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산


            *산행일자:2008. 5. 29일(목)

            *소재지  :전북부안

            *산높이  :쌍선봉459m, 관음봉433m

            *산행코스:남여치-쌍선봉-월명암-자연보호헌장탑-직소폭포

                      -관음봉-내소사-내소사버스정류장

            *산행시간:12시17분-18시40분(6시간23분)

            *동행    :나홀로 

 

 

   김제에서 부안 가는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내다본 들판이 참으로 광활했습니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 했는데 들판이 넓다고 산봉우리가 우람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호남평야라 불리는 저 드넓은 논 뜰에 충분히 물을 대기 위해서도 물탱크 역할을 하는 높은 산이 몇 개 있어주면 좋으련만 이렇다 할 산 봉우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울에다 옮겨놓으면 북한산에 치여 한 쪽으로 밀려났을 해발509m의 변산을 여기 부안에서 군계일학의 산으로 대접하는 것이나 산림청에서 이 산을 명산100산의 반열에 올린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산을 일군 호남평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나라의 대표적인 젖줄이 한강이라면 대표적인 생명줄은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땅 한 구석에 변산을 일으켜 세운 호남평야는 한반도 최대의 너른 논 뜰로 연간 쌀 생산량도 90만톤이나 되어 전국 생산량의 15%를 상회한다 합니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광활한 벌판의 호남평야가 조정래의 소설“아리랑에서 “징게 맹경 외에밋들”이라 묘사된 것은 호남평야가 김제(징게)평야와 만경(맹경)평야를 모두 어우르는데서 연유된 것으로 막힘없이 너른 들판을 이곳 사람들은 “외에맷들”로 부른다 합니다. 이 너른 들판의 젖줄인 강줄기가 겨우 동진강과 만경강 두 강 밖에 없는데다 이 강들에 물을 대는 산들이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의 연봉들뿐이어서 백두대간에서도 물을 받는 섬진강으로부터 물을 얻어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림 같은 옥정호 댐을 만들어 담아둔 물의 일부를 호남정맥을 뚫고 낸 수로를 따라 동진강으로 흘려보낸다 하니 섬진강 물이 산을 넘은 것과 똑 같은 효과를 보는 셈입니다. 이리도 힘들게 물을 얻어 쓰는 호남평야가 기왕에 저수고인 산을 만들 것이라면 아예 천m를 훌쩍 넘는 고산을 만들거나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빗물을 담아내지 못하는 암봉은 만들지 말았어야 했을 것을 해발고도가 500m를 겨우 넘은 변산 여기저기에 수많은 암봉을 배치해 놓은 것은 혹시라도 집중호우에 힘들게 세운 이 산이 무너져 내릴까 걱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저 나름대로 호남평야의 깊은 뜻을 혜량해 보았습니다.


 

  

  김제 기차역에서 하차하여 부안가는 버스를 갈아탔습니다.

너른 들판이 펼쳐지는 호남평야를 30분가량 달려 부안에 도착해 다시 변산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닷가 풍경이 눈에 익다 했는데 얼마 후 버스가 변산해수욕장을 지나는 것을 보고 20여 년 전 가족들과  함께 들렀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숙박시설이나 다른 부대시설들이 참으로 후지다 했는데 이제는 주차장이 넓게 들어선 것으로 보아 다른 시설들도 많이 좋아졌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정오를 조금 넘긴 12시17분에 남여치를 출발했습니다.

변산에서 이 고개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북동쪽으로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인데 군부대가 점하고 있어 포기하고 다음으로 높은 쌍선봉으로 향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자 명찰을 달고 차렷 자세로 제게 처음으로 인사를 해온 나무는 일본에서 옮겨 심었다는 삼나무였습니다. 쌍선봉을 거쳐 월명사에 이르기까지 저와 통성명한 나무들은 무려 48가지여서 이들 이름을 잊지 않고자 명찰을 단 앞가슴을 카메라에 모두 담아 왔습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한 반을 만들어도 될 것 같아 이 산행기 말미에 그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물소리가 삽상한 계곡을 건너 본격적인 산 오름을 시작했습니다. 공손하게 인사를 해오는 나무들에 발목이 잡혀 몇 걸음 옮겨놓지 못하고 카메라를 꺼내 찍는 바람에 산행이 엄청 더뎠습니다. 곳곳에 이정표를 세워놓고 필요한 곳에 계단 길을 만들어 놓아 역시 국립공원 길은 정맥 길과는 크게 다르다 했습니다. 


 

  13시37분 해발459m의 쌍선봉을 올랐습니다. 

남녀치 출발 한 시간 남짓 지나 다다른 관음약수터에서 약수로 폐부를 씻어보고자 했으나 부유물이 많아 마시지 못하고 똑똑 떨어지는 약수 방울 소리만 들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산 속의 소리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아 산에서 듣는 자연의 소리는 그 소리가 무엇이든 마음을 열고 들을만합니다. 미풍에 살랑대는 나뭇잎이 내는 소곤소곤한 소리에서 광풍이 몰고 오는 천둥 벼락 치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소리는 음폭도 깊고 음역도 넓습니다. 혼자서 산행할 때 산속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면 오히려 긴장되는 것은 산식구들이 소리 없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닌 가해서입니다. 산식구들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떳떳한 일을 할 때는 마음 놓고 소리를 내지만 그렇지 못한 일을 꾸밀 때에는 누가 들을까봐 모기목소리로 이야기 할 것 같아서입니다. 관음약수터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제게는 속세의 욕심을 하나씩 떨어내라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약수터에서 조금 올라 만난 능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헬기장이 들어선 쌍선봉에 오르자 남동쪽으로 암봉들이 연이어 보였습니다. 쌍선봉에서 삼거리로 되돌아와 월명암으로 향했습니다.


 

  14시20분 서쪽 위로 낙조대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쌍선봉에서 100m를 내려와 되돌아온 삼거리에서 3-4분을 더 내려가 왼쪽으로 내려갔는데 직진하면 낙조대에 이를 것 같았습니다. 작은 지곡을 건너 월명사에 다다르자 백구가 저를 반겼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도 눈만 껌벅대는 순득이 백구를 두고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구나 싶었습니다. 치악산 상원사의 흰둥이 개처럼 월명암의 백구가 처음 보는 객에 다가와 반기는 것은 개가 사람들에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보시일 것입니다. 저 아래 속세의 견공들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큰 소리로 짖어대고 보는데 스님들의 불경소리를 오랫동안 들어온 백구들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기에 말입니다. 월명암은 흔한 암자로 보기에는 규모도 컸고 역사도 깊었습니다. 관음봉 너머 내소사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절터 한 가운데 어엿한 대웅전이 자리 잡았고 한쪽으로 관음전과 법고도 보였습니다. 신라 신문왕 때 재가불자 부설거사가 세웠다하니 그동안 이절이 견뎌낸 역사적 고통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월명암을 휘둘러보고 백구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절을 빠져 나가 관음봉으로 향하다가 4-5분 후 능선 삼거리에서 점심을 들면서 10분여 편히 쉬었습니다. 웃옷 가삼을 벗은 채 산책길에 나선 젊은 스님 한 분을 만나 인사를 드렸습니다.


 

  15시58분 직소폭포 앞에 섰습니다.

점심을 끝내고 서쪽으로 난 평탄한 능선 길을 걸어 375봉에 올라섰다가 남쪽 아래 자연보호헌장탑으로 내려가는 급경사 길로 내려섰습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서울서 혼자 오셨다는 저보다 두해 연배이신 한 분을 만나 길안내를 받았습니다. 폐가 좋지 않아 치료를 받은 후 3년째 산을 열심히 다닌 덕에 이제는 건강을 되찾았다며 좋아하시는 이분과 헤어져 암릉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바위 끝에 가드를 쳐놓은 거암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오르지 못한 낙조대를 사진 찍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 다다른 평탄한 곳에 자연보호헌장탑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계곡을 건너 남쪽으로 진행하다 신선골의 계곡물을 막은 작은 댐 옆을 지났습니다. 옛날에는 식수원으로 쓰였다 하는데 오래 가물어서인지 식수로 써도 좋을 만큼 물이 깨끗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미풍이 스쳐가며 만드는 잔잔한 파고는 관음약수터의 물방울 소리를 연상케 했습니다. 약수터의 물소리도 이 계곡의 물결모습도 모두 잔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제 마음이 한껏 편안해서일 것입니다. 쌍선봉의 선녀들이 숨어서 몸을 씻었을 선녀탕에서 한참을 더 올라가 직소폭포 전망대에 다다랐습니다. 사진 몇 커트를 찍은 후 5-6분을 더 올라가 직소폭포로 내려섰습니다. 어느 폭포든 낙차의 크기와 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그 세가 결정됩니다. 직소폭포는 낙차 높이가 22.5m이고 그 소 실상용추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하는데 제가 보기에 그리 대단한 폭포는 아니지만 뒷자리 봉우리인 400m대의 관음봉과 신선봉의 높이를 감안한다면 이 폭포에 이 정도의 물을 대는 것도 만만치 않겠다 싶었습니다.


 

  17시33분 해발433m의 관음봉을 올랐습니다.

직소폭포에서 다시 올라와 본래 길로 되돌아왔습니다.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자 한동안 평탄한 길이 이어졌습니다. 이 길이 환상적인 것은 이 길과 나란히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거의 고도차가 없어 동네 앞 실개천을 보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부안에서 저녁 7시50분에 출발하는 정읍 행 마지막 버스를 타기위해 산행을 서둘러야 했기에 이 좋은 계곡을 손 한번 씻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철망으로 돌망태를 만든 돌다리를 건넌 후 왼쪽으로 10분을 올라 재백이 고개에 올라서자 남쪽 가까이에 바다가 보였습니다. 재백이고개삼거리에서 북쪽으로 똑바로 올라 거암을 지나 335봉에서 10분간 쉬면서 숨을 돌렸습니다.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안부로 내려섰다가 얼마간 오르자 관음봉삼거리가 나타났습니다. 시간은 빠듯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0.6Km밖에 안 떨어진 관음봉을 그냥 지나치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왼쪽으로 꺾어 관음봉으로 내달렸습니다. 수직암벽을 왼쪽 아래로 에돌아 올라선 공터에서 건너편의 쌍선봉 줄기를 조망한 후 다시 올라 관음봉에 도착했습니다. 나무들로 시야가 가려 답답한 이봉우리가 관음봉의 이름을 얻은 것은 나름대로 사연이 있을 법한데 알아보지 못하고 하산했습니다. 관음봉삼거리로 되돌아와 시간을 체크해보니 관음봉을 다녀오는데  38분이 걸렸습니다.


 

  18시40분 내소사버스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관음봉삼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는 길도 마음이 급해서인지 경사가 꽤 급해 보였습니다. 전망바위 입암을 지나며 서쪽 아래 내소사를 일별한 후 서쪽으로 서둘러 내려갔습니다. 화장실과 의자가 있는 공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내소사로 올라가는데 5분도 안 걸렸습니다. 관음봉에서 이름 때문에 품었던 의문이 웬만큼 풀린 것은 내소사 북 쪽 뒤로 관음봉이 우뚝 솟아 이 절을 지키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소사가 인근 고창 선운사의 말사라지만 이절 또한 대찰이었습니다. 우람한 관음봉에 주눅 들지 않을 만큼 이절도 컸습니다.  신라선덕여왕 때 창건된 내소사(來蘇寺)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내방해 시주를 했다 해서 소래사(蘇來寺)에서 내소사(來蘇寺)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왕이면 장수 소정방뿐만 아니고 소동파(蘇東坡)로 더 알려진 북송시대의 명문장가 소식(蘇軾)선생께서도 왕림해주셨으면 더욱 좋았을 껄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절과 역사를 같이 해온 느티나무는 용문사의 은행나무와 나이를 견줄 만큼 오래된  나무로 그 수령이 천년을 넘는다 합니다. 버스 시간에 쫓겨 서둘러 내소사를 출발했습니다. 길 양쪽에 서있는 150년 된 전나무들의 환송인사를 받으며 일주문을 빠져나갔습니다.  몇 분을 더 걸어 정차 중인 군내버스에 올라타 부안으로 향했습니다. 남동쪽으로 해안을 돌며 곰소와 줄포를 지나 저녁 7시 반이 조금 지나 부안에 도착해 7시50분 막차를 타고 정읍으로 이동했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부안 땅 지평선도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햇빛도 해내지 못하는 색상의 통일을 어둠은 단숨에 흑색으로 단일화시켜 해냈습니다. 햇빛이 들어내 척결하지 못한 음습함을 어둠은 검은 베일로 싸 다시는 활개 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평선도 수평선도 모두 삼켜버린 어둠이 강력하게 진을 치고 있는 동안은 낮 동안의 모든 현실은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둠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펴보는 일입니다. 호남평야가 다시 변산을 일군다면 선운산을 불러들여 높이를 배가하도록 권해볼 생각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라 한 것도 기실 산은 높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태산이 낮다하되 땅위에 뫼라고 읊었어야 했습니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듯이 벌이 넓으면 뫼가 높은 것이 이 자연의 로고스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해보는 말입니다.


 


 

  이번 산행 중 통성명을 한 나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삼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쇠물푸레나무, 철쭉, 진달래, 정금나무, 팥배나무, 감나무, 밤나무, 잣나무, 전나무,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병꽃나무, 대팻집나무, 산딸나무, 윤노리나무, 개서어나무, 감태나무, 개벚나무, 당단풍나무, 사람주나무, 서어나무, 회나무, 고로쇠나무, 나도밤나무, 소태나무, 팽나무, 곰의말채, 비목, 쪽동백, 느티나무, 단풍나무, 개옻나무, 까치박달, 복자기, 고광나무, 다릅나무, 합다리나무, 자귀나무, 참회나무, 굴피나무, 팽나무, 층층나무, 고추나무, 신갈나무와 노린재나무 등 총 48종이었습니다. 때죽나무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가 인사를 받고도 이름을 빼먹은 나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와 통성명한 이 나무들이 변산의 대표적인 산식구들입니다. 제가 대표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미국 시인 조이스 킬머가 그의 시 “나무”에서 읊은 것처럼 나무는 하느님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산식구들은 나무처럼 통성명을 하고 지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야생화는 너무 작아서, 야생조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날아다녀서, 야생동물은 사람들에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아서 명찰을 달아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나무들과 통성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변산국립공원과 신한은행에 감사말씀 드립니다.

(윗글을 쓰는데 이우형님의 “한국지형산책”내용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저자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