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길따라 강따라 (I)

 

 

                        2004년 12월 05일

 

           경북왜관에서 - 창녕군 이방면 성산리까지

 

                    아내와 둘이서, 승용차와 도보

 

 

 

 

 

 

<잠시 들어가기 전에.....>

 

1894 년 겨울과 1897년 봄사이에 나는 네차례에 걸쳐 코리아(대한제국)를 답사했다.

한국여행은 몽골리안들의  국가와 지리, 그 민족적 특징을 연구해 온 내 학문적 계획

의 일부였다.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한국이 지금까지 내가 여행한 나라들 중

에서 가장 재미없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청일전쟁 동안 한국의 정치적 불안, 급속한 변화, 그리고 어찌될 지 알 수 없

는 한국의 운명들을 깨달으면서 이 나라에 대해 참으로 강렬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

 

<: 1897년 11월 이사벨라 버드 비숍 (방대한 그의 책의 서문 중 일부)

서론을 포함 총 38개의 소주제로 19세기말 멸망해 가는 조선 땅의 왕실내부와 민중

의 삶의 세세한 부분, 이 땅의 암울과 아울러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담담히 기술한 그

녀의 한국기행문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다시 읽으면서 ...... >

 

 

조선을 사랑한 그녀는 독특한 여행을 하였는데, 다름아닌 수로를 이용한 자연탐사였

다. 한강상류를 나룻배를 이용하여 5주간 배 위의 생활을 하였고, 남한산성에서 단양

까지, 남한강 상류에서 북한강으로 뱃길여행을 하면서 서울 중부 일원을 탐사하고

그녀 특유의 독특한 관조를 한다.

 

 

당시 일련의 급박한 역사적 사건을 왕실의 곁에서 뚜렷이 목도하였고 여성과 문화

(무당과 기생, 여성의 사회적 지위)개성과 평양의 여행, 금강산과 원산해변의 여행

등을 통해 이 나라에 대한 아름답고 긍정적이며 긍휼에 찬 보고서를 모국 영국에 제

출하는 것으로 목적을 다한다.

 

 

그녀는 당시 영국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었던 것이다.

낙동강 길따라 탐사를 시작하며 다시 비숍여사를 생각한다.

 

 

마침내 남강의 줄기를 따르는 여정을 마치는 것으로 그 목표를 세웠지만 힘이 닿으면

직접 도보로 걸어서 남강의 줄기를 따라보고자하는 희망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낙남정

맥과 아울러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줄기와 지리산에서 시작된

낙남의 줄기를 잇는 일생의 소망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낙동강의 범주>

 

 

 

낙동강은 영남지방 전역을 유역권으로 하여 그 중앙 저지대를 남류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하

천으로 유로연장 521.5㎞, 유역면적 23,817㎢으로 압록강 다음가는 한국 제2의 강이다.

 

강원 태백 함백산(咸白山:1,573m)에서 발원하여 상류부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반변천(半邊

川)을 비롯한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흐른다.

 

서쪽으로 곡류하다가 함창(咸昌) 부근에서  내성천(乃城川) · 영강(嶺江) 등 여러 지류를 구심

상(求心狀)으로 받아들이고,

유로(流路)를 남쪽으로 돌려 상주(尙州) 남쪽에서 위천(渭川)을,

선산(善山) 부근에서 감천(甘川),

대구(大邱) 부근에서 금호강(琴湖江),

남지(南旨) 부근에서 남강(南江)을 합친 뒤

동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삼랑진(三浪津) 부근에서 밀양강(密陽江)을 합치고 나서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  

 

 

 

 

 

 

 

<왜관에서>

 

나는 산행과 더불어, 비교적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낙동강 길을 따르는 나름대로의 답사여

행을 함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로는 단절적이기도 하며 때로는 순서를 바꾸어 가지도 하겠

지만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남강탐행을, 당분간 띄엄띄엄이나마 연결을 해 나가고 싶다.

 

그 첫 출발은 왜관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

왜관은 낙동강의 역사적 상징성과 닿아 있는 요소가 다른 곳 보다 뚜렷하다고 생각했다. 소

금길인 낙동강의 수로운송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고, 역사적으로 낙동강이 생존을 위한 처절

한 전투의 장이었던 점과 관련하여 빈번했던 왜전과 6.25 왜관전투를 쉽게 떠 올렸기 때문

이다.

 

안동이나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하루 일정으로 크게 부족하게 되어 내려가기가 바쁘고 무엇

보다도 충분한 자료적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래사진 : 왜관지구전적비)

 

 

 

 

왜관전적기념관에 들어섰다. 굳이 시작을 이곳으로 잡은 것에 대해 아내는 그다지 동의하는

느낌이 아니었으나, 다리 건너 구왜관을 찾는데 실패를 한데다, 왜관읍에서 바로  67번 도로

로 남진을 시작하다가 둑과 공사 때문에 되올아온 처지라 가타부타를 발설할 처지가 아니었

기도 했다.

 

아무도 없이 추운 기념관내를 들어섰다가 옛날 국군과 인민군의 밀납인형을 보고는 흠칫 놀

란다. 이런 이렇게 간뎅이가 적어서야 원.....

 

피아 수만명이 몰살한 전쟁의 상흔이 참담하게 기록되어 있다.

.....!

 

모든 역사는 슬프다.

모든 역사는 "죽음의 형태"이며 "죽음의 방식"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므로......

전쟁의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인간은 없고 오로지 살육의 벌판 위에 널부러진 주검만이

있다. 과거 어느 생이었던지 간에 우리는 그 살육의 현장에 동참하였을 것이므로 그러한 역

사 앞에서는 진정으로 참회를 해야할 것이다. 

   

 

잠시 인용을 하면.....

 

<왜관전투>


 

멀리 금오산이 바라다 보이는 석적면 중지리 낙동강변에 위치한 이 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이곳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던 격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으며 6개의 전시장엔 당시 사용되

던 무기류와 피복등이 전시되어 있다.


 

1950년 8월 1일 미군의 워커 중장은 '워커라인'이라는 낙동강방어선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8

월 3일 왜관 전 주민의 소개령이 내렸고 낙동강 방어선의 교량들은 적도하방지를 위해 8월 4

일 새벽까지 모두 폭파 되었는데 이 때 왜관 인도교도 폭파되었다. 8월 16일 인민군 4만 여명

이 집결해 대규모 도하작전을 벌이자 워커 중장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 원수에게 융단 폭격을

급히 요청하게 된다. 이 요청에 따라 일본에서 출발한 B29 비행기 98대가 왜관 서북방 67㎢

에 26분 동안 90톤이나 되는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인민군 4만명중  3만여명이 죽었

다고 하니 1초에 20명, 1분에 1,150명이 폭사한 셈이다.


 

이 융단폭격으로 산과 들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되어버렸고 특히 인민군 제 2군단의 병참

보급기지이자 제3사단 사령부가 있었던 약목역(약목면 복성리)근처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버렸다. 당시 인민군 야포의 사정거리는 20㎞, 반면 왜관에서 대구까지는 25㎞가 넘었다. 왜

관을 빼앗길 경우 이곳에서 10㎞ 후방인 도덕산까지 인민군이 장악해 대구는 인민군의 사정

권안에 들어가게 되며 부산까지 밀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엔군이 필사적으로 왜관 일대의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려 한 이유였다.

 

 

(아래사진 : 노석리 강변에서, 건너편은 왜관 낙산리, 67, 79번 지방도로변 강둑은

공사 중이어서 이쪽 성주군 쪽 기타차도를 타고 내려갔는데 잘한 선택이었다.)

 

 

 

왜관읍에는 시인 구상을 추모하는 구상문학관이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기념관에 들를 수는

없었고 전투기념관을 향하는 시내 소로변에 위치한 기념관 앞은 지나며 잠시 구상시인의 삶

을 추모하였다. 다음은 노시인의 임종에 대한 일간지들의 소식이다.

 

 

--‘영혼과 구도’의 문학정신을 펼쳐온 구상(具常·85) 시인이  2004년 5월 11일 지병으로 별세

했다.--


 

구 시인은 1946년 고향 원산에서 동인시집 ‘응향’에 ‘길’ ‘여명요’ 등을 발표하며 등단한 후 돈

독한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영혼을 노래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구상 시인은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며 영적인 작품 세계를 일궜다.


 

  젊은 시절 사상과 신앙, 현실 사이에서 방황의 시절을 거쳤으며  신문사 재직시절 이승만 정

권에 맞서 반독재 투쟁을 벌인 언론인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거친 세상에서 뒹군 덕에 그의

시 세계는 따뜻한 인간미와 휴머니즘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구상은 문학이 곧 인품이었다. 한국전쟁의 페허 속에서 화가 이중섭과 작가 공초 오상순, 시

인 김광균·박용주, 아동문학가 마해송씨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눴고, ‘걸레 스님’ 중광 같은 독특

한 개성의 예술가와도 오랜 우정을 지켰으며 장애우나 수감자등의 소외된 사람에 대한 사랑

도 남달라  투병중이던 2003년 10월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을 지원하기도했다.


 

그의 집에는 책과 문학만이 넘쳐났다. 시인이 평생 지켜온 화가 이중섭과의 우정은 이중섭 미

술상으로 결실을 맺고 서귀포에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거리를 만드는 것으로 꽃을 피웠다.


 

돈과 권력을 멀리했던 시인의 모습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오랜 친분을 지키면서도 한 번도  도

를넘어선적이 없었으며 “나는 수염 기르며 사는 야인(野人)”이라며 가난한 시인으로 부끄럽

지 않은 생을 살았다. /조선일보


 

칠곡 구상문학관에 구상 시인의 생전의 손때묻은 유품들과 ,작품활동을 하던 모습이 담긴 사

진 물화,서화, 서간문,도자기 등 소장품과 구상시인의 소장도서 2만 2천여권의 도서가 남겨져

있어서 그의 삶과 문학을 엿볼수 있다. 도한 문학관 옆 관수재(觀水齋)가 복원돼 그의 문학혼

을 엿볼수 있다. / 매일신문

 

 

<왜관교 지나 성주군 선남면 쪽 소로를 따르다.>

 

성주니, 고령이니 하는 땅들은 원래부터 내 지리인식의 바깥 범주에 있는 익숙하지 않는 지명

이다. 왜 그런지 가끔 들러도 공간이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이동까지 함께 이루어지는

낯선 과거의 땅인 것 같다.


(아래사진 1: 선남면 선원리 강둑에서 성주대교를 바라보며)

 

(아래사진 2: 선원 잠수교 못 미친 마을입구, 둑의 정자에서 바라본 다산리 쪽 낙동강)

 

 

 

 

이제부터는 강변으로 가는 길은 없다. 탐사를 다녀온 후, 신정일의 낙동강역사문화탐사

라는 단행본을 일독하였다. 그런 책을 발견한 기쁨이 컷고, 이런 책을 발간한 저자의 노고

가 존경스러웠으나 두툼한 한권으로 낙동강의 이야기를 담기에는 너무 부족한 지 중간

중간 덤성덤성 이야기를 끌고 나가 아쉬웠다.

 

이 분은 이곳에서 무리하게 강변으로 진행하다 길을 못찾고 고생만 했다. 도보탐사의 유혹

을 이해하지만 이쯤되면 탐사도 목숨을 내놓고 해야하는 것이라 싶었다.

 

이곳까지의 낙동강변의 느낌 중에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나 시행되고 있는

광범위한 모래채취 공사 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건축 토목을 위해 모래는 항상 필요하고

지금도 엄청난 양의 모래가 중국에서도 수입되고 있지만 그래도 낙동강의 모래는 끊임없이

파헤쳐진다.

 

모래사장는 강의 자정작용을 돕는 근원적인 힘이다.

상중하류를 막론하고 엄청나게 쏟아내리는 오염수들을 자정할만한 힘을 잃지 않도록 건설

과 환경보전의 조화를 잘 이루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져본다.

 

그 다음으로는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 들어찬 엄청난 규모의 비닐하우스 단지이다.

어차피 강유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자하는 지역민들에게 고수익의 하우스 농사는 어

려운 농업기반을 고려할 때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매년 일어나는 홍수피해로 엄청난 양의 폐비닐이 강둑 어디에서나 떠밀려와 걸쳐진

채로 쓰레기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점차 누적이 되어 중대한 환경오염원이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산재한 푸릇푸릇한 보리밭은 겨울 낙동강가의 운치를 더했다.

 

 

 

 

 

 

 

 

<고령군 다산면에서>

 

 

다산면에서 낙동강은 크게 휘돌아 토촌리에서 거대한 모래사장과 비옥한 퇴적지를 이룬다.

이곳에서 대구시내를 관통한 금호강이 낙동강과 만나 퇴적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금호강은

한때 낙동강 오염부하 총량의 27 퍼센트를 점유할 정도로 오염의 주력이었다. 요즘은 어떤

지.....(오염도는 신정일의 낙동강~에서 인용)

 

토촌리로 가기 위해 지도에 표시된 농로를 따라 노곡으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노폭이 너무

좁고 노곡초등학교에서 곽촌리로 가는 농로의 안정성도 확실하지 않아 마침내 진행을 멈

추고 되돌아왔다.

 

사문진 나루터에는 사문진 교가 있어 대구 화원으로 진입을  할 수 있다. 사문교로 진행을

하다가 생각을 바꾸고 화원-논공 쪽 보다 강쪽으로 달라붙는 성산면 쪽 구 고령교 쪽 강길

로 이어가기로 미음을 바꾸었다.

 

후회컨데, 그냥 그대로 토촌리로 진행했다가 다시 돌아오면 될 것을.... 괜히 미리 되돌아

와 광대한 모래톱을 확인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다음에 꼭 일견하고 자료를 남겨야겠

다.

 

 

(아래사진 1: 건너편 화원-논공일대가 보이고 낙동강은 굽이 친 이후라 평화롭기 그지

없다.)

 

 

(아래사진 2: 정면에서 해가 떨어지는 역광이지만 강폭이 넉넉해져 카메라에 담고 싶

었다.)

 

 

 

 

다산의 월성리에서 벌지리를 잇는 강변 소로는 지도와 달리 포장이 잘 되어 있었다. 상로다-

하로다 를 이어가는 길은 건너편 화원-논공을 바라보며 가는 멋진 코스였다. 하로다에서는

경관이 좋아 한참을 쉬었다. 아래지도의 최 상단부가 하로다 이다. 

 

 

 

 

 

 

 

(아래사진 1: 금계산일까... 건너편 경치도 좋고 이쪽 정경도 평화롭다.  하로다에서)

  

(아래사진 2: 슬프디 슬픈 광경)

 

 

 

 

 

강쪽으로 가까스로 난 길을 따라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린 딸.

스쳐 지나가는데 쓸쓸함과 음울한 느낌이 전해져온다.

왠일이지...??!!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 싫은 표정으로

몇 번이나 뒤를 힐끔거리며 딸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강변으로 내려간다.

손에는 막걸리 한병과 과자와 음식이 든 봉지가 들려있다.

 

상황은 직감적으로 파악되었다.

차마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조차 줄 수가 없이 아픔이 밀려왔다.

언젠가, 아내의 재가, 엄마의 살내음이 뿌려졌었나보다.

 

 

아아. 인연의 아픔이여.

떠나간 자를 애닲아하는 남겨진 자의 설움이여.

 

전쟁의 붉은 피가 흘렀어도

삶의 잿빛 애환이 뿌려졌어도

드넓은 침묵으로

낙동강은 세월의 강을 흐른다.

 

 

...... !

 

 

 

 

 

<옛 고령교를 지나 익숙한 길로 들다>

 

 

무계리-박곡리 지나 당고개 휴게소에 들었다. 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둑으로 올라보았다.

둑은 무계리까지 이어져 강 안쪽으로 광대한 퇴적지를 이루고 있고 엄청난 하우스 농업이

행해지고 있었다. 진즉에 언급한대로 폐비닐을 수거해 놓은 무더기도 산(山)처럼 엄청나다.

 

효율은 곧 엄청난 낭비이기도 하다.   

 

당고개 옆 식당에서 청국장으로 따끈한 식사를 하고 26번 국도를 따라 고령교를 건너 다음

바로 150도 급우회전을 하여 위천읍으로 접어든다. 요즘 가야산 갈때 가는 길이니 익숙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 유명한 위천공업지역이 아닌가. 

낙동강 하류지역의 상수도보호를 위한 결사반대와 정밀공업단지 조성을 통해 지역의 균형

발전과 지역경제회생을 위한 공단건설 결사이행으로 시끄러웠던 문제의 진원지다.

 

 

 

(아래사진 : 논공읍 상리 부근 모래채취 길 둑에서 바라본 낙동강)

생략

 

 

(아래사진 : 삼각주 모래톱에서 한가로운 오리떼들)

생략

 

 

 

 

 

 

 

 

<달성군 현풍면 도동리 도동서원으로>

 

논공을 지나 현풍으로 진입하면 좌측으로 박석진교가 고령군 개진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늘 궁금했던 박석진교 인지라 건너보았으나 개포나루를 지나면 강쪽으로 붙는 길이 없으므

로 되돌아 나오기로 결정했다.

 

박석진교.

솔직히 나의 무식과 어휘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으로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였던 지명이다.

시골동네의 박석진이란 부자가 살았는데 이 사람이 사재를 털어 다리를 세우고 그 이름을

박석진교라 하였나~?! 뭐 이정도로 생각했었는데 강따라 길따라 내려와 보는 중에 자연스

레 그것이 박석 진(津), 즉 박석마을의 나루터 라는 이름임을 알게되었다.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것인데.... 유치한 지난날이 우습기만했다.^^

 

 

 

 

5 번 국도에서 도동리로 가는 길은 도동서원이라는 작은 표시가 하행선 방향에서만 볼 수

있게끔 되어 있고 그것도 자그마한 갈색 표지판에 지나지 않았다. 지나쳐서 갈까말까했는

데 지도상으로 가만보니 그렇게 되면 길은 낙동강과 너무 떨어지게 되어 다시 찾아 들었다.

 

소중한 만남은 이렇게 우연찮게 이루어진다.

들어보지도 못했던 영남의 5대 서원 중 하나 이렇게 우리에게 감탄으로 찾아든 것이었

다.

 

 

(아래사진 1: 도동서원가는 자모리 인근의 강변에서 찍은 겨울녹색 정경)

 

(아래사진 2: 자모리 강변에서)

 

 

 

 

 

 

 

 

(아래사진 1: 도동서원 가는 길에 오늘의 최대고도 185 미터, 다람재에서.

낙동강과 멀리 비슬산 정상과 조화봉이 아련타)

 

(아래사진 2: 다람재 지난 길 아래로 도동리가 보인다)

 

 

 

(아래사진 : 도동서원의 풍경은 꽃피는 봄철에는 멋들어질 것 같다. 다시 오고픈 곳.

1순위로 꼽는다.)

 

 

 

 

 

 

(아래사진들 : 축대의 돌 빛깔이 워낙 아름다워 감탄을 금치 못할 뿐더러 500년 수령

은행나무도 놀랍다.)

 

 

 

 

 

 

 

(아래사진 : 바로 앞마당이 낙동강의 흐름이니 서원의 호수며 정원 같다.

이래서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는가.....  지혜롭

고 어질기를 바라노니 항상 강과 산을 가까이 할지이다...)   

 

 

 

 

 

 

저렇게 튼실하게 키운 앞마당의 무뿌리도 요즘은 값이 폭락하여 수확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니 농민의 속내가 어떻할꼬.... (위 사진의 우측 하단부^^)

 

 

<도동서원 : 인용>

대구 달성군 내에는 많은 서원이 있는데, 그중 도동서원의 의미는 남다르다. 듬직한 산이 뒤

를 받쳐주고 낙동강이 앞으로 흘러 시야를 훤히 틔워주는 그 경치도 일품이지만, 그보다도 조

선 5현의 한 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도동서

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철폐되지 않은 전국 47개 주요 서원의 하나로, 보물 제 350호로

지정되었다.

 

김굉필 선생은 1454년(단종 2년) 대대로 글을 읽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학

문에 힘쓴 그는 26세 되던 해 생원시에 합격하면서 벼슬길로 나아갔다. 그후 사헌부 감찰, 형

조 좌랑 등의 요직을 거치지만 벼슬에는 뜻이 없어 학문과 교육사업에 주력했다.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무오사화에 연류되어 유배를 떠나는데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

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조광조 같은 뛰어난 제자를 길러낸다.

 

1504년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나 50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쳤다. 김굉필 선생은 스승 김

종직의 권유로 읽게 된 소학을 곁에 두고 언행을 삼갔기때문에 소학동자라는 별명을 갖게 된

다.


 

현재의 서원은 선조 38년(1605)에 중건되었으며, 2년 후인 선조 40년(1607년)에 도동서원으

로 사액되었다. 서원 앞에는 400여년된 은행나무가 눈길을 끌며, 외삼문을 대신하여 정면에

선 수월루에 올라서면 낙동강과 고령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서원 경내는 수월루, 강당 등 주요 건물을 일직선상에 세우고 그 나머지 공간에 부속건물을

배치시켜 위계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간결, 소박하며 아름다운 토담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암키와의 수막새을 엇갈리게 끼워 장식한 이 토담은 보기드문 걸작으

로 우리나라 재래 토담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아래사진 : 도동나루터 위에서. 낙동강 저편으로 비슬산정상, 조화봉, 관기봉 능선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도동서원을 지나 도동나루를 거쳐 강변로를 달리니 길은 180도를 도는 듯 크게 방향을 바꾼

다. 왼쪽으로 송담서당이 보이는 듯하더니 길은 구지면으로 접어 들었다. 잠시 강과 멀어지는

길이 바로 1093 지방도로이다.

 

내리에서 대암리 거치니 다시 길은 강변으로 접어들고, 이길은 포장공사 중이라 흙길이다.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 가듯하고 날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다. 멀리 율지교가 보이더니

길은 67. 79번으로 다시 갈아타고 창녕군 이방면으로 들어선다.

 

드디어 경상남도다.

 

 

(아래 사진 : 구지면 징리 부근 고추받에서 돌아본 낙동강, 삼각주가 예쁘다.)

 

 

 

 

 

 

해는 저물어가니 적포에서 마지막 촬영을 하고 마칠까, 남은 시간에 가까운 우포로 접근을 할

까 고민을 하였다. 이방의 안리에서 우포로 가면 비교적 짧은 거리이므로 접근해 보자며 급히

방향을 돌렸다.

 

우포 안에서 적당히 알바를 하고 황급히 성산리로 빠져나왔다. 토평천 둑을 통해 빠져 나오느

라 혼쭐이 났다. 중간중간 둑길이 질어 해질 녁에 바퀴가 빠질까봐 식은 땀이 났던 게다.

 

덕분에 긴장이 되어 사진은 한장만 건진다.^^ 산에서나 늪지대에서나 알바는 신경을 곤두세

워 긴장을 촉발 하누나.

 

완전히 어두워진 시간대라서 적포로 되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음 주에 다시 적포다리에

서 시작해보기로 하고 고속도로에 차를 얹혀 오늘의 행보를 마감하였다.

 

주마간산 (走馬看山)......

주차간하 (走車看河)......

 

 

(아래사진 1: 우포 늪.  늪 위로 저녁 햇살을 받는 화왕산 능선이 펼쳐졌다.)

 

 

(아래사진 2: 토평천 강둑에서 자굴산이 보이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