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암벽등반으로 시작된 등산 40년(1973년-2013년)

 

1. 등산의 시작

산 기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마냥 산이 좋았다.

 

어릴적부터 뒷산을 오르내렸고 지붕바위,탱크바위등 바위를 탔으니 이를 합치면 50년이 넘는...

 

1973년,

암벽등반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부산에서 꽤 유명한 암벽등반가에게 소개되어 암벽등반 지도를 받았다.

금정산, 천태산, 천성산, 수정산등지의 암장에서 암벽등반 훈련을 받았다.

1975년,

울산 H중공업 산악회 창립멤버로 들어가 1970년대 후반 산악회 리더(지금의 산행대장)로서 산행을 이끌었다.

1980년대 초,

집안 사정으로 암벽등반을 그만두고 워킹으로 산을 다녔으며, 1983년 퇴사후 솔로로 산행을 하고 있다.

 

 

2. 등산 복장과 장비

지금과 같은 등산복이 없던 1970년대 초, 우리는 그래도 면바지에 암벽등반용 크레타슈즈를 신었는데 반해

일반등산객들은 청바지나 면바지에 조끼를 주로 입었으며, 베레모와 같은 모자를 썼고, 신발은 운동화, 농구화, 군화 등을 신었다.

그리고 일반등산객들은 모자나 조끼에 관광지에서 구입한 뱃지를 훈장처럼 수십개씩 붙이고 다녔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날라리라고 불렀다. 우리는 클라이머라 하고...

등산장비는 형편 없었는데, 1974년 석유버너를 살 돈이 없어 석유버너를 만들려고 했으나 펌프를 만들 수가 없어 포기했다. 그래도 픽켈은 만들었다.

 

 

3.산행

1970년대의 산행은 거의 부산, 울산 근교의 산이었다. - 그 당시에는 백두대간이니 영남알프스니 하는 말은 없었다.

지금처럼 산악회 관광버스로 산 입구까지 가서 내려주고 반대편에서 태워 오는 산행은 없었다.

모든 산은 지도도 없거나 엉성한 지도를 들고 직접 찾아 가야 했으며, 도시를 벗어나면 온통 비포장의 덜컹거리는 도로였고, 운행하는 버스도 많지 않았다.

 

예를 들어, 상상이 안되겠지만 석남사에서 배내골로 넘어가는 도로가 없어 온통 풀로 뒤덮힌 소로를 걸어서 넘어야 했다. 석남사에서 천황산 얼음골, 백운산으로 가려해도 석남재(당시에는 밀양재라 불렀음)를 넘어 쇠점골(그 당시에는 이름도 없었음)로 밤새 걸어야만 했다. 따라서 울산쪽에서 천황산이나 운문산쪽으로의 당일 산행은 어려웠다. 간월산에 가려면 작천정입구에서 버스에서 내려 걷거나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아예 언양에서부터 걸었다. - 캄캄한 밤 인적도 없던 이 길...

부산에서 가야산 가는데도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로 4시간을 가야했다. - 덜컹덜컹 꼬불꼬불...

 

지리,설악,한라와 같은 곳으로의 장거리 산행은 교통이 불편해 지금과 같은 관광버스를 이용한 당일 산행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 산들을 가려면 적어도 2박 3일 이상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설악에 가려면 지금과 같은 열차 예매제도가 없어 통일호 밤 열차를 타고 뒤로 기울어지는 좌석 사이의 바닥 빈 공간에 드러누워 밤새도록 가야했다. - 통로로 사람이 지나가거나 홍익회 수레가 지나가면 뻗었던 다리를 오므리면서...

 

 지리산 북쪽 백무동, 뱀사골, 칠선계곡쪽으로 가려면 대구 가서 서부터미널 부근 여인숙에서 자고(일인당 500원) 아침 첫차로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인월에서 갈아 타고 들어가야했다. - 얼마나 덜컹거리는지...

 

덕유산을 가려면 부산서 밤기차를 타고 새벽에 영동역에 내려 역에서 노숙후  엄청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무주구천동으로 들어가야했다.- 덕유산 입구 좌우로 쫙 쳐진 철조망... 종주하기 위해 이 철조망을 넘어야 하는...

 

한라산을 가려면 공항에 다른 여행객보다 1시간 먼저 가야했고 석유버너는 미리 비워 놓아야 했다. - 공항에서 배낭을 전부 다 풀어 전수 검사를 하느라...

 

소백산을 가려면 밤기차를 타고 새벽에 내려 풍기역 앞 여인숙에서 눈 좀 붙이고(일인당 500원), 희방사역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해 연화-비로-국망봉을 거쳐 초암사로 내려와 순흥까지 걸어야했다. - 지금처럼 동계에 단양쪽에서 오르는 코스가 없어서...

그나마 소백산은 가기 쉬웠다.

 

70년대 초 당시에는 등산지도가 없어 겨우 이런 등산지도를 구입해 가지고 다녔다.

 - 등산 코스에서의 소요 시간도 등고선 표시도 없어 산행 소요 시간 잡기가 어려웠음-

등산지도 100선 - 1972년판

1978년 1월 말 1m가 넘는 폭설로 문간재-연칠성령 1시간 반 코스를 둘이서 럿셀하며 6시간 반에 걸쳐 올랐음

4시 반 해가 지기 시작해서 비박하려 했으나 실종신고 들어갈 것 같아 눈물을 머금고 후퇴함.

 

 

4. 암벽등반과 암벽등반장비

1970년대 초,중반의 암벽등반은 거벽등반이 사실 어려웠다. 특히 지방에서는...

기껏해야 원시적인 꼰자일과 캬라비너 몇개(처음에는 무거운 US스틸 캬라비너 나중에 보나티와 같은 듀랄루민 캬라비너), 나이프,앵글,봉봉 하켄 몇개와 래더(줄사다리),해머등을 가지고 거벽을 개척하고 오른다는 것은 무리였다. 개척하고 싶었던 많은 암장들이 있었으나 당시 가지고 있던 장비로서는 사실 어려웠다. 예를 들어 밀양 얼음골 백운산에 거대한 슬랩과 중앙벽이 있는데, 1972년 부산,대구의 등반가들이 슬랩은 개척했으나 중앙벽은 하지 못했다. 내가 이끄는 팀도 1976년 부터 몇 차례 슬랩을 하러 갔었지만 매번 중앙벽을 바라 보고 저길 언젠가 개척해야지 생각만 하고 현실로 돌아와 끝내 개척을 하지 못했다. - 이 중앙벽은 2008년 울산 한백산악회의 의해 루트 17개가 개척됨, 다른 등반팀들은 36년 동안 뭘 했지?... 아마 부분적으로 등반 되었으나  암장 전체 루트를 다 개척한 것이 한백이리라....

 

백운산 슬랩

백운산 중앙벽

 

 

1970년대 중반 이후 산악회 암벽등반에서 주로 톱을 섰고 암벽등반 지도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빈약한 장비로 뭘 지도했는지 우습다. 1980년 집안 일로 암벽등반을 손 놓은지 33년 지난 지금, 사진과 동영상에 나오는 암벽등반과 장비를 보면 정말 놀랍고 부럽다. 그 당시에는 전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장비들이다.

- 저런 장비가 있었더라면 백운산 중앙벽을 벌써 개척했을텐데...

 

작천정 슬랩 연습을 마치고 작천정 앞에선 대원들(1976년)- 중앙이 본인

위 모두 다 1977년 동계 칠선계곡 등반이나 1978년 동계 한라산 서북벽 등반때 본인과 함께 한 대원들임

작천정 슬랩 등반 연습중인 대원(1976년)

꼰 자일에 보울라인 매듭으로...

달음산 정상 중앙벽을 톱으로 오르고 있는 본인(1980년경으로 거의 암벽등반 손 놓을 시점임)

* 몇 번의 이사로 1박스 가득 담겨 있었던 사진을 박스채 다 잃어 버리고(95% 이상) 앨범에 남은 사진 중 일부임

 

* 빙벽등반은 초보적인 스텝커팅만 해봤다. 당시에는 빙벽등반장비를 부산, 울산에는 살 곳도 제대로 없었고 살 돈도 없었다.

1970년대 초 국내에 도입된 후론트 포인팅- 1973,4년에 암벽등반을 지도하시던 분으로 부터 12발 아이젠을 이용한 후론트 포인팅 기술에 대해 들었으나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알지도 못했다. 1976년 1월 토왕성빙폭 하단부가 동국대 산악회에 의해 초등되고 이듬해인 1977년 1월 크로니 산악회에 의해 토왕성빙폭 상하단이 초등되었을 때 사용한 방식이 후론트 포인팅이었다.

 

 

5. 동계등반

부산 울산에서 겨울에 산에 간다면 미쳤다고 했다. 이렇게 추운데 얼어 죽을려나며, 사실 그런 소리 많이 들었다.

겨울산에 가면 사람 구경하기 어려웠다. 영취,신불,가지산 동계에 가면 적막이다. 우리들 뿐이다.

 

눈이 오지 않는 이곳, 적설기 등반을 하고 싶어 찾아간 곳은 소백산으로, 1976년 1월 밤기차를 타고 풍기역에서 내려 자고 새벽에 희방사역을 거쳐 연화봉,비로봉,국망봉,초암사를 거쳐 순흥까지 걸어 풍기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지리, 한라,설악,덕유등지로 동계등반을 다녔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산들을 가려면 교통편이 너무 불편했다. 지금은 산악회 관광버스를 이용해서 무박이나 당일로 가서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버스가 기다리고 있어 너무나 편하다.

 

지리,한라,설악,덕유산으로의 장거리 산행은 대개 2박3일에서 4박 5일까지로 이루어졌는데 산장이나 대피소 시설이 없거나 있더라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서 난방은 커녕 바람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는 시멘트 바닥의 대피소(당시 산장이라 했음)는 등반 루트에 있지 않아 아예 포기하고 동계용 윔퍼텐트를 가지고 다녔다. - 얼마나 무거운지...

따라서 동계등반은 텐트, 동계장비, 옷, 며칠간의 식량을 다 지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배낭 무게가 상당했다.

지금은 난방이 잘 되는 대피소를 이용하니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1970년대 지리산 장터목 대피소

지금의 장터목 대피소에서 식수 가지러 내려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건물(지금 보일러실로 사용하고 있음)

 

1970년대 내설악 수렴동 대피소

 

 

1978 동계 한라산 서북벽 등반중 캠프 2

등반 리더(산행대장)로서 등반대의 운행을 맡았음 - 원정대장은 아님

뒤에 보이는 국기가 걸려 있는 텐트가 본인의 동계용 윔퍼텐트임(주문제작)

 

동계등반을 갈 수 없었던 주된 이유는 등산복보다 등산화였다. 당시 등산객들이 신고 다녔던 것은 운동화,농구화, 조금 더 나아가면 군화나 안전화였다. 이 신발을 신고 눈덮힌 겨울산을 오른다는 것은 바로 동상이다! 1975년 본인이 구입한 레드 페이스 동계 중등반화는 가격이 25000원 정도로 고졸 한 달 월급 4,5만원의 절반이 넘었고 부산 의대 등록금 8만원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누가 이 거금을 들여 이 비브람을 신고 추운 겨울산에 가겠는가? 무게도 2.5-2.7킬로그램으로 지금 고아텍스 중등산화의 3-4배가 된다. 그리고 울산에서는 이 비브람을 살 수가 없어 부산에 가서 발 칫수를 재어 서울로 보내면 제작해서 부산으로 보내고 다시 이를 찾아 와야 했다.

 

1975년 주문 제작해서 2000년까지 신었음 - 지금 보관중

처음 신으면 너무 무거워 발이 앞으로 잘 나가지 않음

겨울 산행 하기 전 방수 왁스를 바르고 불을 쬐어 방수를 시킴 - 오랜 세월동안 엄청 많이 발랐음

 

겨울 산행에서 지금은 필수인 아이젠은 그 당시에는 겨울 등반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수요가 없어 부산, 울산의 등산 장비점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1977년인가 주물로 부어 만든 8발 짜리 아이젠을 어렵게 구해 신었으나 조임끈이 부실해 얼마 안 가서 헐거워져 다시 매곤했다.

스틱은 당연히 없었고 픽켈도 산악회 통틀어 내가 가지고 있던 국산 다이어몬드제 뿐이어서 픽켈을 아예 하나 만들었다. 쇠를 깍고 물푸레 나무를 끼워 넣어서...

 

직접 만든 픽켈

쇠를 깍고 물푸레 나무를 잘라 끼우고 검은 테이프를 감아서 만들었음

오른쪽에 있는 것은 비싸게 구입한 다이아몬드제 픽켈

 

 

6. 가족산행

아들 둘, 태어나서 돌 되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산에 데리고 다녔다. 나와 아내가 업고 안고 걸리고 하면서...

초등학교때 부터는 동계등반에 데리고 다녔는데 지금과 같은 고아텍스 등산화가 없어 겨울 운동화에 비브람 방수에 사용하던 왁스를 발라 신겼다. 2000년대 들어 아이들이 어느정도 크고 아이들 발에 맞는 고어텍스가 등장하면서 부터는 고어텍스 등산화를 신고 동계등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설악,지리,한라,덕유,소백등 주요 산들로 동계 가족등반을 갔다 왔다.

 

2000년 1월 말 동계 설악산 등반(2박 3일) - 양폭에서 희운각을 향해 오르고 있는 큰 아들과 아내, 작은 아들은 나보다 먼저 올라갔음.

 

7. 해외 원정 등반

1970년대 암,빙벽 등반가들의 꿈은 히말라야였다.

7,8000m급 눈덮힌 고봉을 오르는 것이 꿈이었지만, 당시는 해외여행 금지여서 아무나 해외를 나갈 수가 없었고 문화,예술,체육계의 국가대표급만 국가의 승인을 받아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7,80년대 해외원정등반을 나갈 돈도 없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해외여행 제한 해제 연령이 50세로 다시 40세로 낮춰지고 후에 나이 제한이 풀리면서 누구나 해외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은 개인이든 산악회든 히말라야, 유럽 알프스, 일본,중국등 어디든지 해외원정 등반을 할 수 있다.

 

8. 카메라와 사진

70년대 중반 이후 산악회의 리더(지금의 산행대장)로서 산행을 이끌면서 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카메라를 가진 사람이 드물어서 산행을 갈 때면 단골 카메라점에서 조그마한 사진기를 빌려 사진을 찍고 나중에 현상, 인화를 맡겼다. 며칠 후 사진을 인화하여 사진을 신청한 산악회원들에게 사진값을 받고 나눠주곤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엄청나게 많이 찍을 수 있는 메모리가 들어 있는 디카 시대가 아니라 24장(+3), 36장(+3)짜리 필름을 사서 찍는 필카 시대라 필름 몇 통 가지고 가도 몇 장 찍지 못했다. 마음놓고 찍을 수 없어서...

 

7,80년대는 카메라 수입이 제대로 되지 않아 거의 몰래 들어온 것으로, 본인도 1982년 영국인에게 Nikon FG를 영국에서 사서 가지고 들어 오도록 부탁해서 받아 사용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사용 가능하다. - 거금을 들여...

Nikon FG -1982년 구입

 

사진 촬영을 근 38년 해 온 결론 - 좋은 사진 만들려면 카메라가 좋아야 한다.

 

1970년대의 등산은 장비, 교통, 등산루트,카메라 모든 게 다 부족할 때였다. 물론 돈도 없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2013년, 화려한 등산복과 등산장비, 산 구석구석 태워주고 태워오는 교통편, 잘 정비된 등산로, 무한정 찍을 수 있는 멋진 DSLR과 같은 디카들, 이 모두 다 우리의 경제력이 좋아진 덕분이다. - 한마디로 돈...

 

-  겨울이면 사람 그림자도 찾기 힘들던 많은 산들이 그 추운 겨울에도 이젠 줄 서서 올라 가야 하다니...

    지나온 40년의 등산 과정을 회고해 보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

 

   40년 회고, 너무나 쓰고 싶은 것이 많으나 그냥 요약해서 올립니다.

 

 

 

2부

나의 마음의 산 - 천성산

2013.6.5(수)

나홀로

 

1973년 - 1983년 까지 암벽등반 연습하러 워킹하러 무수히도 찾았던 천성산

뒤쪽 내원사쪽은 사실 버스에서 내려 한참 걸어 들어가야하는 불편함으로 조금 덜 찾았다.

 

1970년대 초, 법수원계곡은 천성산 깊숙한 곳에 위치해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아서

여름이면 텐트치고 야영하며 발가벗고 계곡물에서 놀곤했다.

백동에서 바라 본 천성산

 

혈수룡 폭포(지도책에는 혈수 폭포라 나옴)

하단부는 철조망으로 출입금지 시켜 상단부만 촬영

좁은 바위 틈새로 떨어지는 폭포수 아래에서 놀기가 참 좋았는데...

 

법수원 위 계곡 폭포

'월간 산' 지도에서는 이 폭포를 혈수 폭포라 해 놓았음

 

하늘길릿지라는 암릉코스(오른쪽) - 언제 개척했나?  울산 모 산악회에서 1989년 개척, 2001년 보수

미타암 석굴

미타암에서 바라 본 서창 - 너무나 변했다.

1970년대에는 온통 논,밭이었는데...

 1973년부터 암벽등반 연습을 하던 곳 - 미타암을 지나 오르다 보면 보이는 바위군

그때는 하늘릿지는 생각도 안 해봤다

릿지등반인 하늘길과는 달리 이곳은 주로 벽등반이다.

 

천성산 제 2 봉 - 철쭉 군락지에서 바라 봄

1970년대는 천성산 제 2 봉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천성산은 그냥 미타암 뒤에 있는 산이고, 원효산은 저쪽 양산쪽으로 치우쳐 있는 산이었다.

 

 

 

오늘은 천성산 제 2 봉을 오르지 않는다.

법수원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법수원계곡을 따라 내려 간다.

 

 

법수원계곡 - 작지만 정말 멋진 계곡이다

 

이 계곡은 1978년 11월  H중공업에 있는 10개 산악회 합동등반을 가려했던 곳이다.

H중공업 산악회 리더(산행대장)로 있던 본인이 합동등반 리더로 임명되어

산행지로 천성산을 정하고 법수원계곡이 너무 좋아 혼자서 사전 답사를 갔었는데,

 여름이면 야영하며 놀던 법수원 위 계곡까지는 코스가 있으나 깊이 들어갈수록 전혀 길이 없어 계곡을 그냥 치고 올랐음.

돌아와서 이 코스로는 몇백명의 합동등반객을 이끌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포기하고 다른 코스를 택함.

 

 

야영하며 암벽등반 연습하던 바위(12-15m정도)

 

 

 

야영하며 발가벗고 놀던 곳 - 여름이면 정말 아무도 안 왔다.

1973년 부터 정말 개척하고 싶었던 바위군 - 그런데 아직 개척이 안되었는지 이끼가 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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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과 법수원 - 이 구도가 가장 멋있다.

 

내 마음의 산, 천성산!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나와 참 인연이 깊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