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하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작년에 한국산하에 글을 올려놓았다가 익명으로 함부로 막말을 하는 분들이 많아서 섭섭하고 노여워하며 떠났던 일만 성철용입니다.  그때는 아무 죄 없이 고희(古稀) 가까운 老티즌에게 네티즌이 익명으로 퍼붓는 욕설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서러웠습니다.  
오늘 이곳에 와 보니 리플을 실명제로 달기로 되어 있어 기쁜 마음으로 용기를 내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오게 된 것은 청파 윤도균 원장님 같은 분의 간곡한 권유도 있었지만 제 글을 열심히 읽어 주신 분들을 잊지 못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 동안 쓴 산행기로 소원했던 이 사람의 정을 우리 한국산하 여러분께 드리고자 합니다.
일언이폐지하고 미안했다는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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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인왕산 산행기
*. 2.인왕산 산행기( 일만 따라 디카 따라)

1. 인왕산 산행기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나라나 국도(國都)나 각 고을에 있는 가장 큰 산을 진산(鎭山)이라 하여 그 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모시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
서울의 진산(鎭山)은 크게는 북한산(北漢山: 삼각산)이고, 작게는 그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嶽山) 곧 북악산(北嶽山)이다. 서울의 산에는 밖으로 크게 네 개의 산과 안으로 네 개의 산이 있다. 외사산(外四山)으로는 동서남북에 595.7m 용마산, 124.8m   덕양산, 632m 관악산, 836.5m 북한산이 있고,  내사산(內四山)으로는 111m 낙산(洛山), 338m 인왕산(仁王山), 262m 남산(木覓山), 342m 북악산(白嶽山)이 있다.
금년에는 그 여덟 개의 서울 산의 산행기를 쓰기를 벼르다가 마침내 인왕산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석가탄신일에 불자(佛子)인 아내에게 절과 산을 겸하기 위하여 우리는 3호선 독립문 역에서 내려 인왕산을 향하고 있다.
아까사아가 하얗게 지고 있고 넝쿨장미가 담에서 빨갛게 피어나는 초여름이었다.
인왕산은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 낙산(洛山)과 함께 우백호에 해당하는 화강암이 노출되어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수석을 펼쳐놓은 듯한 암산이다. 산은 높지 않지만 북한산에서 뻗어 내린 용(龍)의 산세가 네 산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다.
인왕산(仁王山)이란 지명은 조선조 태조 때에는 서봉(西峰) 또는 서산(西山)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사찰이 있다하여 인왕산(仁王山)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말이 광해군일기에 전하여 온다.
경주 석굴암에 가면 그 입구에 눈을 부릅뜬 불교의 수호신이라는 한 쌍의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보게 된다. 금강(金剛)이란 말은 불교 용어로는 여래(如來)의 지덕(智德)이 견고하여 일체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다는 말이지만, 금강석(diamond)처럼 몹시 단단하여 어떠한 물건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금강이란 말이 인왕(仁王)인 것을 보면 인왕산이란 도성(都城)을 지켜 주는 수호 산이라는 유추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인왕산의 한자는 仁王山(인왕산)으로 써야지 仁旺山(인왕산)으로 써서는 안 된다. 조선조 후기의 화가인 정선(鄭敾)이나, 강희언(姜希彦)의 산수화에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仁王山(인왕산)이라 쓰여 있는 것을 악랄한 일본인들이 일본(日本)의 日(일)이 조선 王(왕)을 누른다는 뜻으로 ‘王’(왕) 자를 ‘旺’왕) 자로 고쳤다는 말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당시 왜놈들은 우리 조선민족을 가축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길들이고자, 우리 국토를 영원한 일본 국토로 만들고자 하는 야욕으로 우리나라 곳곳을 자기들 뜻대로 지명을 뜯어고쳤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왕산 일주문에는 아직도 '仁旺山仁王寺'라 쓰여 있는가.
그저께 나는 인왕산은 일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에는 자연보호 차원에서 입산금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혼자서 이곳에 왔다가 산속에 쓰러져 잠들어 있던 홈리스(노숙자)와 함께 도시락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술판을 벌리다가 그냥 돌아왔었다.
58세보다 열 살이나 더 늙어 보이는 이 불쌍한 사람은 술집에 나가는 아내와 별거 하고 있는데 이 산에서 맴도는 홈리스와 어울려 3일을 소주 35병 이상을 퍼마시며 노숙했다 한다. 그는 잠자리가 불편할 뿐이지 먹는 것은 이곳보다 더 풍성히 먹을 곳이 없다 하였다.
한국에는 산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생긴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사상 때문에 사람들은 유난히 바위가 많은 인왕산 바위 곳곳에다가 치성을 드리고, 그 술과 안주가 되는 과일과 돼지 머리를 그대로 두고 간다 한다. 그래서 밤이 오면 이 일대의 노숙자가 모여 들고 그러면 이곳의 정자에서는 찬란한 밤의 향연이 벌어지게 된다고-. 그런 폭음은 그대로 추위를 모르고 정자에서 잠들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산길에서 비박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다니던 비닐을 한사코 사양하는 그에게 주고 왔다. 고마움을 지니고 살겠다는 그의 고운 덕담을 뒤로 하고.

신성한 절에 웬 무당의 요란한 굿 소리인가. 이상한 마음을 품고 찾아간 곳이 국사당(國師堂)이었다. ‘國師’(국사)란 ‘왕의 스승’이란 말인데- 하면서 처음에는 의아하였지만 마당의 표지의 안내 설명을 보니 여기에는 불상은 없고 비단에 채색한 그림으로 모신 21점의 화상(畵像) 중에 이태조와 그의 스승격인 무학대사가 있었다니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그 당시 漢陽(한강 漢, 북쪽 陽)에 도읍을 정하고 서울의 수호신사로서 남산 꼭대기에다가 목멱신사(木覓神祠)의 사당을 만들어 놓았더니 후대에 오면서 무속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1925년 일제가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이곳 인왕산 산록으로 옮겨 오자 남산이란 뜻의 '목멱(木覓)' 대신에 국사당(國師堂)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이곳 국사당은 오늘날 민속 신앙 보존과 연구에 메카의 역할을 하여 왔다.
마침 굿을 하고 있었는데 무당이 예비군복을 들고 치성 드리고 있는 모습은 군인 가서 죽은 자식의 천도(薦度)를 비는 모양이다. 무당의 얼굴이 깨끗한 것이 아마도 인간문화재인가 보다.

이 국사당을 더욱 유명하게 하여 준 것이 그 위에 있는 선바위다.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크고 작은 두개의 바위는 풍우 때문인가 좌골이 푹푹 파이고 움푹움푹 들어간 곳이 어찌 보면 사람이 서있는 듯한 모습이라 '서다 입(立)'자 선바위인지 알았더니 그 앞 표지 설명을 보니 ‘禪(선)바위’이다.
이곳이 이 태조와 무학대사가 국토 창업을 기도하던 자리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바위 모양이 무학대사가 장삼을 입고 서 있는 모습 같게도 보인다.
이 선바위를 다른 말로 빌 祈(기), 아들 子(자)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자식을 낳고 싶어 하는 많은 부녀자들이 선바위를 찾아와 빌면서 이 바위에다가 작은 돌을 문질러 돌이 붙으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생긴 말이다. 지금은 기도처로 정비가 되어 있지만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 붙임의 흔적이 보인다.

이 지역은 산비탈이라서 절은 다닥다닥 암자 같은 크기로 그 사이 골목 따라 찾아가야 했고, 무속과 연관 되어서 큰 시주 자가 찾아오지 않는 곳이어서인지 절들은 모두 규모와 함께 화려하지가 않았다.
이곳에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이른 아침녘인데 오늘 '부처님 오신 날 법요식(法要式)'은 10시부터라서 아내는 참배만을 하고 행사 준비를 위해 만든 관욕(灌浴)하시는 아기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며 성터를 따라 등산길에 올랐다.

인왕사를 다시 내려와 철조망에 난 문에 들어서서 성을 끼고 난 길을 가다 보니 계단 가운데에 흰 페인트칠을 한 층계길이 정상을 향하여 주-욱 올라가고 있다. 캄캄한 밤에 군인들에게 길 안내를 위해서 등산 처음에서 끝까지 층계에 칠한 흰 페인트였다.
1.21 사태로 알려진 김신조를 포함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김일성의 청와대 폭파 밀명을 받고 청와대 뒷산까지 왔던 일이, 인왕산을 1968년부터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만들게 하였고, 향토예비군의 편성의 계기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영삼 문민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국민에게 주는 첫선물로 25년만에 개방된 산이지만 국가 안보상 지금도 곳곳에 초소가 있고 위병이 있다. 그러나 총을 든 군복의 위병이 아니라 운동모자에 사복을 단정히 입고 오가는 사람에게 친절히 웃으면서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어서 이웃집 친절한 대학생들을 만나보는 것 같이 정겹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오르는 이 산성 길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낙산과 남산과 이 인왕산을 18km로 빙 둘러 타원형으로 연결하고 있는 이 태조 때인  1395년에 쌓은 ‘사적 제 10호’로 지정된 서울성곽의 일부이다. 이 성을 쌓는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이 태조 도성 쌓을 제 지금의 성 안으로만
흰눈이 펄펄 내려 울타릴 만들었네.
서울은
雪(설)의 울타리
그래 서울이라 이름 하네.


그래서 ‘설울’은 '불삽'이 '부삽', '솔나무'가 '소나무', '불나비'가 '부나비' 되듯이 두 단어로 된 복합어 사이 ‘ㄹ’이 탈락되는 현상에 따라 서울이 되었다 전설이 전한다. 이런 풀이를 민간어원설이라 한다.
인왕산의 멋은 무엇보다 암산이고 암산이기 때문에 수석 같은 신기한 바위들의 모습이 많았다.
수석이 자연의 산수미를 탐한 인간 소유의 것이라면, 여기 있는 바위들이 하는 몸짓은 수석과 큰 정원석을 넘어 자연 그대로의 물형석이요, 추상석이요, 움직일 수 없는 천연그대로의 회화적인 미의 세계다.
인왕산에 오면 선바위처럼 둥근 모자 모양의 바위를 모자 바위라 했고, 돼지가 코를 든 모습이라 하여 돼지바위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선바위와 함께 뚜렷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 바위가 산성 길에 있다. 바위 위에 두 눈깔 같기도 하고 두 손가락같이 하늘로 솟은 둥근 두 바위다. 초소 위병에게 물으니 달팽이바위라하고 또한 위병에게 물으니 두 손가락을 펴 보인다. 손가락바위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호랑이 굴이 있다는 곳에 있는 범바위는 등산객들이 거쳐 가는 커다란 바위로 정상을 향하 다 뒤돌아보면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영락없는 호랑이 모습이다.
인왕산 하면 지금도 떠오르는 것이 인왕산 호랑이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태종 5년에는 경복궁 내전(內殿)에, 연산군 11년에는 종묘까지 침입하는 등 민가의 피해가 많았고, 옛날에는 사람들이 무악재를 넘을 때, 호랑이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서야 함께 재를 넘었다는 것이다.

인왕산 정상은 인수봉처럼 하나의 커다란 바위로 그곳을 오르면 바로 정상이었다. 지금까지 시멘트 층계가 눈에 거슬리더니 인왕산 정상 가까이 바위를 깎아 만든 층계는 멋스럽기 그지없다. 이 층계를 만드느라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땀을 흘렸을까.
정상의 널찍한 공터 끝에 초소가 있고 그 한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있다. 삿갓바위였다.
인왕산의 가장 큰 멋은 우리 서울을 내려다보는 조망에 있다. 다른 어떤 산보다 한눈에 바라보이는 서울. 돌산이라 나무 하나 가림 없이 천지가 사방으로 팔방으로 탁 트였다.
동쪽에 북악산이 보이고 그 넘어 북한산이 보이는데 의정부 쪽의 전두환 대머리 같다는 552m 사패산, 739.5m의 도봉산 능선, 삼각산, 국민대학 뒷산인 705m 보현봉까지 선명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서울 시내의 마천루를 넘어서 아름다운 남산 뒤에 한강, 다시 넘어 관악산 등등.
우리 한강에 비하면 영국 런던의 템스 강이나 파리의 센강은 한강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아주 적은 강이다.
유럽 7개국을 흐른다는 다뉴브강이나 이집트의 나일강, 인도차이나 반도의 메콩강도 우리 한강에 비하여 크기에서도 그렇지만 아름다움에서도 견줄 바 못 된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도 그러했지만 서유럽 등에는 지평선뿐, 산이 있어도 그 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알프스의 나라를 빼고는 대부분의 유럽의 나라들은 평야뿐 산이 없다. 오죽해야 폴란드란 폴(평야) 란드(나라)란 이름이겠는가.
나는 세계를 돌아본 후에야 비로소 한국의 산하의 아름다움을 알고 내가 한국인이며 그 중에서 그 산을 사랑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로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 한국의 산하도 세계의 아름다운 산하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산하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북악산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거기서 살던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인왕산 정상에서 북악산 아래 청와대를 멀리서 보면 숲과 어울린 파란 기와의 지붕은 저렇게도 아름다운데 거기를 거쳐 간 주인공들의 남긴 자리는 왜 그리 추한 모습들이던가. 모두 다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이 아름답지 못한 이들로 처음에는 국민의 존경에서 시작해서 끝에 가서는 한결 같이 역사에 부끄러움을 더하고 간 사람들뿐이다.
대한민국을 세운 분은 하와이로 망명가서 죽을 수밖에 없었고, 가난한 나라를 오늘날 경제 규모를 세계 11위의 나라로 끌어올린 분은 자기가 믿고 사랑하던 부하의 총 맞아 비명에 갔다.
그런 혼란기에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대통령 자리를 뺏은 난폭 운전자와, 초보 운전자로 비유되는 군 출신들은 1만 원짜리로 쌓으면 백두산보다 더 높아진다는 돈을 노략질하다가 형무소로, 절로 헤매며 대도(大盜)로 지목 받아 전 국민의 우스갯거리로 미움 받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음주운전자로 비유되는 분의 측근들은 정권이 바뀌자마자 모두 감옥에 잡혀가서 옥고를 치르며 그들의 자식들마저 부정부패로 줄줄이 형무소에 갔는데 그런 분이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으니, 상을 준 쪽에서는 얼마나 후회를 하고 있을까. 상이 감정이 있다면 통곡할 일이다.
내가 서도에 도가 통하여 붓을 들어 한 마디 쓸 수 있다면 그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流芳百世 遺臭萬年(유방백세 유치만년)' 꽃다운 이름은 백세를 가지만, 더러운 이름은 만년이나 남는다. 이분들은 성공을 실패로 바꾼 불행한 사람들이다.
나는 지금의 저 청와대 주인 되는 분이 당선자 시절에, 제발 저들의 전철을 밟아 훗날 TV 연속극의 재미있는 사극감이 되지 말고, 재직 시에 국민의 마음속에 언제나 남아있는 사람 아닌 조용한 분이 되시기를 그렇게 빌었더니, 국회의 탄핵에서 겨우 살아난 불행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우리 국민들은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이나 믿고 살아볼까 보다.
이분들이 인왕산에 올라 지금의 나처럼 청와대를 바라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인왕산 정상 바로 밑이 치마바위가 있다.

중종반정에 영의정 딸 단경왕후 폐출되어
인왕산 바위에다 다홍치마 걸어두고
남편을
그리다 죽어
치마바위 전설 되었네


하산 길에 이곳을 지키고 있는 수도사령부의 그 젊고 예쁜 위병들과 김밥과 커피를 함께 하였지만 다음에 갈 때는 담배나 몇 갑 가지고 가야겠다. 마음먹고 찍어온 디카 사진을 편집하다가 날려 보냈으니 다른 코스로 다시 또 가야겠다.



2. 인왕산 산행기/ 일만 따라 디카 따라

세검정 홍지문을 지나


‘북악터널배수지’길 층계로 올라갑니다.


여기는 용천약수터.
어느 데나 인왕산에는 약수터가 많습니다.


초여름 인왕에는
줄기를 똑 끊으면 노랑 똥이 솟아나는
아기똥풀꽃이 한창입니다.


용천약수터에서 300m 오르니 갈림길
이리 가면 자하문길
저리 200m 가면 기차바위 길입니다.


北岳山 산 하나를 온통 차지하고
龍頭蛇尾하면서
遺芳百世 멀리하고
遺臭萬年을 갖고 떠난
높은 사람들이 살던 집입니다.


암산 인왕산 중에서도
기차보다 더 길게 바위길이 계속되는
기차바위랍니다.


옛날에는 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더니
오늘날에는 골육상쟁의 철조망입니다
이 철조망 거두어지는 날이
언제나 올까요?


우리가 무슨 죄를 졌다고 산에 와서도 철조망 너머로 엉겅퀴를 봐야 합니까?


338.2m 인왕산 정상입니다.
앉아 쉴 의자도 있고
삿갓을 벗어놓은 듯한 삿갓바위도 있구요.


인왕산의 멋은 조망입니다.
보세요, 우리의 아름다운 서울을-.
그 건너가 南山이지요?
세계를 다녀 봐도 南山 같은
아름다운 산을 가진 수도는 드물더라고요.


저 멋진 등산로를 보세요. 이것이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입니다.
그 너머 아름다운 세상을 보세요.
유럽에는 이런 산이 드물어요.
3시간만 투자해보세요. 그러면 인왕산은 이렇게 아름다움을 열어 줄 것입니다.


암산 인왕산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층계가 이렇게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답니다.


인왕산 호랑이를 아십니까?
저것이 범바위인 줄을 아십니까?


인왕산의 멋은 물형(物形)바위들입니다.
두 눈이 움푹 들어간 것이
해골바위가 맞지요?


카메라 앵글이 다르지만 독수리바위랍니다.


한자 家(가) 자를 자세히 보세요.
갓머리에 돼지 豕(시)
옛날 모든 집에서는 돼지를 키웠다는 뜻이지요.
그 돼지가 인왕산에 올랐습니다.


달팽이 한 마리가 고개를 우뚝 세우고
장안을 바라봅니다.
일만은 그 달팽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손가락바위라고도 하는 바위를-.


머리에 쓰는 帽子가 아니구
'母子바위‘랍니다.
어미 '母'는 어떻게 해서 생긴 글자냐 하면요
女에 젖이 둘 있으니 母가 된 것이지요.
그 모자 바위 위에 어머니가 될 사랑이 앉아 있습니다.  



부처 바위가 떨어질 듯한 머리로 근심스레 서울을 바라봅니다.
그 아래가 옛날서대문 감옥이거든요. 지금은 독립공원이구요.


서대문 형무소 안에서 본 인왕산의 부처바위랍니다.
우리의 독립투사가 저 바위를 보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사형장을 향하던-.


그때 그 형무소와 그때 그 인왕산입니다.
석굴암 입구 양쪽에 금강역사(金剛力士)를 기억하십니까?
그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곧 불교의 수호신 인왕(仁王)이구요.
인왕산은 서쪽에서 한양을 지키던 수호 산이었지요.


국사당(國師堂) 뒤에 있는 선바위입니다.
서 있는 바위가 아니라 禪岩이랍니다.


돌아오는 길에 독립공원에 들려
독립문에서 이완용이 썼다는 글씨도 보고


순국선열추모탑에서 노는 아이들도 보고


구체적인 아내 사랑 몰래 카메라하면서


독립공원에서 나를 졸졸 쫓아다니던
서진성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에게
큰 맘 먹고 사먹는 술안주 산 오징어를
절반 이상이나
억울하게 뺏기고도 웃으며 돌아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