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종주기

 

                           *산행일자:2004.9.26일
                           *소재지  :강원 속초/인제/양양/고성
                           *산높이  :1,708미터
                           *산행코스:한계령-대청봉-공룡능선-마등령-설악동(23키로)
                           *산행시간:2시4분-16시46분(14시간42분)

 

어제는 우리나라 최고의 악산인 설악산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16-17일 덕유산을 종주하느라 여름휴가를 보낸 제게는 추석연휴가 놓칠 수 없는 산 나들이의 호기이기에 어느 산을 어떤 코스로 오를까 벌써부터 행복한 고심을 해왔습니다. 이제껏 가보지 않은 새 산을 골라 오를까, 아니면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고산을 다시 올라 볼까 골몰히 생각하다가 설악산을 오르기로 하고 내년에 시작할 백두대간 종주를 저 혼자서 할 수 있나를 점검하기 위해 한계령에서 마등령까지의 구간을 뛰어 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청봉-마등령의 공룡능선이 백두대간에서 가장 오르내리기가  힘들다는 코스중의 하나이기에 이 코스를 뛰어  제 체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동안 대청봉을 세 번 올랐습니다.
1970년 여름에는 경동OB산악회의 하계훈련에 참가, 남교리-십이선녀탕-대승령-영시암-대청봉-화채능선-설악동의 긴 코스를 나흘간 뛰었고, 1971년 봄에는 졸업여행 차 설악동-희운각산장-대청봉 코스로 대청봉을 오르내렸으며, 1976년 여름에는 집사람과 함께 용대리-봉정암-대청봉-봉정암-오세암-마등령-설악동의 코스를 이틀에 걸쳐 밟았습니다. 언제 누구와 어떤 코스로 산행을 하느냐에 따라 그 때마다 설악이 달리 보이는 것은 설악산이 내보여주는 그 모습의 다양함때문으로  이 다양함은  국내의 어느 산도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제 오른 한계령-마등령의 설악도 그러했습니다. 설악의 가을 나들이는 이번이 처음이이어서  정상부터 채색해 내려오는 붉은 단풍은 지금껏 보지못한 새로움이었고   이 단풍의  가을 세레모니를 끝까지 지켜 봐줄 설악의 연봉들이 만든 실루엣 또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내보여 주어 좋았습니다.

 

어제 새벽 2시 4분 한계령에서 설악산 종주를 시작했습니다.
해발 900미터가 넘는 한계령의 새벽은 냉랭했습니다. 오후 3시까지는 설악동에 도착해야 한다며 공룡능선을 타실 분은 오색에서 시작하라는 덕유산악회  가이드분의 친절한 안내를 뿌리치고 거북이 산행을 하는 제가 한계령에서 시작하여 공룡능선을 타고자 하는 것은 이 코스가 백두대간의 능선 길이기 때문입니다. 매표소까지 급경사의 계단 길을 서둘러 오르자 현기증이 느껴졌습니다.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헤드랜턴으로 길을 밝히며 밤을 뚫어 서북주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3시25분 해발 1,200미터대의 출발 2키로 지점에서 첫 쉼을 가졌습니다.
칠흑 같은 밤에도 나무에 걸린 명찰은 쉽게 눈에 띄었습니다. 분비나무, 물푸레나무, 함박꽃나무와 옷나무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 명찰로 설악을 이루는 주 수목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마지막 약수터가 있는 이곳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 분들에 새벽잠을 설치게 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식수를 챙겨가라는 그들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습니다.

 

3시 41분 서북주능에 올랐습니다.
이곳에서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청봉으로 내달렸습니다. 귀떼기청봉에서 대청봉까지의 서북주능을 그 일부나마 타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 낮에 이 길을 걸어 남설악의 참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것을  밤 시간에  걷느라 아쉽기도 했습니다. 잠시 깜박하여 출발지로 되돌아 왔다며 반가워하는 한 여인 분을 만나 함께 걸으며 산에 대한 예찬론을 나누었습니다.

 

4시 45분 한계령에서 4.1키로를 걸어 다다른 지점에서 짐을 풀고 목을 추겼습니다.
암릉길에서 쳐다본 하늘에는  별이 빛났습니다. 하늘을 가렸던 구름이 별들에 잠시 자리물림을 해주어 밤길을 나선 저희들은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여명의 시간에 동녘의 바다 쪽이 붉어 보이는 것은 해오름의 시작이려니 그새 온 천지를 지배한 밤이 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명의 다함때문으로 로고스가 이 자연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시57분 해발 1,604미터의 끝청에 올라섰습니다.
5분전에 라이트를 꺼 아침의 밝음을 맞이했습니다. 산자락을 가득 채운 운해가 바람을 타고  오르기 시작해 바로 능선을 가릴 기세여서 한 눈에 들어온 서북주능의 모습을 재빨리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이 아침의 밝음이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지난 긴 밤의 시간을 어둠이 지배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설악의 아침이 이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땀흘려 밤을 뚫고 올라서입니다. 그래서 케블카를 타고 산에 오른 분의 감동이 땀흘려 오른 분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6시55분 한계령에서 8.3키로를 걸어 설악산의 정상인 해발 1,708미터의 대청봉에 올랐습니다.

대청봉에서 내려다 본 설악의 연봉들이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켜와 28년만에 다시 찾은 저를 반갑게 맞이해준다고 생각하니  절로 고마움이 느껴졌습니다. 이 이른 아침에도 서둘러 설악에 오른 수많은 분들로 정상인 대청봉은 여전히 붐볐습니다. 정상주위의 평원에 자생하는 눈잣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제 눈을 끌었습니다. 시베리아와 같은 추운 지역에서 자란다는 눈잣나무는 하도 키가 작아 땅바닥을 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시인 김수영님의 "풀"의  끈질긴 생명을 그대로 닮았다 해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기에는 가지가 옆으로 퍼져 쉽지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상의 표지석은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어하는 분들이 선점하여 별 수없이 조금 내려와 대청봉을 알려주는 표지목에 배낭을 놓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바람이 몰고 온 구름이 시야를 가리기 시작해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8시20분 해발 1,050미터의 희운각에 내려섰습니다.
소청에서 시작된 내리막길을 1.3키로 걸어 내려오는데 47분이 걸렸습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은 오르막길만큼 시간이 걸리기에 8시까지 휘운각에 닿겠다는 기대는 무산되었지만 그렇다고 산악회의 안내대로 공룡능선을 포기할 뜻이 전혀 없었기에 오후 3시까지 설악동에 도착하지 못하면  저는 속초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하겠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떠나라고 미리 버스에서 산악회의 가이드분에 일러두었습니다. 소청에서 약 550미터가량 고도를 낮추어 도착한 희운각에서 떡 몇 조각을 들어  피로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수로 냉각시킨 맥주 1캔으로 원기를 되찾아 8시 40분에 공룡능선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9시 10분 희운각에서 1.1키로를 걸어 올라 신선봉에 다다랐습니다.
무너미고개에서 시작된 오르막길이 공룡능선의 난이도를 예고해주는 듯 싶었습니다. 눈앞에 전개된 용아장성릉과 공룡능선사이의 깊고 깊은 가야동계곡을 만든  암벽들이 직립해 도열하고 있어 웅장함 속에서 질서의 아름다움을 읽었습니다. 비록 형상은 여러 모습이지만 있어야 할 곳에 자리잡아 양 능선과 조화를 이룬 암벽들이 차렷 자세로 저희들을 반겼기에 고마움에 답하고자 그 모습들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머지않아 오를 금강산의 암봉들에 바칠 찬사를 아껴두기 위해  설악의 기기묘묘한 암벽들을 보고도 이 정도에서 감탄사를 접어두자니 아쉬웠습니다.

 

지난 2월  대학산악부의 선후배들과 함께 동계훈련차 설악에 들어와 공룡능선을 오르내린 승진이가 생각났습니다. 제게 아버님이라 부르며  따라준 녀석은  2년전 키나바루산을 가이드 해준  유수대학의 산악부출신의 재원으로   그 후 한북정맥의 몇 봉우리를 함께 올랐습니다.  지난 5월 미국으로 건너간 녀석이 몇일 전 9월30일에 결혼을 한다는 메일을 보내왔는데 딸자식으로 여겨온 녀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축하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11시4분 1275봉 바로 밑의 안부에서 숨을 골랐습니다.
공룡능선상 최고봉인 1275봉은 거대한 바위덩어리인데 도봉의 선인과 북한의 인수봉을 모두 이어 합쳐도 이에 못 미칠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이제껏 제가 본 것 중 가장 규모가 큰 암봉입니다.. 이 암봉을 트레파스해서 십 여분간 진땀을 흘리며 비탈길을 올라 안부에 다다랐습니다. 이곳에서 떡을 꺼내 먹으며 아직도 기운이 남아 1275봉에 기어오르고 있는 젊은이들을 지켜봤습니다.

 

12시48분 공룡능선 마지막봉인 나한봉에서 또다시 짐을 풀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건네준 레몬조각이 그리도 감미로운 것은 젊은이의 마음씀이 고마워서입니다. 나한봉에 다다르기 전 겨우 한사람만 오르내릴 수 있는 길에서 먼저 가고자 남의 길을 가로채는 나이든 이들의 염치없는 짓거리를 보았기에 말입니다. 마등령까지 0.5키로가 남아 있다는 표지판의 안내가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13시12분 너덜지대를 조심스럽게 통과하여 얼마후 해발 1,240미터의 마등령에 도착했습니다.

희운각을 출발한지 4시간 32분만에 마등령에 다다라  5.1키로의 공룡능선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마등령에서 쉬지 않고 3.7키로 남은 비선대로 바로 하산했습니다. 황철봉을 거쳐 미시령까지 뛰어야 설악산을 종주했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인데 체력도 달리고 시간도 없어 아쉽지만 이번 산행에서는 공룡능선을 무사히 마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14시9분 비선대를 2.5키로 남겨 놓은 지점에서 덕유산악회의 가이드분에 제 위치를 알려주고 먼저 떠나라고 했는데 기다릴 터이니 서둘러 하산하라는 답을 해와 고마웠습니다.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두발에 모아 뛰었습니다만 이미 12시간을 걸어  힘이 많이 빠졌기에  생각만큼 속도가 붙지 않았습니다. 계곡을 채웠던 구름이 때때로 자리를 비켜주어  천불동의 비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서둘러 하산하느라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15시40분 비선대에 다다라 산악회에 전화를 걸어  먼저 떠나라고 재차 당부했습니다.
이제 마음의 부담이 없어지자 다시 생기가 돋아 비선대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 안에 들어왔습니다. 마등령에서 정신없이 내려오느라 천불동의 비경을 충분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부산에서 오셨다는 어느 한 분은 천불동의 비경을 보고자 매년 한번씩 설악산을 찾는다며 때때로 구름이 천불동을 가리는 것을 안타까와 했습니다.

 

비선대에서 1키로가량 걸어와 물가로  내려섰습니다.
오랜만에 탁족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저와 같은 산꾼 들에는 두 다리가, 그리고 두 발이 그리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대간을, 정맥을 뛰노라면 산행 후에도  발을 닦을 수 없어 정말 두 발에 미안한 노릇이기에 이번처럼 계곡으로 내려설 때라도 빼놓지 않고  발을 닦아야 그 간의 미안함을 떨굴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16시 45분 설악동의 노루목에 세워진 먼저간 산악인을 기리는 묘비를 들러 보았습니다.

그들의 열정적인 산사랑이 씨가 되어 오늘의  산악문화를 일구어 냈다는 제 생각입니다. 양적으로는 산악운동의 대중화가 거의 이루어 졌다고  생각되기에 질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살아있는 산사람들이 뒤이을 일입니다.

 

건각의 산꾼들이  12시간에 마친다는 길을 14시간 반에 끝내고서도 기쁨이 충만한 것은 별러왔던 공룡능선을 무사히 마쳤다는 자부심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설악산의 종주를 마치고 나서 백두대간을 저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아름다운 이 강산에서 태어나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언제인가 다시 돌아갈 제가 이 산하에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존경은 바로 이 산하를 찾아가 이 산하의 고마움을 직접 가슴으로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년에  백두대간을 종주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자 합니다.

 

이번 종주로 설악의 속살들을 샅샅이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8부능선에 머무르고 있는 단풍도 절정에 이르기까지는 한 열흘 걸릴 것 같아 아직은 시작단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지리나 덕유보다 바위가 승하다보니 산행 중 야생화도 그리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땀흘려

공룡능선을 오르내리면서 가야동 계곡의 숨겨진 비경을 카메라에 담고나자 삶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흥분되었습니다.

 

저녁 6시 속초에서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시원해 보였고 황금색의 벼들이 가득 찬 논뜰에서 가을이 익어감을 보았습니다.

설악으로 산나들이를 다녀와  되찾은 에너지로 더욱 더 열심히 일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