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緣), 그 끝은 어디인가

 

*일 시 : 2006.5.12 - 5.13

*산 행 : 거림-세석산장(1박)-촛대봉-세석산장-영신봉-덕평봉-벽소령산장-음정

       

<들머리>

산행 들머리인 거림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6시, 아직 해는 산마루 위에 걸려있지만 예정보다 2시간이나 지체되었으니 어차피 야간산행이 불가피하다. 부산에서 일을 마무리하자마자 숨 가쁘게 달려왔건만 진해, 마산, 진주를 거치다보니 예상외로 길에 낭비한 시간이 많다. 야간산행금지로 저지를 당하면 입장이 난감할 텐데 다행히 매표소엔 아무도 없다.


거림골을 따라 지리산을 오른다. 계곡에서 울려오는 웅장한 물소리가 숲을 헤치고 귓가를 맴돈다. 바람한점 없는 고요한 날씨, 하늘엔 검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언제라도 비를 뿌릴 듯 무겁다. 어젯밤, TV에서 본 기상 캐스터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되살아난다. “오후부터 비가 시작되어 내일아침까지 이어질 예상이오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밤비>

7시를 넘기면서 소리 없는 어둠이 스멀스멀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쯤에서 저녁밥을 해결하고 가는 게 현명한 생각이다. 바위위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마산터미널에서 사온 김밥을 풀어 입에 문다. “푸드덕” 산새 한 마리가 하룻밤 잠자리를 찾아 덤불 사이로 낮게 날아든다. 녀석도 이제 하루를 접고 내일을 위해 아늑한 휴식처가 필요한가보다.


어렴풋이 보이던 등산로가 희미해질 무렵, “후드득, 후드득” 기어이 참았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의를 입기도 번거로워 배낭 사이드포켓에 넣어두었던 헤드랜턴만 꺼내 불을 밝힌다. 그리고 예정보다 늦은 시간을 만회할 속셈으로 산행속도에 채찍을 가한다. “헉, 헉” 입으론 뜨거운 입김을 토하고 가슴속엔 역동하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쿵쿵 울린다.


어둠이 짙다. 헤드랜턴 불빛을 받는 좁은 등산로 외엔 온통 시커먼 암흑의 세계다. 오늘따라 바람도 없다. 들리는 것이라곤 멀어져가는 계곡의 물소리와 내 등산화 발자국뿐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에 소매 깃이 젖고 모자의 차양으론 이슬 같은 물방울이 맺힌다.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꺼먼 덩어리, 나무도 바위도 풀잎도 형체가 있는 건 모두 짙은 어둠에 몸을 숨겼다. 빗방울 소리까지도 삼켜버릴 것 같은 어둠 속, 과연 그 속엔 또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가 더 깊고 무한하다고 하지 않던가?


지리산, 그 넓은 품안만큼이나 숱한 상처의 아픔을 안고 있는 산, 이데올로기의 이념투쟁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지리산에 마지막 한을 묻어야만 했던가. 골짜기마다 말 못할 사연을 묻고, 능선마다 붉은 선혈을 토했을 귀한 생명들, 그리고 원한들…….  아직도 지리를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지는 않을는지……. 이젠 묵은 인연의 끈일랑 훌훌 벗어버리고 새로운 연(緣)을 찾아 저 피안의 세계로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보시구려.

 

오를수록

가슴 저린 산

서럽게 서럽게

눈물나는 산  

쫓기던 이 좇던 이

영문 없이 끌려간

핏덩이까지

아물어간 상혼에도

고통은 남아

유월 짙푸른

한을 삭이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하나 됨을 바라

초로에 반백이 다 되도록

골마다 영마다

바람으로 흐느끼는

지리산은 서러운 산

 

(권경업의 지리산)


 

<세석산장>

계속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밤길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한다.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힘이 부칠 때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고도계의 숫자는 천을 넘은지 한참 되었건만 산장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세석교를 건너 남부능선에 올라선 다음에야 산장이 머지않음을 안다.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에 세석산장의 밝은 불빛은 마치 고대 유럽의 성곽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반가웠다. 얼마만인가. 눈에 익은 산장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밖으로 나오던 한 명의 산꾼과 마주친다. “아니, 지금 올라오시는 거예요?” “네, 출발이 좀 늦었습니다.” “허허, 비 오는데 수고 많으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산을 다니는 사람들은 안다. 머지않아 동이 틀 새벽길을 걷는 것 보다 점점 깊어가는 밤길을 걷는 게 얼마나 더 고독한지를…….


<촛대봉>

주말이면 늘 만원을 이루는 복잡한 산장도 평일엔 여유로움이 있다. 덕분에 넓게 자리를 잡고 느긋한 밤을 보낸 후 아침을 맞는다. 간밤에 추적이던 비는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붉은 햇살을 맞이하고 있다. 오후나 되어야 날씨가 개일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이렇게 찬란한 아침을 산정(山頂)에서 맞이하는 건 특별한 행운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배낭을 꾸리고 간단한 행동식과 사과 한 개로 아침밥을 대신한다. 6시 반, 등산화 끈을 조이고 산장을 나선다. 싸늘한 아침공기가 목깃을 파고들고 금세 손끝이 시려온다. 계절은 벌써 5월의 중순에 와 있지만 여긴 아직도 겨울의 끝자락이 남아있다. 촛대봉을 천천히 오른다. 산 너머로 엷은 햇살이 퍼지고 능선엔 이제야 붉은 진달래가 한창이다.


사방으로 거침없는 조망을 자랑하는 1,703m의 촛대봉 정상, 바위에 오르자 제법 바람이 차다. 동으론 천왕봉의 당당한 모습이, 서쪽으론 반야봉의 은근한 미소가, 남으론 남부능선의 긴 허리가 지척으로 다가온다. 비 개인 아침, 티끌 한 점 없는 하늘은 파란색 물감이 번져있고 대성골 아래엔 하얀 운무가 짙게 깔렸다. 가슴깊이 긴 호흡을 한다. 상큼한 공기의 분자들이 온몸으로 파고든다. 아, 그지없이 행복한 순간이다.


 

여기였구나

 

구름 가던 곳

바람 가던 곳

 

분홍 꽃바람 불어오던 곳

초록 솔향기 번져오던 곳

 

어디론가

새들 날아가던 곳

어디선가

새들 날아오던 곳

 

금빛 꿈속에서 그려보던 곳

세상사 아스라이 내려다보는 곳

 

아하

여기였구나

 

(이수정의 지리산에서)


 
 

(세석평전과 운해)


 

(천왕봉과 삼신봉)

 

<세석평전>

발길을 돌려 다시 세석산장을 바라보며 촛대봉을 내려선다. 완만한 내리막 길 양 옆으로 넓게 펼쳐진 평전, 잔돌로 이루어진 1,670미터나 되는 고원의 평평한 땅이라서 細石平田이란 이름이 붙었다. 갖가지 희귀식물이 자생하는 습지는 야생동물의 갈증을 달래고 아름다운 철쭉은 지리10경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하다. 아직은 이른 탓으로 철쭉 대신 털개나리의 분홍빛 꽃잎이 무더기로 피어있다. 세석의 철쭉엔 가슴 아픈 전설이 있다.


아득한 옛날 대성동 계곡에 호야(乎也)와 그의 부인 연진(蓮眞)이 살고 있었다. 맛좋은 산채와 과일을 따서 먹으며 행복하게 살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인 호야가 산과(山果)를 따기 위하여 산골 깊이 들어가고 없는 사이에 근처에 살고 있던 검정 곰이 찾아와서 연진을 위로하며 하는 말이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세석평원에는 소원대로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는 것을 자랑삼아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연진은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남편과 상의할 겨를도 없이 혼자서 단숨에 음양수 샘터로 달려가서 기적의 샘물을 실컷 마셨다. 그런데 평소에 곰과 사이가 좋지 못한 호랑이가 곰과 연진 여인이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엿듣고는 이것을 그대로 지리산 산신령에게 고해바치니 산신이 대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 속에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百獸)의 왕이 되었고 또 음양수의 샘물을 훔쳐 먹은 연진 여인에게도 무거운 벌을 주어 잔돌평전의 돌밭에서 평생토록 혼자서 외로이 철쭉꽃을 가꾸게 되었다.


그날부터 연진 여인은 뜻하지 않았던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며, 세석평원에서 날이면 날마다 손발이 닳도록 꽃밭을 가꾸니 철쭉꽃나무는 무럭무럭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러나 연진여인은 닳아 터진 다섯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꽃밭에 뿌리며 애처롭게 언제까지나 꽃밭을 가꾸어야만 했다. 그래서 세석의 철쭉꽃은 절세가인 연진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아 청초하게 아름답고 또 연진 여인의 슬픈 넋이 꽃잎마다 서려있어 애련하게 해마다 피고 진다는 것이다.


 

(남부능선과 운해)


 <주능선>

하룻밤 노곤한 몸을 편히 쉬게 해준 산장을 뒤로하고 영신봉을 오른다. 어젯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오버페이스를 한 탓으로 발걸음이 무겁다. 오늘은 부지런히 걸을 이유가 없다. 벽소령산장에서 점심을 먹고 음정으로 하산하기엔 시간이 남는다. 가장 느린 걸음으로 살랑살랑 산길을 걷는다. 해가 나면서 기온이 오르자 불어오는 바람도 훈풍으로 바뀌었다. 골짜기를 덮은 하얀 구름도 바라보고 연두색 봄옷을 입은 산마루도 둘러보며 오월의 찬란한 지리에 몸을 맡긴다.


길섶에 야생화가 피어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그 섬세한 꽃을 바라본다. 투명하리만큼 연한 꽃잎, 즙처럼 배여 있는 표현할 수 없는 색감, 자연의 신비함은 작은 것에서 더 오묘하다. 바람에 살랑이며 만개의 때를 기다리 듯 고개 숙인 얼레지, 긴 치마에 얼굴을 묻고 수줍어 미소 짓는  현호색, 생명의 봄은 은근한 유혹의 계절이다.



  

(얼레지)

 

선비샘을 지난다. 파이프에서 시원스럽게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조롱박으로 물을 받아 목을 축인다. 차고 달콤한 뒷맛을 음미하며 빈 물통을 꺼내 가득하게 물을 채운다. 지리를 찾는 수많은 산객들의 갈증을 달래주는 샘물, 산마루에 이런 샘이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축복이다. 이제 덕평봉을 돌아서면 벽소령까진 편안한 길로 이어진다.


<벽소령>

주말을 이용해 산을 오른 사람들로 벽소령산장은 활기에 차 있다. 삼삼오오 식탁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거나 이야기꽃을 피운다. 몇 해 전, 설악산을 향해 먼 길을 떠나 지리의 주능선을  걷던 날, 짓궂은 날씨로 빗물 밥을 먹던 아련한 추억이 서려있는 곳, 바로 이곳이 아닌가.


그때의 감회가 다시 되살아난다. 그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 산장을 찾은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면 또 새로운 사람들이 빈자리를 메우듯 모두가 다 흐르고 있는 거야. 다만 빠르게 흐르는 것과 느리게 흐르는 것의 차이만 있을 뿐, 시공(時空)의 한계를 넘어 우리 모두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거야.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이듯, 거역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 그게 바로 연(緣)이 아닐까.


이제 나도 하산을 준비하자, 산을 내려가면서 다시 한 번 곰씹어보자. 산행 내내 귓전을 맴돌며 떠나지 않는 이명처럼 나를 붙잡고 있는 바람 같은 끈이 무엇인가를…….


 
(벽소령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