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0458  교룡산(蛟龍山 518m) - 전북 남원시. 대산면

 

산 행 일 : 2004년 11월 12일 금요일
산의날씨 : 흐리고 바람. 오후 맑음
산행횟수 : 초행
동 행 인 : 부부산행
산행시간 : 2시간 32분 (휴식 30분포함)

 

교룡산국민관광지 주차장 <0:05> 홍예문 <0:35> 능선갈림길 <0:05> 삼각점봉(밀덕봉) <0:11>
교룡산 <0:18> 팻말갈림길 <0:07> 산신단 <0:28> 선국사 <0:13> 주차장
 

 

                                                      산성교 앞의 단풍

 

교룡산성(둘레 3.1km)은 남원 지역에 남아 있는 20여 개 산성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
어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삼국시대 말기 백제가 축성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고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맞아 싸운 곳이라고 하며 임진왜란 때 승병장 처영이 홍예문을 다시 쌓는 등
크게 보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원시내 북서쪽 교룡산 허리를 휘도는 흰 선이 유독 눈에 띄는데 그것이 바로 산성이다.

 

여태 마음만 먹었던 산을 이제야 찾아 집을 나선다.

바람이 차갑다했더니 수초를 띄워놓은 돌확에 살얼음이 얼었다.
첫 얼음으로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19번 국도를 타고 가다 장수로 갈리는 길목에서 곧장 이어지는 국도 밑을 통과하여 남원 시내로
들어서면 만인의총과 교룡산국민관장지 표지가 길을 안내한다.
만인의총을 오른쪽으로 두고 조금 더 진행하니 관리사무소 맞은편에 널찍한 주차장이 있다.
교룡산 등산안내도가 없으니 일단 성안으로 들어서면 길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11 : 10 관리사무소도 비었고 차가운 바람을 벗삼아 포장길을 따라 오른다.

 

 

                                 성벽 밑의 선국사를 알리느 동자승 모습이 귀엽다.

 

5분쯤 오르면 귀엽게 그린 동자 승의 막대기에 매단 보따리에 '선국사 300m→'란 표지와 '김개남
동학농민군주둔지'라고 쓴 흰 말 목이 보인다.
*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지도자인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이
교룡산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끝내 여원치에서 관군에게 패했다.
 
11 : 15 교룡산성의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는 동문인 홍예문이다.

 

 

                                                          홍예문

 

원래 문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고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된 안내표지가 있다.
문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교룡산성을 지켰던 무관 별장들의 기적비(紀績碑)들이 여럿 있다.
교룡산장의 개들이 시끄럽게 짖고 앞의 작은 개울을 건너면 닭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폭 1m 쯤 되는 성벽 위를 걸어도 되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걸어도 된다.
처음에는 정비가 잘 되었으나 10여분을 오르면 성벽위로 잡목과 덤불이 자라 바닥으로 내려서 걸
어야 하며 작은 바위들이 박힌 길을 따르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남원 시내와 노고단에서 바
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 서부능선이 바라보인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11 : 30 연안 김씨 무덤으로 올라서니 큰 산불이 났었는지 고사한 소나무가 애처롭다.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아 넘기도 하고 허리 굽혀 지나기도 하는데 산이 낮아선 지 아니면 명당
터가 많아선 지 무덤들이 계속 나타나고 특이한 것은 홀로가 아닌 합장 묘가 많다는 것이다.

 

11 : 50 능선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용도를 모르는 폐 콘크리트 건물이 눈에 거슬린다.
11 : 55 바위를 타고 오르자 '남원 303. 1981재설' 삼각점이 박힌 밀덕봉으로 활공장이 있었는지
부직포가 정상을 덮고 있다.

 

 

                                                      밀덕봉의 삼각점

 

거센 바람을 피해가면서 둘러보는 조망은 실로 가관이다.
교룡산으로 인하여 북쪽은 막혔지만 만행산 너머로 팔공산을 위시한 호남정맥 마루금이 가늠되고
백두대간 길의 봉화산, 고남산, 노고단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문덕봉에서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동악산도 바라보인다.

 

 

                                                  문덕∼고리봉 능선과 동악산


 

                               남원 시가지와 오른쪽으로 부터 종석대, 노고단, 만복대


 

                                                만행산과 멀리 팔공산도 보이고
    
12 : 12 땀도 나질 않고 갈증도 없으나 과일로 입가심을 하고 출발.
잠시 전에 지난 갈림길에서 직진하자 처음으로 반가운 표지기가 보여 살펴보니 삼성 광주전자 신
입사원교육이라 쓰였는데 덕지덕지 매달아 둔 것이 눈에 거슬린다.

 

12 : 22 기능을 상실해버린 가시철망을 넘어 통신 탑이 있는 봉우리 왼쪽으로 돌아가니 산불감시
초소와 전북산사랑회서 세운 정상표지가 있으나 산 이름과 높이를 쩍은 글씨는 없어져버렸고 높
은 통신탑과 나무가 조망을 방해한다.

 

 

                                       교룡산 정상표지. 글씨가 훼손돼 있다.

 

12 : 28 더욱이 강한 바람이 등을 떼밀어 발길을 돌린다.
'위험. 고압전기 접근금지' 팻말이 달린 철망을 왼쪽으로 끼고 낙엽이 수북히 쌓인 길을 내려간다.
12 : 38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는 길이 경사가 급해 부담스럽다.

 

12 : 46 대밭이 나오는가 싶더니 또 다른 갈림길이 있고 왼쪽, 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덕밀암지
가는 길'이란 팻말이 세워졌고 작은 바위에는 흰 페인트로 '산신단→'이라 써 놓았다.

 

 

                                                밀덕암지 가는 길 팻말
     
산행이 너무 싱거워 덕밀암지라는 곳을 둘러보기로 하고 돌계단을 따라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12 : 53 은적암터 팻말을 보고 20여m를 가면 산신단 유래비와 장승 형식의 용 두 마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적암 팻말을 보고 이전에 덕밀암지였다는 것을 알게되었으며 천도교 제1세 교조인 대신사(최제
우)가 관의 탄압을 피해 은거했으며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論學文) 등을 집필했다고 한다.

 

 

 

                                                   교룡산 산신단

 

또한 산신단(山神壇) 유래비를 살펴보니 '...국가안위와 개인의 소원성취를 빌었던 원초적 민간신
앙의 성지이다.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 때는 무운을 빌었고, 구한말 동학군의 대제단이었으며 가뭄
이 심할 때는 기우단으로 사용되었다'라고 한다.

 

13 : 01 산신단을 뒤로하고 갈림길에서 무덤 2기가 있는 오른쪽 거친 길로 들어서 5분을 가니 굵
은 바위들을 돌아가는 두 갈래길이 나오나 역시 오른쪽 비탈길로 들어서고 3분쯤 내려가면 왼쪽
으로 도는 길과 만나는 듯한 갈림길에 닿게된다.
대밭이 전개된다.
교룡산장이 지척인지 수탉 울음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대밭을 내려가며

 

13 : 15 상당히 긴 대밭길이 끝나고 왼쪽 가깝게 있는 산장이 아닌 선국사를 찾아 넓은 길을 따
라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교룡산에서 처음 보는 '선국사30m'라 적은 윗부분이 썩은 나무 이정표를 지나 관음전 앞에 있는
샘 물맛을 본 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큰북(둘레 269cm, 지름 79cm, 길이 102cm)
과 제27호인 교룡산성 승장동인(僧將銅印)을 보관하고 있다는 대웅전으로 다가간다.
대웅전은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에 창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순조 3년(1803)에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앞문은 물론 옆문도 닫혀있어 귀중한 것들은 볼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이정표


 

                                            선국사 대웅전과 배롱나무

 

13 : 31 선국사를 나서 5분을 걸어 홍예문을 나서고
13 : 42 관리사무소 앞 광장으로 돌아왔지만 산행이 생각보다 너무 싱겁다.
따스한 햇볕이 드는 잔디밭에 앉아 밥을 먹고, 내친김에 만인의총과 만복사지를 둘러보기로 하여
주차장을 나선다.

 

 

                                             잔디광장에 이런 시비가 여럿있다.

 

만인의총(萬人義塚) - 사적 제272호

 

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왜적과 항전하다가 전사한 군관민을 합장한 무덤. 전라북도 남원시(南原
市)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왜군은 임진왜란 때의 패배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8월 13일
왜군의 주력 군이 남원성을 포위하였고, 14·15일 이틀 동안 혈전이 전개되어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이 싸움에서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등 8명의 충신이 순절하였
고 2000명의 병사와 1만여 명의 주민이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뒤 이들을 모두 한 곳에 합장하고,
1612년에는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하였다.

]

 

                                            만인의총 안내판 옆에있는 표지석


 

                                               만인의총은 건물 윗쪽에 있다.


 

                                               만인의총 에서 바라본 교룡산  

 

만복사지(萬福寺址) - 사적 제349호

 

남원시내에서 순창으로 가는 왕정동 도로변에 있다.
고려 문종 재위 때(1046∼1083) 창건되었다고 하며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2
층법당과 5층 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근래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가운데에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식 배치
였으며 조선 중기까지 번창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때(1597)  불타 없어졌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석탑과 돌 유물 몇 개가 절터를 지키고 있어 일면이나마 웅장했던 옛 사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보물 제30호인 3층석탑, 31호인 불상좌대, 32호인 당간지주 43호인 석불입상이 있다.

 

 

 

                                                       보물 제30호 3층석탑

 


 

 

                                                        보물 제31호 석좌


     

 

                               보물 제43호 석불입상 - 보호전각안에 모셔졌다. 


 

                                                석인상인 듯 싶은 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