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산 산행기


ㅇ 일시 : 2004. 11. 14(일)
ㅇ 위치 : 전북 순창군
ㅇ 코스 : 주차장-신성봉-광덕산-시루봉-산성산-제2강천호수-구장군폭포-구름다리-주차장  (13km.  6시간)
ㅇ 찾아간 길 : 대진고속도로-88고속도로-순창 I.C - 강천산


  가을이 이제 남도 저 너머로 내려갔다. 간혹 집주변의 철모르는 은행나무에는 간신히 걸려 있기도 하였지만, 며칠 전 내린 비로 올 가을은 이제 영영 떠나가는 듯 하다. 아쉬움에 떠나는 뒷모습이라도 지켜보고자 강천산으로 향한다. 

  

   산악회 버스에 몸을 싣고 06시30분 대전을 출발하여 강천산에 도착하자 09시30분이다. 가는 길에 간간이 내리는 가랑비 때문에 우려를 하였는데, 막상 강천산에 도착하니 어서 올라가 보라는 듯 맑은 하늘로 산행길을 맞아 준다. 산악회 총무님의 간단한 등산 안내를 받으며, 넓고 편안한 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길과 함께 흐르는 냇가의 물이 깨끗하고 수량이 많다. 이런 건기에 이만한 수량을 간직한 시냇물이라면 한여름에는 얼마나 많은 물이 이 계곡을 아름답게 흘러내렸을까? 강천이란 산이름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입구에서부터 짐작이 가게 한다.
 
    며칠 전 이곳에도 비가 왔는지 길가의 단풍은 거의 다 떨어져서 흔적이 거의 없다. 가끔 이곳에도, 아무리 혼을 내도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말썽꾸러기처럼, 떠나는 가을의 말을 듣지 않는 나무들 몇 그루만이 그 작은 손을 흔들며 맞아 주고 있다. 저 말썽꾸러기마저 없었다면 이제 올 가을과는 영영 이별인데---말썽꾸러기 단풍나무가 반갑기만 하다.
 
   매표소를 지나 얼마나 올라갔을까? 산행을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하고 발걸음을 서두르려는데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폭포가 나타난다. 40여 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 15미터의 병풍폭포. 수량이 어마어마하다. 폭포 앞 몇 미터까지 포말이 흩날린다. 검은색 바위를 배경으로 아침햇살을 받으며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눈이 부시다. 얼른 사진 몇 장을 담으며 잠시 감상하고 있자니 마음이 금새 시원해짐을 느낀다.

  

   그런데 가만히 폭포수를 살펴보니 계곡을 흐르던 물이 단애를 만나 폭포를 이룬 것이 아니라, 절벽 바로 위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물이 폭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게 저 많은 물이 솟아나서 폭포수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저 오랜 세월을 끊이지 않고 흘러내릴 수 있는 것인지---저 물줄기처럼 뜨거웠던 우리들의 젊은 시절은 겨우 몇 십 년을 흐르고도 이렇게 앙상히 메말라 버렸는데---병풍폭포 물줄기 속으로 젊은 날의 편력들이 날아가 부서진다. 부끄럽다. 자연 앞에서 생각해보는 인간의 열정이라는 것이---
   

   계곡 물에 붉어진 얼굴을 식히며 가만가만 발길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병풍바위를 지나고 강천사 경내로 접어든다. 작지만 조용하고 아담한 강천사. 보통 산의 초입에 자리잡은 사찰들이 사람의 발길에 치이기 마련인데, 강천사는 여느 사찰보다도 사람의 손을 덜 탓다는 느낌을 받는다. 볼 것이 많지는 않지만 조용하고 고즈넉한 강천사의 아침 속에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서둘러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산악회 총무에게 종주를 할 생각이라고 말을 하니, 구름다리 건너 신성봉에 오르는 코스 대신 강천사 앞 다리를 건너 오르는 길을 일러준다. 일러준 길을 따라 약간 비탈진 등산로를 한 30여분 올라가자 신성봉에 도착한다. 신성봉 전망대에 올라서자 한눈에 들어오는 강천산 산줄기. 포근하고 아담하게 자리 잡은 강천사와 계곡을 가로지른 구름다리. 흡사 내장산의 산줄기를 닮은 아기자기한 U자형 산줄기들. 정겹고 다소곳한 전형적인 한국의 산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산이 너무 작고 낮다는 느낌이 든다. 이 정도 산인가? 군립공원 제1호인데---갑자기 종주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가보는 데까지 가보고 종주를 결정하자. 배낭을 둘러메고 능선길로 접어든다.

  

   한참 땀을 흘리며 첫 번째 봉우리인 광덕산에 올라서자 조망이 좋다. 멀리 반야봉이 구름 사이로 반가이 얼굴을 내밀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남도의 산줄기들이 제법 올망졸망 다가선다. 산성산 너머로는 추월산과 내장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라 괜찮은데--다시 종주에 대한 욕심이 난다. 서두르자---

  

   광덕산을 내려와 시루봉을 향해 가는데 능선을 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산을 다시 오르는 느낌이다. 그만큼 산과 산 사이의 골이 깊다. 그래서 그런지 능선 길에 서 있는 봉우리들은 산의 이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의 봉우리들은 거의 다 산의 호칭을 얻고 있다. 그 여러 산을 대표하여 강천산이라고 불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 산들을 오르고 내리려니 여느 산의 능선을 타는 것보다 힘이 든다.

  

  광덕산을 올랐다가 내려오고 또다른 봉우리를 올랐다가 내려오고, 또 다시 한모퉁이를 돌아가자 갑자기 인생이란 것이 생각난다. 산행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워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모퉁이를 돌아갈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에 대한 기대 때문일텐데--- 만일 사는 것이 항상 그 풍경이라면, 새로운 풍경에 대한 기대가 없어진다면 어떻게들 살아갈까? 어떤 힘이 있어 하루하루를 보낼까? 세상이 험하여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요즘. 잠시 그들의 가슴속이 어떠할지를 가늠해 본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세상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어떤 기대가 남아 있어---

  

   힘들게 시루봉에 오른다. 광덕산에서의 조망이 이어지고, 추월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그 전망 좋다는 추월산 보리암 절벽도 한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굽이굽이 휘어진 금성산성의 돌길. 보기가 좋다. 처음 산행을 나설 때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어디서들 올라왔는지 산성길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시루봉에서 산성산까지 이어지는 산성길을 따라 천천히 걷자니 산행길 내내 조망이 가능하여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뒤를 돌아보면 공룡의 등줄기 같은 산성의 줄기. 발 아래로는 보기 좋은 계곡과 바위들. 작은 산이 이름을 얻기까지는 나름대로의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산성길을 걸으며 느끼게 해준다.

  

  이제 점심을 먹는다. 산성 끝자락에 앉아 추월산과 내장산을 바라보며 이과두주를 한 잔 강천산에게 건넨다.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그 진한 쌰--함. 캬--강천산이 한번 부르르 몸을 떤다. 그러고 보면 정상주는 언제 어느 술을 마셔도 맛이 좋다. 산행에 지장을 줄만큼 마셔서는 안되겠지만 정상에 올라 한 두 잔씩 마시는 정상주는 산행의 맛을 끌어올리는데 최고가 아닌가 싶다. 연거푸 서너 잔을 마시고 가야할 종주길을 살펴보자 조망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계곡 밑에서는 구장군폭포 등 절벽들이 어서 오라고 조르고 있다. 그래 이쯤에서 그만 접자. 제 2 호수 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산성산 바로 밑에서는 하산길이 가팔라 힘들지만 조금 내려오자 걷기 좋은 산길이다. 시간도 넉넉하고, 눈길을 빼앗길 만한 절벽들도 많고 하여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제 2 호수, 구장군폭포를 지나 구름다리 위에서 잠시 동심을 즐기고 산행을 마친다.

  

   산이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하고, 볼거리가 다양하다. 구경하기도 편하다. 가족산행지로는 그만인 산 같다. 가을의 뒷자락이라도 보고 싶어 찾아간 강천산. 가을은 이곳보다도 한참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병풍폭포와 금성산성만이 그나마 서운함을 달래준다. 잘 있으라 강천산아. 병풍바위의 물줄기야 식지 말아라.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순창의 땅은 반가웠느니----


    (병풍폭포)


 

   (강천사)


 

(금성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