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 덕유

푸른 하늘에 박혀있는 태양은 쉴곳이 없다.
거침없이 내리쬐는 겨울빛을 험뻑 받으면서 일행들은 구절양장 계곡을 파고 든다.
지난해 여름 어느날, 구천33 비경에 함몰된 가슴을 추스리느라 얼마나 혼났던가, 티없이 맑은 구천을 맘껏 삼키며 향적봉에 오른 후, 백련사 방향으로 내릴 무렵부터 쏟아지던 폭우는 지금도 고스란히 가슴속에 살아 있다.
수초 사이를 헤집는 한마리 물고기처럼 덕유 능선을 넘나들며 부풀었던 그 가슴이, 이 순간 또 한번 이녁의 품으로 삭혀들며 빨려 들어간다.
1월 29일 13시, 삼공리 마을 어귀에 차를 버리고 덕유 능선을 종주 할 목적으로 오름을 시작 한다.
인월담, 안심대는 그때 그대로인데 이불삼아 덮고있는 백설기 같은 흰눈을 빌미로 깊은 잠에 취해 있다.
등산인들이 만들어놓은 거울같은 빙판 길에, 헐벗은 나목들을 그려 놓고있는 따사로운 빛은 분잡스러운 바람마저 잡고 있다.
흐름 멈춘 골짜기는 선율 뺏겨 섧다하나, 묻힌 비경을 설핏 보일때면 가던 발길 헝클어지기 일쑤다.
14시 50분, 백련사를 지나 오수자굴 쪽의 눈에 덮인 오름길을 쇠발톱(아이 - 젠)으로 흔적을 남기며 오른다.
꿈에서라도 듣고 싶은 산새 소리 귀를 파고들고, 굳어버린 듯 움직임 없는 설경이 온몸을 눅인다.
당단풍의 미소와 고추나무의 엷은 반김은 내마음 같아 한시도 눈길 떼지 못하게하며, 고로쇠나무 활개에는 사랑이 실리고 쪽동백의 늘씬함에 어여쁨이 묻어난다.
가파르면서 미끄러운 길을 쉬엄쉬엄 오른 16시 20분, 오수자굴을 지나 중봉으로 향하는 침목 계단을 밟는다.
뒷쪽 어깨 너머에 지봉과 대봉이 잡히며 하늘과 맞닿은 덕유 능선이 떠오른다.
횡경재를 패면서 완만하게 흐르다 갑자기 떨어져 내린 구천 상류는 넘어가는 한방울의 빛이라도 핥으려는 듯 안감힘 쓴다.
제 피붙이를 떨궈 나신으로 겨울을 넘기는 활엽수들은 따뜻한 날들을 기약하는것 만큼이나 야물지게 떨고 있다.
희망이라면 이랄 수 있는 그들의 작은 꿈 언저리에 덕유 자락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며, 해맑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든 가슴은 스스럼없이 동화되어 트여진다.
17시 27분, 1594 미터 중봉에 오른다.
그는 손에 잡힐듯한 가까운 거리의 향적봉과 세월을 나누고 있다.
향적봉으로 오르는 능선에 고드름을 치렁치렁 달고있는 주목 군상이 황혼을 물고 있으며, 옅은 운해 머리위로 가로지른 석양빛은 팔잃은 고사목과 어우러져 심금을 울린다.
다섯시간 십여분 눈길을 뚫으며 오름을 탄 18시 12분, 1614 미터 덕유산 향적봉에 올랐다.
이 이는 1975년 2월 국립 공원으로 지정 되었으며 사계절 달리하는 절경은 찾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을 나누고 있으며 특히 구천동 계곡의 비경에 묻히면 여간하여 자연의 신비로움에서 헤날 수 없다. 북서쪽으로 적상산이 다가서고 남쪽으로는 남덕유의 굵은 산줄기가 꿈틀대고 있다.
북으로 민주지산과 백두 대간을 이뤄 아름다운 지세를 수놓고, 동으로 수도`가야산을 아우르고 있다.
향적봉 대피소에서 밤을 지샌 30일 이른 아침(07시 15분) 남덕유산을 바라보면서 중봉을 지나 덕유 평전으로 내려 선다.
망망대해에 외롭게 뜨있는 외딴 섬마냥 운해를 뚫고 솟은 가야산이 감탄을 자아낸다.
흰 바다위 소매 걷고 찬바람 베어 문 덕유 능선을 온전히 품속에 쌓으면서 들뜬 걸음을 옮긴다.
눈아래 펼쳐진 하얀 대지는 저마다 굳센 파도 줄기를 이루어 장대한 덕유 몸통에 부딪치며 부서진다.
겨울빛은 조각되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며 놀란 가슴 쓸어 내리고, 함께하려는 마음을 먼저 네게 줌 옳게여겨져 너의 넋으로 스민다.
동녘이 열리기 시작하며 무룡산과 남덕유산의 위세가 옅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칼날같은 위압감을 준다.
뚜렷한 음영이 능선들을 이겨대고 있으나, 오른쪽으로 꺼져내린 덕곡리 계곡은 여지껏 일어날 낌새 없다.
반들거리는 덕곡 저수지가 그를 깨우려 손바닥 가득 차디찬 물을 끼얹고 있으나 검은 육신만 뒤챌 뿐이다.
간간이 등성을 타고 드는 세찬 바람이 송계 삼거리를 지날때, 솜이불같은 구름 바다를 걷어 내고 있다.
용추 계곡(안성계곡)의 늑대 잇빨같은 살벌한 기운도, 구름위 아득하게 그림 진 지리 능선도 걷는 이에게 퍼주는 감미로운 사랑은 가슴 깊게 스며 든다.
지난 가을 벗어버린 나신위에 상고대 겹겹이 흘러 내리고, 영롱한 햇살을 베물고 있는 활엽 군상들이 곱게 화장한 설화를 뺏기지 않으려 찬바람 뒤고 숨는다.
09시 15분, 동엽령을 거쳐 무룡산으로 오른다.
오른쪽으로 움푹 패여진 칠연 계곡의 칠연 폭포는 얼어붙은 빙벽을 깨치며 우렁찬 함성 지르고, 왼쪽 병곡리 계곡의 희검은 용틀임에 눈꽃을 피우던 활엽 나목들이 진저리 친다.
발자욱 마다 자지러지는 눈살이, 발바닥을 간지르며 으깨지는 소리를 눈으로 들으며 부지런히 걷는다.
양쪽 계곡이 급히 밀어올린 능선 길에서 어느쪽을 보더라도 절묘한 절승이 잡고 놓아주지 않길래 걸음은 한없이 더뎌 진다.
11시 15분, 1492 미터 무룡산에 올랐다.
장대한 능선을 설원으로 치장하고 있어 맘껏 안고싶은 부러움 숨길 수 없다.
말잔등같은 완만한 동엽령을 타고 내리다 숨가쁘게 솟으며 무룡산을 이루고, 새까맣게 꺼져 내린 원통골(명천계곡)은 능구렁이 기어가 듯 검은 자국을 패며 구량천과 봉황천으로 흘러 금강으로 꼬리 감춘다.
이 모든것이 단절된 가슴을 트이게하며 짐승같은 신음이 혀를 타고 넘어 온다.
아릿한 아픔을 느끼면서 * * * * * * * * * * *
산수리 계곡이 부리나케 쫓아오르며 무룡산을 닦아 세우고, 남덕유산의 위용에 주눅든 삿갓봉이 나름대로 앙칼진 발톱으로 애교를 부린다.
서봉과 함께 삼각 기암 파도를 일으키고있는 그들은 골짝마다 흰피를 쏟으며 투명한 빛살에 출렁인다.
삿갓골 대피소로 험악하게 꺾인 능선 길이 아스라히 이어지며 오르고 내리길 수없이 반복하는 중에 목젖은 탄다.
불어오는 원통골(명천골) 찬바람에는 조릿대의 향기가 배어있고 벌거벗은 상수리의 해맑음을 물고 있으며, 흰눈을 뒤집어쓴 주목의 바람 가르는 소리가 담겨 있다.
12시 30분, 대피소에 도착하여 허기진 점심 식사를 마친 13시 50분, 남덕유산으로 오른다.
하얀 대지위에 길은 열려 있었다.
많은 등산인들이 감동에 젖었었고 아름다움에 몸서리 친 길이 능선을 둘로 가르며 놓여 있다.
어렴풋 좋아하게될 길임을 알았지만 이녁 넋이 이다지 깊을줄 못난가슴 쉬 헤아리지 못해구나, 변명하는 마음으로 님의 등을 타고 가파른 눈길을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 굽혀 삿갓봉으로 오른다.
14시 15분, 1418 미터 삿갓봉에 올랐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남덕유산과 서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장엄한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서봉은 토곡동 계곡의 숫말같은 야성을 누르고 있으며, 월성재로 오르는 바람 계곡(월성골)은 남덕유산 동편을 사정없이 깎아 내리고 있다.
이의 허리춤으로 파고 들려는 눈길을 애써 달래며 월성재에서 잠시 쉬었다 가파른 남덕유산으로 오른다.
몇 억겁을 더 맞았을 설풍에 흰빛 칠 하고있는 기암 괴벽이, 한줌 되지않는 가슴을 얻고자 미소를 흘린다.
모진 풍상에 시달린 모습 그대로 안기는 이녁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부끄러움이 수상하여 열지 못하는구나, 아!~ ~ ~ 눈빛 서러워 발길 끌린다,
토곡동 골짜기를 싸안고 오르던 설풍이 어깨치며 귓바퀴를 물어뜯고, 가파른 열기는 등골 타고 내리며 덕유의 얼을 심는다.
15시 45분, 송계 갈림길에서 만나 동행하던 백두 대간은 남덕유산을 300여 미터 남겨 두고 서봉을 지나 육십령으로 자취를 감춘다.
불과 몇시간 동안 함께한 대간 이었지만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기쁜 상처로서 아쉬움 남는다.
전부터 오르고 싶었던 이 이의 품속 마지막 가파른 길을 힘차게 딛는다.
향적봉에서 흘러내린 약 15키로 미터 등성따라 흥얼거린 몸은 16시, 1507 미터 남덕유산 정상에 오르며 즐거움 더한다.
서쪽 아득히 마이산을 소리쳐 부르고 있으며 남으로 금원`기백산을 벗으로 한다.
광활한 대지를 눈아래 펼쳐놓고 천만년 세월을 다듬고있는 이 이의 부러움에 넋을 앗긴다.
더이상 이 이의 어깨에 짐을 지우기 싫어 16시 15분, 내림은 영각사 방향의 철계단과 바위 능선 숲을 헤치며 걷는다.
누님 치마 자락 펼쳐 내린 듯 등성과 골짝들이 주름 잡으며 눈빛 속으로 달려 든다.
그들의 샅으로 정신없이 빨려들어, 서있음조차 잊혀지는 황홀한 느낌을 혼자 갖기엔 애석함 앞선다.
발뿌리에 걸려 넘어질 듯 하다가도 어느새 눈빛은 그들과 노니고, 자연의 부름에 귀가 열리다가도 심금을 울리는 덕유의 외침에 가슴을 빼앗긴다.
수 백번 이길을 찾더라도 싫어하지 않을, 아니면, 수 천번을 생각하더라도 사랑해야만 할 이 이를 작은 가슴에 묻는다.
17시 40분, 언제나 그랬던것 처럼, 아쉬움을 풀 수 없는 미련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날까지 님을 쌓아 두리라,


- 안 녕 -



-eaolaji-


▣ 민 우 - 오랫만에 애오라지님 의 눈덮인 덕유산을 접하니 설경의 황홀경에 빠져드네요,내내 건강하시고 산행기도 종종 보여주시길....
▣ 민 우 - 오랫만에 애오라지님 의 눈덮인 덕유산을 접하니 설경의 황홀경에 빠져드네요,내내 건강하시고 산행기도 종종 보여주시길....
▣ 이수영 - 언제 읽어도 황홀합니다.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글이 나오시는지요. 님은 시인입니다.
▣ 조문천 - 사진으로 실제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도 더 감동적입니다. 차라리 사진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님의 감상과 감정 그리고 자연과의 동화. 그리고 조물주가 선물한 덕유산. 당신의 글을 독자들. 모두가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