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華山(441m) 山行記

설화산의 모습

 雪華山(441m)의 來歷 ★

  설화산은 아산시 좌부동과 송악면, 배방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서쪽 산기슭에 외암민속마을, 동쪽 산기슭에 맹씨행단(고불 맹사성의 고택)을 품고 있는 높지 않은 산이다. 이 산에는 붓끝 같은 봉우리가 솟아 있어 문필봉이라고도 하며 그 기세가 매우 독특하여 문필가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이곳에는 칠승팔장지지의 명당이 있어 예로부터 투장이 성행하여 가뭄이 들면 투장한 곳을 찾아 파헤치고 기우제를 지내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 또 이곳에는 이른 가을철부터 늦은 봄철까지 눈이 덮여 장관을 이룬다해서 설화산이라고 한다.

  

                            망경산의 모습

 望京山(600m)의 來歷 ★

충남 아산과 천안의 경계에 자리잡은 망경산은 이웃해 있는 광덕산과 함께 등산객들의 발길이 늘고 있는 곳이다. 산의 서북쪽 아래에 위치한 강당골에는 강당사라는 이름난 사찰이 있다. 이곳에는 외암문집 목판각 300매가 보관되어 있으며 조선 숙종때 경영관을 지낸 외암 이간 선생이 유학을 강론하던 관선제가 있다.

정상에서는 광덕산의 전경과 수철저수지, 설화산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여기에서 건너편 광덕산까지의 종주도 가능하다

 

≪아산시 홈피 및 yahoo에서 발췌≫

 

位    置 : 충남 아산시 관내지역

日    時 : 2005. 01. 23(일)

日    氣 : 포근, 바람 : 없음

山 行 者 : 홀로

찾아 가는길 : 집에서 20분 소요

 

 

  

 

                           今日山行 豫定路圖


山行距離 : 약 15㎞

山行時間 : 5시간10분(간식 및 휴식시간 포함)

     09 : 50 - 망경산 명막골휴게소(마법의성) 출발

     10 : 25 - 정부인오씨지묘

     10 : 55 - 망경봉 정상

     11 : 30 - 임도 갈림길

     12 : 30 - 자연보호 야립간판

     13 : 20 - 작은봉

     13 : 40 - 설화산 정상

     14 : 00 - 석 탑

     14 : 30 - 오봉암

     14 : 55 -좌부동 주차지 도착

     산행마침

 

지난주 월악산을 엉터리로 산행한 후 이번 주에는 따뜻한 남쪽 산행을 위하여 지도를 몇 번이나 펴 보았는지 모른다.

21일 야간운전으로 남으로 가서 토요 산행후 저녁에 지인들과 연통이 되면 저녁에 해후하고 익일 올라오려고 하였는데 또 일이 새해 초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계속 연타다

내용인즉, 수요일 저녁에 6촌 형님의 전화가 왔다 22일 아들 결혼식이 안양에서 있는데 시골로 관광버스 한대를 보낼테니 집안네 모두 오라는 것이다.

 

어이구 이일을 어떻게 한담, 미치고 팔딱 뛰겠다. 남도는 또 다 틀렸고(고사라도 걸게 지내야 하려나 원 - 하긴 아직 음력으로 계산하면 새해가 된것은 아니니까 새해가 오기 전에 온갓 나쁜것은 다 지나가길 자위해 봅니다.) 하는 수 없이 계획을 취소하고 토요일 예식장에 갔다가 일요일에 처와 근교에 있는 망경산에서부터  설화산까지 산행을 하기로합니다.

  

돌발상황 발생 

버스를타고 오는데 겨울이 다가기전에 바닷 바람한번 못 쐬어 봤다는 둥 회를 먹으러 가자는 둥 하더니만 급기야 말이 나온김에 내일 목포로 출발하자고 한다 하더니만 중섭이 아빠, 서방님 하면서 반 강제적으로 허락을 강요한다.

허참 결과적으로 제 승용차와 동네 차 모두 2대로 목포를 가기로 결정을 본 것이다. 

 

하는수 없이 제 승용차와 아내는 목포로 유람 보내고 나는 짐차(1톤 포터)를 끌고  날머리인 좌부동에 주차시켜 놓고 택시로 배방면 명막골 휴게소로 이동하여 산행을 시작합니다.

  

        

                                    산행 초입의 눈길

명막골 휴게소에 도착하니 09:50분이다. 준비운동을 하고 마법의 성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면 양계장이 나오는데 죄회전하면 위와 같은 길이 나옵니다. 100m 정도 올라가면 임도가 우측으로 개설되어 있는데 통행을 금한다는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벌레의 집

동면에 들어간 벌레의 집 같은데요 혼자는 싫어서 이들도 무리로 있는것 같은데 이 벌레 이름이 혹시 여름에 산행 할때 쏘는 쐐기가 아닌지요?

  

         

                                     등로의 안전로프

경사가 제법 심한 편으로 눈이 깔려 있어서 약간 미끄러우나 아이젠을 착용하기에는 무리인것 같습니다. 로프에 의지한체 산행을 계속합니다.

  

         

                                  처음 맞는 암봉

육산이라 돌이 귀한 편인데 이 암봉을 우회하여 첫번째 작은 봉우리에 도착하면 정부인 보성 오씨 지묘가 나옵니다.

50여m의 내리막길에 이어 다시 가파른 오르막 길이 시작됩니다.

숨을 몰아 쉬며 오르면 망경산 정상입니다. 정상에는 갈대 숲과 묘 1기가 있습니다.

오르는중 온양K2산악회와 다른 산악회의 리본들이 곳곳에 매달려 있어 알바 할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산님들이 광덕산에서 이곳으로 산행을 하는지라 아직까지 한명도 조우하지 못하였습니다.

    

         

                                                        망경산 정상에서 본 광덕산(서편)

날씨가 포근하고 바람도 없어 산행하기에는 그만입니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으며 그 뒤로는 묘 1기와 억새가 무성합니다.

  

          

                                      망경산 정상에서 본 태화산(동편)

           이 산 밑에 호서대학교가 있습니다.

  

         

                                      가야할 설화산 능선(맨뒤 봉우리)

흙이 드러난 부분은 토석채취장으로 산자락의 모습이 말이 아닙니다.

토석장 허가는 하나의 산으로 집중 허가를 해주어서 아예 산 하나를 없애버리는 방향으로 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능선길을 따라 광덕산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이곳에서 3명의 산님과 조우하게 되고 첫번째 봉우리를 넘어 안부에 도착하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임도가 나오는데 임도를 따라가면 잠시후 내가 갈 설화산 코스와 만나게 됩니다.

 다시 봉우리를 올라가면 능선 우측으로 설화산 가는길이 나옵니다. 내려가면 임도가 나옵니다.  

  

  

          

                                          임도에 설치된 이정표

이정표  바로 옆 소나무 숲에는 벤치가 4개 설치 되어 있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소나무 숲 등로

등로 주변은 2004년도 겨울에 아름다운 숲 가꾸기 사업으로 잘 가꾸어져 있었고 소나무 사이로 등로가 잘 정비 되어 있어 송진냄새가 제법 좋습니다. 이곳에서 인절미와 빵으로 중식을 합니다.

  

          

                                             두꺼비 형상의 바위

봉우리를 2개 정도 넘으면 자연보호 야립간판이 나오는데 그앞에  묘 1기가 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선전탑을 왜 하필 이곳에 설치 하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작은봉에서 조망한 설화산

           정상에 산님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작은봉에서 조망한 맹씨행단

             파란 공장 건물 우측의 소나무 밭이 맹씨행단입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맹씨행단이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壇)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독특한 고려식 건물로서 한가운데 대청이 두간이고 양쪽에 방 한간씩 있으며, 기둥과 도리 새에는 단포로 봉(鳳)의 혀로 장식하였으므로 고적 제154호로 지정되었으며. 사당과 구괴정, 그리고 6백여년 된 큰 은행나무가 있으며 공의 유물로는 옥적, 옥로, 벼루, 옥인과 공의 부인이 쓰시던 옥비녀등이 있다.

  

 조선 초의 명정승 고불 맹사성(1360~1438)의 옛집을 부르는 이름이거니와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옛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맹씨행단이 있는 배방면 중리 마을은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도 찾아가다 보면 깊은 산골을 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금북정맥의 광덕산이 위쪽으로 달려 솟은 설화산을 진산으로 하고 앞쪽으로는 배방산이 안산으로 자리하며 좌우로 나지막한 산들이 감싸고 있어 마을이 아주 아늑한 곳이다. 맹씨행단이 자리잡은 자리는 풍수적으로도 매우 길하여 기를 가득 담은 형세를 지닌 자리라고 한다.

  

맹씨행단은 본래 고려말의 최영(1316~1388)장군이 살던 집이었다. 그러한 곳이 맹씨행단이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맹사성이 다섯 살 때쯤에 아버지 맹희도가 온양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최영장군의 이웃집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늠름했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최영이 그를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 주었고 이후 맹사성 일가는 그곳에서 뿌리 내리게 되었다. 내력이 그러하므로 이집이 처음 지어진 연대는 올려보아 14세기 중엽으로도 짚을 수 있다. 기록으로 성종 13년(1482), 명조 10년 (1632)에 안채가 크게 중수되었다고 하며 집의 방향도 처음에는 손좌로 있었으나 개수한 뒤로는 계향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모습은 처음 지었을 때와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살던 때와도 많이 달라 적어도 서너번은 구조가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큰 사대부집은 반빗간 이라 하여 부엌이 따로 있었고 구들이 일반화 되지 않았으니 온돌방 형식도 갖추지 않았을 것이다. 임란 뒤에 우리나라에 온돌이 널리 퍼지면서 이집에도 대청좌우의 날개에 온돌방을 들여 구들을 설치하게 되었고 아궁이가 있는곳에 부엌도 딸리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1929년에 한 번 중수하고 1970년에 다시 크게 중수를 했는데 그때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많았다. 거기에다 초창때의 것이 아니라 하여 부엌을 떼어내 버렸으니 어딘지 모자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 본래는 안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고 동쪽으로는 행랑채와 사당을 잇는 낮은 샛담이 있어 사랑채로 나가게 되었었다고 한다. 집뒤쪽으로 돌아가 보면 양 옆으로 기와를 층층이 쌓아올려 새운 굴뚝이 아주 정겹다. 굴뚝 위에도 작은 기와지붕을 얹어 비를 가린 모습이 보이는데 이처럼 굴뚝을 집 건물에 바로 달지 않고 건물과는 좀 거리를 두고 설치해서 구들에서 나온 연기가 땅밑을 통해 밖으로 빠지게 하는 방식은 경복궁 교태전의 굴뚝에서부터 공주 마곡사 요사채 굴뚝에 이르기까지 옛날에는 흔히 했던 방식이다.

 

 본채 뒤편에는 맹정승과 그 부친인 동포 맹희도 조부 맹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집 앞쪽으로 있는 요즘 살림집에서 후손들이 기거하며 맹씨 행단을 돌본다. 나지막이 돌담을 둘러 매우 아늑했을 뜰안에는 둥치가 건실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본래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위에서 가르쳤다는 얘기에서 나온말로, 학문을 닦는 곳을 상징한다. 그러한 연유로 맹사성은 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수령이 600여년된 은행나무

  작은봉에서 정상까지는 약 1Km정도 되는데 500여미터를 내려가면 네거리가 나오는데 좌측은 외암민속마을로,우측은 초원아파트로 직진하여 약500여미터 정도 오르면 설화산 정상입니다. 

 

      

                              산 바로 앞 검은부분의 외암마을

 

       가까이에서 보면


外岩民俗村(마을)

  5,300m에 달한다는 돌담으로 이어진 마을 길은 어린 시절 고향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 입구에 새롭게 마련된 주차장에 주차하고 마을로 들어서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돌담사이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넉넉한 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낮은 돌담 사이로 대숲에 부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참판댁 앞의 디딜방아 찧는 소리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2000년 1월에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36호로 지정된 이 외암민속 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같이 집집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결례가 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마을이 형성된 최초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5세시 경에 강씨 목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후 조선 명종(1545~1567) 때 將仕郞을 지낸 이연 일가의 낙향 이주로 예안 이씨의 세거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고택들이 건립되면서 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 마을은 오양골이라 하였으나 이연의 6대손 이간(李柬.1677~1727)이 설화산의 우뚝 솟은 영봉정기를 받아서 외암(巍巖)이라 호를 짓고부터 이 마을의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그 후 표기의 간편화로 外岩이 되었다고 한다.

  

 외암 민속마을은 이 지방의 격식있는 班家와 초가들이 밀집 보존되어 있고 각 가옥마다 둘러져 있는 돌담과 설화산 계곡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맑은 물줄기가 마을 구석구석을 감돌다 흘러 이루어진 정원 및 유실수와 화목군으로 이루어진 수림들이 조화있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생활 용구 등 많은 유, 무형의 민속유산이 외암민속관에 잘 보존되어 있어 아늑한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정상에 선 제 배낭

칠승팔장지지의 명당터에는 평상이 설치되어 있어 정상에 오른 산님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정상에서 조망한 온양 시가지

정상에서는 온양시가지와 천안 쌍용동, 불당동 방면의 아파드군과 천안 아산(온양온천)역사가 한눈에 들어 옵니다.

   
                        데이콤 아산위성지구국

 

    

                             정상에서 조망된 배방산

 

    

                                         정상에서 본 지나온 능선

           맨 좌측의 봉우리가 망경산입니다

 

                    
                                                         석 탑

정상에서 약 500m 정도  내려오다보니 석탑이 있는데 등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완성품은 아니고 누군가가 계속하여 석탑을 쌓는가 봅니다.

 

  

                                           五  峰  庵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공주시 소재)의 말사이다. 오봉암이 자리하고 있는 설화산은 死火山(사화산)으로 온양온천수의 발원지이며, 이전에는 온양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고을의 남산인 설화산이 읍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고, 그곳에 세워진 오봉암이 백성들의 안위를 기원해 온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설화산은 크게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절의 명칭도 이를 따라 五峰庵이라 이름지었다.

 

   
                           오봉암에서 내려오는길

보통 설화산 오봉암을 들머리로 산행하는 산님들은 오봉암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산행을 시작하는데 이곳부터 좌부동 날머리 까지는 약 2Km정도의 거리로 콘크리트 포장도로입니다.

 


                             짐차있는 곳에 도착

     오늘의 산행 마침 

  

  

산행후기

오늘 산행을 함에 있어 일요일 날씨가 어떠할지 몰라 1.21(금) 날씨가 청명하여 사전에 촬영한것을 일부 편집 사용하였음을 말씀드리며, 아울러 깊어가는 겨울의 포근한 날씨에 온양의 근교에 있어 기 몇번씩 다녔었던 산으로 많은 산님들은 광덕산에서 망경산으로 하산하던지 아니면 광덕산- 망경산-설화산-외암마을로  하산을 하는 곳을 역으로 산행을 하였으며, 계단과 돌이 별로없어 무릎에 무리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이었고, 아쉽게도 산이름에 걸맞는 설화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