는 주의사항을 들은 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전10시25분 말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적근산과 대성산 사이의 안부인 말고개에서 시작해 해발1,175m의 대성산 정상을 오른 다음 대성산과 복계산 사이의 안부인 수피령으로 하산하는 이번 종주산행으로 한북정맥 종주거리가 10Km가량 늘어나게 됩니다. 전투전적비 오른 쪽으로 난 군사도로를 따라 십 수분을 오르다가 얼마고 내려서자 삼거리가 나타났습니다. 지도상에 나오는 685.1봉은 삼각점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새 지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하루만 지나면 곡식에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인데도 한낮의 기온이 최고 섭씨 30도에 육박해 처서 때 비뚤어진 모기입이 제 위치로 다시 돌아와 물려고 덤벼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온 몸이 후끈거렸습니다. 옛날에는 백로를 즈음한 며칠간이 한 여름 중 제일 한가한 때여서 시골며느리들이 친정나들이를 다녀왔다는데, 동행한 세 여인들은 친정대신 부군을 따라 최전방의 대성산을 찾았습니다. 대성산을 오르는 길에 목덜미를 내리쬐는 땡볕을 가릴 그늘이 별로 없는데다 달아오르는 지열을 식혀줄 소나기도 내리지 않아 지금까지 총 12회의 한북정맥 종주산행 중에서 이번이 가장 힘들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삼거리에서 직진하는 넓은 길은 957봉을 왼쪽으로 우회하는 차도이고, 오른 쪽의 가파른 길은 이 봉우리로 곧바로 오르는 길인 것 같아 오른 쪽 길로 올라섰습니다. 오름 길은 이내 조금 좁아졌고 얼마 오르지 않아서 나무그늘이 나타나 짐을 내려놓고 땀을 식혔습니다. 길은 제법 가팔랐지만 그늘 길도 있었고 길섶에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저 아래 땡볕 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말고개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은 추가령지구대가 시작되는 북한 땅 백두대간의 백봉까지 이어집니다. 정맥 길에서 동쪽으로 약간 벗어난 곳에 자리해 북한 땅의 연봉들을 지켜보고 있는 해발1,073m의 적근산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안내장교가 일러준 대로 한눈팔지 않고 큰 길만 열심히 따라 걷느라 957봉을 오르지 못했지만 길 옆 오른 쪽의 철계단 바로 위 봉우리가 그 봉우리 같았습니다. 삼거리에서 1시간 남짓 걸어 왼쪽 아래에서 올라오는 시멘트로 포장된 차도를 다시 만났습니다.


 

  13시8분 해발1,175m의 대성산을 올랐습니다.

한북정맥의 마루금을 잇는 능선을 왼쪽으로 에도는 시멘트 차도를 따라 걸어 오르며 이런 길이라면 한 겨울에 오르는 편이 백번 낫겠다고 생각한 것은 달아오른 시멘트 길이 내뿜는 지열이 대단해서였습니다. 해발 1,000m를 넘어서는 즈음 저희들이 말고개를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은 장교 한명이 사병을 대동하고 저희들을 맞았습니다. 저희들과 같이 걸어서 정상을 오르겠다는 안내장교에 타고 온 짚차로 가라고 강권해 그냥 올려 보낸 후 저희들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습니다. 남동쪽 멀리로 화악산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산의 상대적 위치가 어느 정도 가늠됐습니다. 둥근 돔 모양의 군사기지 바로 밑에 이르자 정문이 나타났습니다. 저 밑으로 마중 나왔던 장교가 저희들을 안내하며 군 건물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다시 전했습니다. 표고1,175m라고 적힌 정상석을 확인 한 후 동행한 대원들과 함께 38선이 지나는 화악산과 한북정맥 종주 시에 올랐던 복계산, 광덕산과 국망봉을 일별했습니다. 정 북쪽으로 보이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북한 땅의 오성산이 분명한데 우리나라 산처럼 숲이 우거지지 않아 민둥산으로 보였습니다.


 

  전쟁과 평화는 이 산행기에서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 벅찬 거대한 담론입니다.

전쟁이란 적으로 하여금 이쪽 의지에 굴복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한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역저 “전쟁론”에서 “전쟁이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의 계속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한민족전쟁사”를 쓴 온창일 박사 역시 전쟁은 정치집단간의 조직적이고 유혈적인 무력충돌로 정의했습니다. 이 두 분의 의견을 종합한다면 전쟁이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벌이는 폭력행위로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동네 패거리들의 떼 싸움과 구별되는 것은 정치적 명분이고, 또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벌이는 피 말리는 협상과 다른 점은 무력이 뒤따른 다는 것입니다.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이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군의 우세한 무기와 시민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을 중시하는 자본주의를 국시로 하는 정치적 명분을 선점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전쟁은 수많은 전투로 이루어집니다. 6.25전쟁은 거의 한반도 전역에서 치러졌기에 이 전쟁을 통해 잃어버린 인명과 재산피해는 남북한 모두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컸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6.25전쟁이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것은 이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모처럼 원점에서 남북한이 재출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쟁종료 55년이 지난 지금 남북한의 국력을 비교한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북한에 압승했습니다. 전쟁의 목적이 적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대한민국은 종전 후 벌어진 총성 없는 전쟁에서도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가 계속 되기 위해서는 북한이 아예 딴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국토방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최전방의 대성산을 오르는 이번 산행이 나름대로 의미 있다 하겠습니다.


 

  반시간을 넘긴 점심시간은 저희들을 안내하는 군장병과 같이 했습니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 장승목을 만났고 바로 아래 대성로 표지석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다 그늘진 곳을 만나 길가에다 신문지를 깔고 점심상을 차렸습니다. 동문 부인 세분이 자식 대하듯 살뜰하게 챙겨주어 두 장병들은 모처럼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은 듯이 밥그릇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얼마고 내려가자 또 다른 장교가 저희들을 맞아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다른 때라면 찬찬히 체크했을 봉우리와 갈림길을 이번에는 건성으로 지나 지도에 나와 있는 절골과 1041.5봉도 언제 지났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군통제지역인 이산을 오를 때 정상과 하늘을 수놓은 구름, 그리고 가을맞이 야생화에만 눈길을 주기로 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아지랑이를 모르고 지내온 가을 풀꽃은 대신에 찬 달빛과 늙은 벌레소리를 들으며 피고 진다합니다. 그러나 여기 가을꽃들은 벌레소리 외에도 포성을 자주 듣고 자라서인지 여느 가을꽃들처럼 다소곳하거나 청승맞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투구꽃의 투구모습도, 마타리의 대차게 서있는 모습도, 구절초나 쑥부쟁이의 환한 얼굴 모습도, 땅위를 기기를 거부하고 바짝 몸을 일으킨 질경이도, 엉겅퀴처럼 전투적인 각종 취꽃들도 아지랑이를 그리워하며 흘러간 옛 노래를 불러 벌 나비들을 불러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평화의 노래였습니다. 이 산의 가을 풀꽃들은 어느 꽃도 다른 꽃을 압도할 만큼 군락을 이루지 않았고 또 어떤 꽃도 비굴하게 다른 꽃잎 뒤로 몸을 숨기지 않아 서로들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가을꽃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파란 하늘의 새털구름도 이들에 말동무가 되어주었습니다. 대성산의 가을꽃들이 저 건너 오성산의 꽃들에게 흰 구름에 실려 보낸 메시지는 평화였습니다. 내 년 쯤에는 분신인 꽃씨를 바람에 실려 보낼 것을 약속하는 평화의 메시지였습니다.


 

 15시50분 수피령 고개로 내려섰습니다.

마지막 철문을 지나자 한 장병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잠갔습니다. 수피령에서 뭘 모르고 올라온 많은 산객들이 이 철문에서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바위봉을 지나고 헬기장에 올라서서 실내고개를 가운데 둔 두류산과 복주산을 훑어 본 후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따라 수피령으로 내려갔습니다. 차도 건너 승전탑 아래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저희들을 안내한 장병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말고개에서 여기 수피령까지 안전하게 저희들을 안내한 장병들이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황금 같은 주말에 편히 쉬지 못하고 저희들을 안내하느라 먼 길을 함께 걸은 이들에 정말 미안했습니다. 한북정맥을 종주하느라 몇 번을 넘나든 광덕고개를 지나 흑룡사 입구 계곡에서 땀을 닦아낸 후 저녁을 들면서 이번까지 총 12구간을 한 구간도 빼먹지 않고 개근한 김양미님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대성산은 누구라도 오르고 싶을 때 언제라도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닙니다.

이번 산행에 16명의 한북정맥종주팀원 외에 4명이 더 참여해 총 20명이 같이 오른 것도 모처럼의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렇더라도 총20명이 함께 산행한 것은 이규성회장이 본회를 맡은 지 꼭 1년 반 만에 이룩한 쾌거라는 생각입니다. 작년9월 수피령에서 한북정맥 종주를 시작할 때 5명이 전부였는데 1년 만에 그 때보다 무려 4배가 많은 인원이 한북정맥 길을 같이 걸었다는 것은 본회의 장기적 발전을 기약하는 시그널임이 분명합니다.


 

  말고개에서 대성산을 넘어 수피령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부분이 시멘트 길의 군사도로여서 숲속의 산길을 걷는 여느 정맥 길보다 훨씬 단조롭고 밋밋했습니다. 마음대로 사진도 찍을 수 없고 큰 길에서 벗어나 마루금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어 많이들 아쉬워했습니다. 그래도 저희들에 말고개-대성산-수피령의 한북정맥 길을 잠시 내준 우리 군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은 우리 군이 이 산을 굳건히 지켜주어 나머지 정맥 길을 편안하게 종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안내하느라 수고해준 장병들에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하며 산행기를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