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핏빛 노을에 '환장'하다
[오마이뉴스 2005-01-17 18:35]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
▲ 겨울 지리산. 밤새 흰옷으로 갈아입었다.
ⓒ2005 박상규
"스무살 무렵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촌에 작은 낚시집이나 하나 열어서 살아가는 꿈/ 또는 땡중이나 수도승이 되어 산사의 목어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꿈/ 백두대간 봉우리 하나쯤 잡아서 산장지기를 하며 늙어가는 꿈/ 그때는 그게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김영하, '다시 은둔을 꿈꾸는 친구에게' 도입부)

14일 밤 11시, 구례행 기차표 한 장이 선사한 은둔의 꿈

나이 서른을 채운 난 여전히 은둔을 꿈꾼다. 언젠가는 지리산에 기댄 산골 마을 하나를 골라잡아 그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토끼 같은 마누라와 다람쥐 같은 자식과 함께 살아가는 꿈. 집 마당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을 심을 테다. 산수유, 앵두나무, 살구나무, 목련, 벚나무, 감나무, 채송화, 봉숭아, 접시꽃, 구절초, 쑥부쟁이, 국화….

그래서 사시사철 피어나는 꽃을 보며 시간에 자유롭고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지. 야생화가 그리우면 지리산에 오르고, 하얀 벚꽃 눈처럼 휘날리는 날이면 예쁜 마누라 손잡고 섬진강으로 향할 테다. 그리고 간혹 나를 잊지 않은 옛 친구 찾아오면 밤새도록 머루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리라.

ⓒ2005 박상규
그러나 난 지금 시간에 쫓기고, 공간에 자유롭지 못한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은둔의 꿈이 언제쯤 구체적인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 전남 구례행 기차표를 손에 쥐고 다시 은둔의 꿈을 곱씹어 본다.

15일 새벽 3시 30분, 섬진강이 지나치게 고요히 흐른다

어둠을 내달려온 기차는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 이른 새벽에 대책도 없이 나를 구례구역에 내려놓았다. 같은 기차를 타고 내려온 수십 명의 등산객들은 저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지리산으로 바쁘게 향한다. 나는 아침이 밝아오길 기다린다.

그나마 따스한 온기가 있는 역 대합실에는 한 쌍의 연인, 잔뜩 웅크린 채 잠을 청하는 아저씨와 나 뿐이다. 밖으로 나가보니 섬뜩할 만큼 고요하다. 지나친 침묵은 죽음이고, 지나친 관심은 사랑이라 했다. 그렇다면 갑자기 느껴지는 이 지나친 쓸쓸함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차가운 새벽, 구례구역 앞 섬진강이 지나치게 고요히 흐르고 있다.

ⓒ2005 박상규
아침 8시, 홀로 오르는 겨울 지리산

화개장터와 십리 벚꽃길로 유명한 쌍계사를 지나 의신 마을에 들어서니 바람이 매섭다.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본격적으로 겨울 지리산으로 들어선다. 모든 잎을 떨군 나뭇가지를 훑으며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건조하다. 벽소령으로 향하는 이 길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길이다.

나 홀로 오르는 산길이 좋다. 바람소리를 제외한다면, 마른 낙엽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와 거친 내 숨소리뿐이다. 속살을 드러낸 채 차가운 겨울을 나고 있는 산에 오르면, 앙상한 가지만으로 잔인하리 만큼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있는 무수한 나무들 사이에 홀로 서면, 가슴속엔 그리움으로 가득 찬다.

▲ 좋은 자리 다 놔두고 왜 이런 곳에서 자라는지... 지리산 바람으로 나무가 한쪽으로 치우쳐 성장했다.
ⓒ2005 박상규
초등학교 때 전학 간 친구, 담배 피웠다고 나에게 몽둥이질 한 선생님, 이미 세상을 등진 아버지, 나를 울린 여인과 내가 울린 여인, 세상이 싫다더니 정말 죽어버린 내 친구, 지리산 별빛에 환호성을 터뜨리던 옛 여자친구... 생각나는 사람은 많지만 곁에 있는 사람은 없다.

무수한 사람들이 마음속을 거쳐가면 곧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홀로 겨울산을 올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 생각 없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벽소령산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10분. 돌아보니 정말 사람 하나 만나지 못했다.

▲ 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과 세석산장. 여름이면 이곳은 야생화 천국으로 변한다.
ⓒ2005 박상규
오후 3시, 그 '선배들'은 어디로 갔을까

다시 촛대봉에 섰다. 수많은 지리산 봉우리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봉우리다. 20살 무렵엔 지리산의 높이가 좋았고, 풍덩 뛰어들고 싶은 운해가 좋았다. 지리산을 미약하게 나마 알아갈 즈음엔 밤하늘의 별빛이 그렇게 좋더니, 이젠 무색·무취·무욕의 지리산 바람이 좋다. 그 바람을 느끼기에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이 촛대봉이다.

촛대봉 바로 아래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평원인 세석평전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일제시대 비행장을 닦으려 했다는 이곳의 평원은 직경 2km가 넘는다. 늦은 봄이 찾아오면 세석평전에는 연분홍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7월 중순부터 8월까지는 이곳 전체가 야생화 천국을 이룬다. 산오이풀, 구절초, 쑥부쟁이, 원추리, 동의나물, 어수리, 산쥐손이, 투구꽃, 동자꽃, 모싯대, 물봉선.... 세석평전 야생화 꽃밭은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다.

야생화에 반한 이후 난 이곳에서 사랑하는 여인네와 뒹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이태의 <남부군>을 보면 6·25전쟁 때까지 이곳에 토막집을 짓고 약초를 캐며 살아가는 50대 부부 이야기가 나온다. 그 50대 부부는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을 앞서 실천한 '선배'다. 지금 세석평전에서 그 선배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 선배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바람을 좋아해도 한겨울 촛대봉의 바람은 그야말로 사람 잡는다. 형형색색의 야생화 대신 흰눈에 덮힌 세석평전을 두 눈에 담고 걸음을 옮긴다. 더 오래 버티다간 사랑하는 여인네와 꽃밭을 뒹굴겠다는 꿈을 이루기도 전에 얼어죽을 판이다.

▲ 핏빛 지리산을 보면 '환장'한다.
ⓒ2005 박상규
오후 5시, 핏빛 지리산 노을에 환장하다

"그 시절,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그 산중을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전쟁이란 낱말로도 설명될 수 없는 비참함 속에 죽어갔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는 그 주검들은 풍우 속에 흙이 되었으나 그들이 불태워 살랐던 핏빛 정열에는 한가락 장송곡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흐르고 있다." (이태, <남부군>에서)

촛대봉부터는 낙엽길이 아닌 눈길이다.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매서운 칼바람 맞으며 능선을 타고 장터목으로 향한다. 촛대봉과 연하봉 사이 전망 좋은 바위에서 발길을 멈추고 해가 지길 기다린다. 칼바람이 몸을 아리게 하지만 오늘은 작정하고 핏빛 노을을 기다린다.

▲ 눈보라 치는 지리산.
ⓒ2005 박상규
흔히들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그 넓은 품에서 비롯된 말이겠지만 어머니의 얼굴은 잔인했다. 표현대로 하자면 이 '어머니의 품'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토벌대가 쏜 총에 맞고, 빨치산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2만을 넘는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머니의 품은 이미 피범벅이 되고도 남는다. 피와 어머니. 아무리 생각해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잔인한 표현이지만 지리산 노을은 핏빛이다. 지리산을 역사의 무게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해질녘의 노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핏빛'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서쪽으로 기우는 해는 지리산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사라진다. 그 모습은 나를 환장하게 한다. 핏빛에 잠긴 육중한 지리산은 가슴속의 분노를 꿈틀거리게 한다.

▲ 지리산 제석봉의 고사목.
ⓒ2005 박상규
16일 새벽과 아침, 눈꽃과 우체통

밤새도록 장터목산장을 때린 바람은 잠을 설치게 했다. 산장에 몸을 누인 150여명의 사람들 모두가 그 바람소리에 나처럼 잠을 설쳤으리라. 새벽에 나가보니 눈발이 휘날렸다. 그렇다면 천왕봉 일출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전망 좋은 제석봉에 올라 내가 걸어온 지리산 능선을 바라볼 때면 가슴은 뿌듯함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비가와도 모진바람 불어도' 나를 지리산으로 이끌고 온 튼튼한 두 다리에게 고마워진다. 제석봉 고사목도, 사철 내내 푸른 구상나무도 한밤중에 내린 흰눈에 덮혀 눈부시다.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지리산을 보았더니 온몸이 뻐근하다. 눈보라 속의 영하 14.9도는 체감온도 영하 30도 이하라고 한다.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나고 손발에 감각이 없는 건 그 때문이다.

▲ 이땅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장터목산장 앞 우체통. 밤새도록 저렇게 추운곳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2005 박상규
오후 1시, 어쨌든 그 모든 걸 지나쳤다

처음 겨울산에 오를 때의 그 막막함.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 도저히 나타날 것 같지 않은 따뜻한 산장. 그리고 자꾸만 추워지고 움츠러드는 몸….

어쨌든 난 그 모든 걸 지나쳤다. 그리고 다시 은둔의 꿈을 뒤로하고 시간에 쫓기며 답답한 공간에서 바둥거리는 삶을 이어갈 것이다. 김영하의 '다시 은둔을 꿈꾸는 친구에게'는 이렇게 끝이 난다.

마흔 무렵이 되면 다시 이런 글을 쓸 것이네/ '서른 무렵에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로 시작하는 글 말일세/ 당신이 부럽네. 축하하네. 이제 새로운 세계로 걸어가게/ 다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싸우고 토악질하고 부둥켜 안고 울기를 바라네/ 그래야 마흔이 되어도 이런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네/ 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