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산(981m) 정상에서 바라본 배냇골 푸른 아침

 

 

 

천황산(1189m) 사자바위를 둘러싼 한낮의 푸른 고요

 

 

 

 

홀로 지낸 2012 시산제 

 

배내고개 - 능동산 - 천황산 - 표충사

 2012-02-05

 

 

배내고개

 

 

내일이 음력 보름이니 이런 저런 일로 미뤄둔 시산제를 지내기엔 오늘이 딱 알맞은 날이다. 

하지만 어쩌나! 삭신이 쑤시고 난데없이 배까지 살살 아프고...... 그래도 경험상 가벼운 몸살

따위는 산행으로 한결 나아지는 수가 많으니 안정보다 휴식같은 산행을 결행하기로 했다.

 

 

집사람더러 혼자 시산제 지내고 올터이니 토요일 오후에 장을 좀 봐달라 청하니 토를 달

지 않는다. 속으로야 주기적으로 발동하는 남편의 소꿉장난으로 여기고 있는지 모르지만,

주로 혼자 산을 다니니, 산과 나를 잇는 의식의 대해 각별히 경건한 것도 잘 알 터이다.  

 

 

 

 

겨울산길

 

 

충분히 됐다. 지난 세월 그만큼 보여주었으니,

미사여구를 털어버린 선(線)은

 거친 풍상 이어온 늙은 장군의 수염.

 

다가가보면,   한 줄 한 줄

生의 몸부림 이어온 가녀린 맨 살들!

 

 

 

나는 이런 풍경이 좋다. 잭슨플록의 액션페인팅을 능히 넘어서지 않는가?

오랫동안 이런 이미지는 장차 나를 어떤 새로운 미학적 세계로 인도할 지

모르는 회화적 감동을 지속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가지산에서 이어온 낙동정맥 줄기가 능동산에서 갈라지는 지점이다.

 

상운산과 고헌산 사이로 아스라이 깊어진 경주시 산내면 골짜기 풍경이 가쁜 숨을 쉬게 한다. 

 

 

 

 

해발 950 을 넘겨 능동산으로 이어지는 눈얼음길

 

뚜렷한 등로지만 잠시 앞을 가리는 선(線)들의 군무(群舞) 또한 겨울 등산로의 아름다움이다.

인생에서 이런 장벽이 얼마나 많았던가? 알고보면 이리저리 옛걸음들이 길을 밝혀 놓았건만

젊음의 조급함은 그저 앞이 꽉 막힌듯한 당혹감에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저 끝을 알고나면 이 또한 아름다움인 것을......

 

 

 

능동산 정상

 

 

 

 

최소한의 준비로 경량화

 

배, 사과, 귤, 곶감, 대추, 밤, 명태포, 돼지머리눌린 수육, 시루떡 그리고 술!

단체산행을 안내할 때도 초와 향은 쓰지 않았다. 가끔 모형을 사용하기도 했

지만...... 어쨌던 구비할 수 있는 대로 형식을 차리고.

 

 

 

 

 

마침 산객 한 분이 지나다가 기이한 구경을 하고 함께 예를 올리게 되었다. 제 절차를 생략

하고 술잔을 올리고 제문을 읽는데...... 이런!! 스타일이 좀 구기네!  보다 낭랑한 목소리로

준비해온 제문을 읽어야하는데, 입이 굳고 뺨이 얼어서 영 발음이 잘 안된다.

 

 

2012년 임진년 2월5일.

 

보잘 것 없는 산꾼 산거북이는 사랑하고 흠모하는 영남알프스 대자연의 한 봉우리,

능동산에 올라 홀로이 시산제를 치르면서 천지의 신명께 엎드려 고하나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지난날 문득 결심한 바 인연이 되어 그로부터 산에 의지하고 산을

오르는 열정으로 산거북이는 오늘날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되었나이다.  산을 닮아 자

연과 조화로운 고귀한 경지를 추구해 올 수 있던 세월은 오직 천지신명의 가호 아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정성드려 감사와 기원의 재를 올리게 되었나이다.

 

바라옵건데 올 한 해도 무탈산행을 이어가게끔 천지신명의 자비애를 다시 구하고

자 하며 이울러 산거북이가 사랑하는 우리 까페의 모든 회원들의 안위도 기원하나

이다.

 

더하여, 더욱 너그러운 성정과 강한 의지를 함양하기 위한 육신의 단련에 매진하는

산거북이의 소박한 열정도 응원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산과 같이 인생을 살아가는 자유인의 모습이 완성될 수 있기를 엎

드려 비나이다, 부디 천지신명이시여. 이 한 잔 술을 흠향하여 주소서~

 

    

 

 

 

쇠점골 약수

 

 

 

임도를 걷다가 산길로 붙어올라

 

 

 

 

다시 봉우리에 오르니...... 내 발길 닿지 않았던 사이 능동2봉이라 이름이 붙었다.

 

 

 

 

건너편 백운산, 운문산, 좌로 문바위

 

 

 

 

벌써 저멀리 천황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영남알프스 최초의 케이블카 승강대가 보인다.

 

 

 

 

말도 많았지만

 

 

 

기어코 공사를 완수하여 오는 3월말이면 일차 공사 완료된다.

 

 

 

덕분에 산거북이도 허리굽은 노구에 손자손녀들과 천황산에 소풍을 올 수있게 될런지 모를 일. 

 

 

 

 

하늘 위에 섬처럼 떠있는 산군들은 청도의 화악산 남산, 그리고 달성의 비슬산군이다.

이런 장면을 응시하면 언제나 가슴은 감격이고 머리에는 장중한 음율이 흐른다.

 

 

 

 

퇴락한 사자평 억새지대는 케이블카의 완공과 함께 어떤 모습으로라도 다시 생기를 찾을 것이다.

부디 천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진 말아야할텐데......(아직도 이런 쓸데없는 걱정 버릇^^)

 

 

사자평은 재약산 동쪽 사면까지 펼쳐진다. 하지만 억새지대는 10년 전보다 엄청 줄었다.

하지만 억새를 인위적으로 유지하지 않는 한,  잡목 번성은 생태계의 자연스런 복원이다. 

 

 

 

 

 

내 사랑 재약산은 어디서 보아도 멋지다.

 

 

 

 

샘물산장에서 바라본 천황산

 

 

 

샘물산장은 영업이 계속되고 있다.

안부에서 천황산 능선으로 오르는 입구표시판

 

 

 

 

 

 

 

대학친구를 만났다. 무척 오랫만이라 반가웠는데 나도 모르게 그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야~ 너 사람됐다~ 산에도 다 다니구!"

 

반가운 농담이지만 넘 지나쳤다! 그래도 성격좋은 친구는 그래그래 싱글싱글 웃기만하

고 자기 친구에게 산거북이라고 산을 잘 안다고 소개시켰다. 친구들은 재작스러워 내내

산거북이가 뭐야? 살았다는거야? 산에 있다는 거야? 산칼치처럼 웃기지 않아? 내내 궁

실랑대고 낄낄댄다. 허허 참~~~~ 남의 이름 가지고 넘 재밌게들 노시네!

 

 

 

 

저 산이 뭔고? 운문산 아잉가? 친구들의 설왕설레에 조용히 조망지도를 해주었더니

금새 태도가 달라진다. ㅎㅎㅎ 초보산꾼들이라 나이에도 불구하고 귀엽고(?) 재밌다! 

 

 

 

가지산과 중봉의 위용을 감상하지 않고 천황산에 왔다고 할 수 없으리~

 

 

 

천황산 정상 턱 아래......

 

 

 

 

 

 

흑백의 옛 시절에도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는 운명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최근에 우연히 나는 의무장교훈련 시절 일기를 뒤적이다가 오늘날 나의 산행이

결코 갑작스런 삶의 변화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였다.

   

 

 

1984년 3월 7일 수요일 맑음

 

제목 : 행군의 미학

 

오랫만에 즐긴 사유의 시간이었다. 시골길을 묵언행군을 하니 입대 후 처음 맛보는

자유로운 혼자만의 시간인 것 같았다. 영점사격도 단 3 발에 통과했기 때문에 발걸

음이 더욱 가벼웠다.

 

묵언이었지만, 나는 걸으면서 내내 오페라 춘향전의 아리아 '그리워 그리워'를 머

리 속으로 부르고 있었다. 비록 군복에 총까지 맨 몸이지만 행군은 영내 생활에서

맛볼 수 없는 낭만이 있다. 게다가 행군거리가 멀면 멀수록 뿌듯한 긍지가 생겨난

다. 이 자신과의 싸움이야말로 전투력의 근본임을 나는 일찌기 알고 있었다. 세계

사를 바꾼 전쟁의 몇몇 대목에 엄청난 행군이 뒷받침된 엄연한 역사가 있다.

 

아내와 함께 (주 : 당시 나는 결혼식을 올리고 입대했다. ) 주왕산, 속리산 팍팍한

길을 걷고 걸었을 적엔 풍성한 화제와 틱틱거리는 장난 그리고 감미로운 교감이 넘

쳤지만 오늘 나의 행군은 묵직한 침묵과 내일을 행한 의지를 다지는 군인의 절도있

는 걸음인 것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인생이란 그런 길을 끝없이 걷는 것이고 거기에 어떤 의지가

작용하는 가에 따라 삶의 색깔이 달라질 것이다. 행군의 미학이다.

 

 

 

 

 

천황산

 

 

 

 

 

재약산을 너머 더이상 진행할 수 없는 컨디션을 확인하고 천황재에서 표충사로 하산키로 결정했다. 

 

 

눈빨이 흩뿌리기 시작한다. 기온도 떨어지고 사위도 빛을 잃었다. 드디어 천지신명과의 감응이

오기 시작한 것일까. 오한과 식은 땀. 복통의 삼박자가 저돌적으로 엄습해왔다. 걸음은 거의 산

행경력에 의지한 상태였을 지경이있다.

 

 

 

 

그래도 좋아하는 풍경은 놓칠 수 없다. 이곳에서 카메라를 넣고 똑딱이만 손에 쥐었다.

배낭의 무게는 어깨뼈를 부쉬는 것만 같은 통증을 유발했지만 전신이 쑤셔오는 것 중의

일부였을 뿐 무게가 지나친 것도 아니었다. 

 

 

 

 

천황재 쉼터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하산.  

 

 

 

 

 

그날 밤새 열과 수십회 설사로 앓고 다음날 아침 겨우 월요일 근무를 하였다.

그리고 월요일 밤은 신기하게도 좋은 컨디션으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평소와 다름없는 활기찬 화요일을 맞이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