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세계에 머물렀던 시간....  지리산 종주 (2004. 8. 2.~ 8. 3.)

 

 

작년말 까지만 하더라도 지리산을 종주한다는 건 내겐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첫째는 체력이 턱없이 안되고  둘째 체력이 된다해도 아이들이 어려 며칠씩

걸리는 일정을 애들 떼놓고 간다는건 에미로써 양심상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몇년전부터  나무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나름대로 공부를 하다보니 소나무과의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는 지리산과 한라산 등 1500고지 이상의 큰 산이 아니면

군락으로 자라는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음을 알고 지리산 종주의 꿈을 조금씩

키워갔다

 

올 초부터 시작한 체력다지기...

하루 두시간 거리의 동네산을 반년이 넘게 매일 오르내리고

한달에 한 번 있는 산악회 산행을 꾸준히 따라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반나절에서 대여섯시간 이상을 걷는 팔공산행을

혼자 여러 번 용기를 내어 감행했다   마지막 동화사에서

동봉을 올라 신령재 지나 갓바위까지 일곱시간을 그 더운

땡볕에 혼자 고행을 한 후 조금 자신이 생겼다   이정도면

나도 지리산 종주할 체력은 되지 않을까 싶은...

 

삼십오육도의 불볕 더위가 열흘 넘게 기승을 부리고 그 열기가 최고조에

다다르는 휴가철이 다가왔다 

자주 들어가는 산행기 게시판엔 지리산 종주기가 내 꿈을 부채질한다

이박삼일, 일박이일, 당일종주까지...  정말 말도 안되게 황당한 지리산

당일 왕복 종주기까지 올라왔다

 

나같은 초보는 당일은 꿈도 못 꿀 일이고 이박삼일은 애들때문에 도저히

안되고 일박이일로 다녀올 수 있는 가장 구미에 당기는 산행기....

대구의 삼십대 중반 여자가 올린 지리종주기가 끝내 내 마음을 굳히게

했다

하산 지점인 백무동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예약한 택시로 성삼재까지 가서

성삼재에서 시작해 노고단을 올라 반대편 천왕봉까지 올랐다 백무동으로

하산하는 코스로....

 

8월 1일(일요일)은 시골에 큰 손님이 와서 하루 종일 음식 만들고 치우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고 아이들은 지리산 다녀온 후 하루 물놀이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달래고 얼러 어머님께 맡겼다

2일 새벽 출발에 앞서 전날 저녁 두세시간 잠을 자둬야 하지만 짐꾸리고 이것

저것 챙기느라 남편은 한숨도 못잤다

난 이틀동안 먹을 거리를 챙겨놓고 새벽에 간신히 한시간 눈 부쳤지만....

정확한 휴가 날짜가 안 잡혀 산장 예약을 못한 터라 만일을 대비해

80리터 남편 배낭엔 침낭은 물론 텐트까지 넣어야 했다

 

새벽 한시에 출발해 88고속도로 올려 고령지나 거창쯤 꾸벅꾸벅 졸리는 눈을

억지로 비벼보지만 도저히 가물가물 앞이 안보여 남편은 거창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한시간 반을 정신없이 잠에 취했다   새벽 3시반에 다시 출발해

지리산 나들목에 내려 백무동에 도착하니 택시 예약시간을 정확히 맞춘 다섯시다

성삼재로 향하는 택시안에서 난 또 한 삼십여분 졸았는데 남편은 여전히 한숨

도 못 붙힌다  난 중간중간 조는 시간까지 합쳐 서너시간 잠을 잤건만

남편은 결국 첫날 그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하루종일 걸어야 할 산행에 앞서

거창 휴게소에서 한시간 반 눈부친 잠이 전부였다 

 

여섯시에 성삼재를 출발해 노고단으로 오른다

잘 다듬어진 넓은 길에서 몸은 풀리지 않고 난생 처음 메어 본 가장 무거운 배낭...

첫걸음부터 머리가 띵하고 몸이 천근만근이다

하는 수 없다  어느정도 컨디션이 돌아올 때까지 천천히 걷는 수 밖에...

그동안 흔하게 보았던 층층나무와 쪽동백나무 생강나무사이로 처음보는 거제수

나무와 피나무, 호랑버들, 사스레 나무를 보며 1시간여만에 노고단에 올랐다

 

올라온 쪽으로 저 건너 만복대를 바라보며 가야할 천왕봉쪽으로 구비치는 산봉우리와

능선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화창히 개인 날씨 덕에 맨끝의 천왕봉이 가물가물

보였다   첫 시작지점을 기념삼아 노고단을 배경으로 한 컷 찍을려는데... 아뿔사

남편은 필름을 챙겨오지 않았다   구지 원망할 필요없이 밑에 대피소로 내려가

매점에서 사면 되지만 삼십여분 내려갔다 올라오기 싫어 지리산을 그림으로 남겨

가길 포기하고 말았다   그만큼 부지런히 눈과 마음으로 담기로 작정했다

 

노고단에서 돼지평전을 지나 임걸령으로 가는 길은 걷기에 더없이 좋은  아기자기한

오솔길의 능선이었다

몸도 풀리고 남편을 뒤따르는 발걸음에 흥이 절로 났다  아름다운 색색의 야생화

가 지천에 피어 하염없이 걷는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가는 길 내내 길을 밝히고

따라오던 낮익은 예쁜 꽃들... 동자꽃, 이질풀, 며느리밥풀, 모싯대, 산오이풀,꼬리풀,

일월비비추,참취,곰취,산수국..... 꽃보다 이쁜 특유의 열매로 보아 노박덩굴과로

보이는 키낮은 나무가 줄처럼 계속 따라 왔다  싱싱한 잎에 새 줄기가 붉은 빛이

감도는 나무는 이름이 입가에 맴도는 데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틀 산행내내 그

이름을 떠올리려 했지만 집에 와서야 미역줄나무라는 걸 알았다 

 

십일년 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지리산을 세 번이나 왔건만 그때는 멋모르고 따라

다니던 시절...  산도 나무도 꽃도 제대로 볼 줄 모르고 오로지 남편 한 사람만 보고

다녔던 때가 생각났다   십년도 더 지난 세월은 내 안목을 이렇게 성숙시켰는데

남편을 향한 그 떨림과 설레임만은 어디서 다시 찿을 수 있을지...  영원히 그 세월을

되돌릴 수 없음을 생각하며 남편을 뒤따른다  겨우 한시간 반을 자고 나를 위해 저

무거운 짐을 지고 지리종주에 나서준 사람.....

 

돼지평전을 지나 아침을 간단히 먹고  지리산에서 물맛이 가장 좋다는 임걸령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한 쪽박 마시니  정말 시원하고 달게 느껴진다  2리터 물병을 가득

채우고 배낭을 다시 메니 물 한 병을 비우고 채울 때 마다 베낭의 무게가 가벼웠다

다시 무거워진다   삶이 무겁고 힘겹게 느껴질 때도 가끔씩은 이렇게 마음과 욕심을

비우고 덜어낼 수 있다면 그만큼 내 삶도 가벼워지겠지...

 

지난 시절 남편따라 단숨에 올랐던 반야봉을 노루목에서 우뚝솟은 봉우리만 바라

보며 다음을 기약했다  좀 더 여유와 체력이 될 때 반드시 오르리라고...

삼도봉에서 어린아이처럼 세 곳을 번갈아 가며 서본다  전라남북도 보다는 그래도

경상남도가 더 편하게 느껴지는건 왜일까?^^

사과와 건포도, 육포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토끼봉을 향해 길을 제촉한다

 

잘 다듬어진  내림길의 나무계단이 그늘속에 길게 이어져 자신있게 내달릴

참인데 남편은 이런 길일수록 아껴가며 천천히 걷는거라고 한다  단풍나무과의

시닥나무와  자작나무과의 사스레 나무도 보며 여류롭게 걷는다  조경으로 심어논

키작고 아담한 나무만 보았는데 야생으로 자란 우람한 구상나무가 정말 많다

 

화개재에서 뱀사골계곡을 손짓하며 일러주는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어느 골짜기 하나 깊고 길지 않는 곳이 없으니...

숨이 턱턱 막히는 토끼봉 오름길을 통과하여 내림길로 접어드는 것도 잠시

명선봉으로 향하는 오르막 내리막이 끝없이 다가왔다

등로 군데 군데 잠 못 자고 오르내리느라 지친 사람들이 널부러져 잠을 보충하고

있다   남편도 무척 힘들어 한다  비켜선 그늘에서 잠깐 자고 가면 조금은 수월할텐데...  

초등학교 오육학년 쯤 되 보이는 아이와 중학생으로 보이는 언니가 바위에서

쉬고 있다  자매가 지리종주를 나선 모양인지  언니의 배낭은 40리터는

되 보인다   가도가도 짐이 줄지 않는다며 짐꾸러미를 다시 챙기고 있다

정말 용기있고 대단한 아이들이다

 

명선봉을 지나고 삼도봉을 출발한지 두시간여만에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북적인다 그늘이나 나무식탁이 있는 좋은 자리는

꿈도 못꾸고 햇볕이 쨍쨍한 울퉁불퉁한 돌위에 베낭을 풀고 햇반 두개와 라면

한개로 점심을 먹고 한시간 후 벽소령을 향해 배낭을 다시 맸다

걸음이 빠르지 못할 뿐 걷는 내내 그렇게 힘든줄 모르겠는데...

남편은 여간 고생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내 즐거움에 짝도 함께 해야 진정한

즐거움인것을...  괜히 미안하고 마음이 편치 않다

 

형제봉지나 전망좋은 바위에 이르러 쉬어가자 하니 더이상 못걷겠다며

남편도 무거운 배낭을 내리고 등산화를 벗는다

삼십분 바위에 누워 잠을 잤다  이번에도 남편은 자리가 고르지 않다며

잠을 못자는 것 같다   저너머 사진으로 많이 봐 눈에 익숙한 벽소령 산장이

봉우리와 봉우리사이 아늑한 능선에 그림처럼 앉아 있다 

그 산장에서 방송이 흘러 나온다   지난 밤에 초등4학년 11살 남자아이가

실종됐다는.... 부모님과 함께 왔다 길을 잃어 혼자 어딘가로 헤멜 아이의

두려움도 그렇지만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니 더 가슴이

아팠다

이틀후 집에 와서 그아이가 용감하고 지혜롭게 대처해 3일만에 구조되었다는

반가운 뉴스를 접했다

 

지친 발걸음에 고개너머 보이던 벽소령산장도 멀게만 느껴졌다

벽소령에 가까워지자 날씨가 좋지않고 산장을 예약하지 않은 사람은

자리가 없다며 음정으로 하산하라는 방송이 연이어 들린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몸은 지치고 기분은 우중충해졌다

멀리서 보아 그렇게 이쁜 산장이었건만..  자리도 없고 물도 부족하단

방송을 연하천부터 들어온 터라 그냥 지나쳤다

 

삼십분 넘게 간간히 뿌리던 가랑비가 드디어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얼른 판초우의를 뒤집어 쓰고 남편은 베낭커버를 씌우고 일회용 비닐우의를

겹쳐 입는 그 짧은 순간에 옷이 흠뻑 젖어버렸다

날은 자꾸 어두워지고 비는 좀체로 그치지 않고 텐트를 칠려해도 쏟아지는

빗속에서 엄두도 못낼 일이다

무조건 세석대피소까지 가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보통사람들의 무릎밑까지 오는 길이의 판초의가 키작은 내겐 발목까지

온다  치마를 걷어올리듯 비옷을 거머잡고 미끄러운 바위를 오르내리

자니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내 짝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발짝 한발짝 내딛었다 

순식간에 빗물은 산꼭대기 능선에서도 도랑이 되어 흐르고

울퉁불퉁 튀워 나온 바위는 징금다리가 되어 건너갔다

등산화를 산지 2년만에 처음으로 물이 들어왔다   결국 징검다리

건너기도 포기했다  첨벙첨벙 걸아가는 건 그나마 호사다

미끄럽고 위험한 바위구간을 오르내리는 건  식은 땀이 흐르고 더

긴장하게 만든다   가도 가도 높은 봉우리는 계속 나오고 주위는

더 어두워지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저 세석까지만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길 바랄 뿐...   남편은 바닥까지 소진한 체력부터 흠뻑 젖은

옷과 무거운 베낭에다 장담할 수 없는 잠자리 까지 더한 걱정으로  

분명한 건 나보다 몇 배나 더 힘들 것이다

 

우리가 함께한 올여름 지리산을 두고두고 기억하라고 하늘이

비를 내려주는것 같다고...  남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본다

두시간 넘게 소낙비를 맞으며 추위에 떨며 덕평봉,칠선봉을 지나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영신봉(1651m)에 다다랐다 

퍼붓던 소나기가 가랑비로 잦아들며 세석평전으로 희미하게

풀과 바위와 고운 야생화와 키작은 구상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이 열렸다

낮에 맑은 날 걸으면 더 없이 좋은 길을 저녁 일곱시 가까운 시간에

비속에서 걸어간다

11년 전 여름 남편에게 야생화 이름을 배우며 뽀얀 안개와 가랑비속에

천상화원을 걸었던 일이 생각났다

 

세석대피소에 다다르니 처마 밑에도 한 자리 앉아 기댈 곳  없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고 덜덜

떨고 있노라니 산장예약 안한 사람도 대기실로 들어오라는 방송이

나왔다   세석산장을 고맙게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다 받아주고 수용해준

곳...  여자들부터 방 배정을 받고 마지막 남은 젊은 남자들은 대기실

과 복도 곳곳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다시 굵어지는 빗발속에 화장실 걸음도 벅찬데 저녁밥 해먹을 엄두를

낼 수 없다   남편과 떨어져 밤을 지냈지만 잠자리를 제공받은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한 일이다 구석에 자리잡고 키큰 여자들 틈새로 간신히 누워

칼잠을 잤다.

너무 더워  한 밤중 12시 40분에 깨서 복도를 살살 나오니 장딴지가

내 허리통만한 남자들이 여기저기 대자로 뻗어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산장 난간에 기대어 밖을 보니 간신히 비만 그쳤을 뿐 뽀얀 안개속에

잠겨 하늘도 산도 꿈을 꾸고 있다

그저께만 해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보름달과 별들이 밤하늘에

빛났건만....

 

4시반에 일어나 아침을 해먹고 여유롭게 커피도 끓여마셨다

남편은 지난밤의 단잠으로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마주 앉아 밥을 먹었던 똘망한 사내아이에게 나이를 물으니 울집 큰애와

같은 11살이란다  아빠따라 몇박 몇일로 지리종주를 나선 일이 그저 재밌고

신나 보인다   왜 넘의 아이는 그렇게 기특하고 더 커보이는지....

 

어제처럼 6시에 다시 출발이다   세석평전을 지나 촛대봉에 올랐다 

뒤쪽 삼신봉, 연화봉 뒤로 우뚝 솟은 천왕봉이 가까이 어서오라 손짓한다  

끝없이 펼쳐진 첩첩산중 골짜기마다 하얀 구름들이 올라오고 연하봉에서

장터목까지 그림같은 평원이 펼쳐졌다

이슬에 젖은 풀과 아름다운 꽃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어느 보석이 이보다 더 영롱할까

 

고지가 높아질 수록 구상나무들 속에 드디어 가문비 나무도 한 두

그루씩 보이기 시작했다

구상나무와 가문비 나무는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수형도 수고도 거의

같고 많이 닮았다   우리같이 관심 있는 사람은 잎을 보고 금방

구분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표만 없으면 모두 구상나무

로 알 것이다  구상나무는 잎끝이 둥글게 보이고 자세히 보면 두갈래

로 갈라지는데 가문비 나무는 갈라지지 않고 끝이 뾰족하다   소가지에

잎이 달리는 각도도 구상나무는 거의 90도 가깝고 가문비나무는 45도

안쪽이다   나보다 눈썰미가 있는 남편은 몇 그루 확인 하더니 금방

멀리서 보고도 가문비나무와 구상나무를 가려냈다  난 천왕봉을 올랐다

내려올 때쯤 잎을 자세히 보지 않고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천천히 나무와 고운 꽃들을 보며 여유를 부려가며 걷다보니 두시간

만에 장터목에 도착했다  식수가 나오는 내림길에 물받는 줄이 길게 늘어

서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이 풍부한 세석에서 받아오는 건데...  무려 삼십

분이 걸려 물을 받았다   천왕봉까지야 작은 물병 두개로도 괜찮겠지만

백무동 지루한 하산길을 대비해 2리터 물병을 가득 채웠다

8시 30분에 장터목을 출발해 천왕봉을 향해 오른다   배낭을 두고 가자 해도

남편은 힘이 남아도는지 물병까지 받아넣고 올라간다

고사목지대 제석봉에 다다르니 금방 안개가 확 덮였다 벗겨지기를 반복했다

30여년전 도벌꾼들이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지른 불에 죽음을 맞았던  나무들의

군락지...  지대와 주위에 새로 자라는 어린 나무들로 보아 거의 구상나무일 것이다

 

제석봉을 지나고 통천문을 통과하여 마지막 구간 철난간을 오른다

암봉지대와 바위 절벽 여기 저기 우뚝 서있는 나무들이 이번엔

구상나무는 보기 어렵고 거의가 가문비나무다   그만큼 가문비

나무가 1800고지 이상의 마지막 한계선에서 자란다는 걸 알 수 있다

해가 비쳤다 들어갔다 할 때마다 천왕봉 주변의 암봉들과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췄다를 반복하는 기이한 요술을 부리는데 남편은

날 두고 저만치 바위를 타고 잘도 올라간다  따라 잡으려 땀을 흘리며

속도를 내니 주위 사람들 모두 혼자 온 아줌마로 알고 무슨 걸음이

그리 빠르냐며 대단하다고 한마디씩 건넨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 1시간 20분여 거리를 45분여만에 올랐다  

아침 아홉시 17분...

먼저 도착한 남편과 힘차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3대의 덕을 쌓아야 일출도 볼 수 있다는데  우리같은 사람들은

천왕봉에서의 맑은 날은 기대하기 어려웠던 걸까   구름 사이로

잠깐씩 드러나던 햇살도 완전히 사라졌다   온통 희뿌연 안개와

구름으로 어느쪽으로도 전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필름없어 사진 한장 찍지 못하고 북적이는 사람들속에 정상석 한 번

제대로 안아보지 못한 체 마지막 남은 꿀맛같은 복숭아를 두개씩 나누어

먹고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없는 천왕봉을 뒤로하고 장터목을 향해 다시

내려왔다

 

제석봉에 다다르자 안개가 뽀얗게 내렸다

고사목의 슬픈 이야기속에 제석봉을 뽀얗게 덮는 안개가 운치를 더했다

역시 지리산의 하이라이트는 세석평전에서 장터목을 지나 제석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 길을 맑은 심신으로 고스란히

밟았던 둘째 날 오전은 내내 천상의 세계에 머물렀던 시간이었다 

 

장터목에 되돌아와 백무동으로 하산하는 길은 돌너덜과 돌계단길이

이어진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길이었다

구름과 안개와 서늘한 바람,  구상.가문비나무와 야생화가 어우러진

천상의 세계에 머물다 내려온 산아래의 세상은 여전히 후덥지근하고

각종 오물로 냄새나는 시끄러운 인간의 세상...  이 세상으로 남편과

정답게 점심먹을 시간도 갖지 못한 체 엄마와 아빠를 이틀동안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향해  서둘러 차를 달렸다

 

 

작년 말 남편에게 지리산 종주 한 번 해보고 싶다 말할 때

"하이고!~~ 그 체력에 어딜 종주해?"  코방귀를 뀌었던 사람에게

자랑스럽게 내가 대단하지 않냐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고무되서 말하니

이왕이면 칭찬 좀 해주면 듣기도 좋을 걸^^....

진짜 지리산 종주는 화엄사에서 네시간 이상을 노고단으로 걸어올라

천왕봉에서 치밭목지나 대원사 유평리 마을로 하산해야 진정한 종주

라고 한마디 한다   역시 내신랑 다운 한마디다^^

 

그러든 말든 가슴가득 차오르는 이 뿌듯함을 무슨 말로 표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