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라는 말 자체가 없던 때에

‘산’은 ‘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순간 순간 느끼고 받아들이는

어떤 대상일 뿐이었다. 반복되는 경험은 관념이 되고 또 그 관념은

‘산’이라는 언어로 바뀌어 틀속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가 ‘산’이라 말할 때 그 ‘산’은 각자 다르겠지만 머릿속에 이미

고정화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각자의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산을 많이 갈수록 산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고정되어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해 실제산행에서 산이 그때그때 이야기해주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산행하기전에 기존에 그 산에 대해 가지고 있던 느낌이나 생각들을

털어내려하곤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가는 산에 대해

사전의 기대감이나 사전이미지를 갖지 않으려고 한다. 산에 발을 들여놓는

그때부터 산이 보여주는 그대로를 보고 느끼기 위해....

 

어쩌면 산을 많이 다녀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산에서 더 많은 감동을 얻을수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산을 많이 다닌 사람을 꼭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많은 산을 가본 사람은 새로운 감동을 얻을 기회가 그만큼

적기 때문에....

 

우리같은 아마추어들에게 있어서 산행의 기쁨은 산행을 할 때이지 산행을

끝낸 이후의 성취감이 아닐것이다.

그러니 많은 산을 가봐서 더 이상 갈만한 산이 없는 것보다는 앞으로 갈 산이

더 많은 게 행복하지 않겠는가?

 

 

 

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또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려하지 않고 들으려하지 않기 때문에 모를 뿐.

 

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산을 아는 사람일수록 산을 잘 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산을 다 알아버린 후에는 더 이상 산에 오를 흥미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또한 코스를 잘 아는사람이 반드시 산을 잘아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모든 등로를 훤히 꿰뚫고 있어도 산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산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산을 많이 올랐어도 그는 산행을 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는 산행에서 그 순간의 느낌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가 글로 쓰는 순간 또 사진에 담는 순간 이미 그 산은

살아있는 산이 아닌 박제가 되어 버린 산이된다.

 

산에 카메라를 가져가면.. 멋진 그림만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디카 없이 그냥 산과 빈 마음으로 만나는 그런 산행이 하고 싶어진다.

 

산행기를 쓰면서.. 다녀온 산에 대해 또 하나의 관념을 만들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냥 그때그때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남겨지는 산으로 만족하고 싶어진다.

 

항상 곁에 산이 있고.. 또 가고 싶을때 오르면 되는데.....

굳이 그 산을 사진으로 글로 남겨서 되새길 필요가 있을까 ?

 

 

 

오를 수 있는 산이 적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 때는 오를 수 있는 만큼만 오를 것이다.

 

산에 오르지 못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 때는 산을 바라보고 기억속에 남아 있는 만큼만 기억할 것이다.

 

산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산의 모습조차 그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다해도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때가 되면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