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남짓의 산행, 그리고 100산의 시작, 그 첫 산행기 - 관악의 육봉과 팔봉


반년 남짓의 산행

 

등산을 시작한지 반년이 조금 넘었다.
지난 1월말의 어느 무료한 일요일.
같은 동네에 사는 회사동료들끼리 동네뒷산(수리산)이나 가보 자며 수리산을 오른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산본에 산지가 꽤 되었지만 그 때가 수리산을 오른 것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날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중턱의 산불감시탑을 돌아 내려왔다. 하지만 그날 겨울산이 주는 감흥에 겨워, 아쉬움을 달래며 내려오던 그 산길의 추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물론 아주 산을 안 다닌 것은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치악산이며 설악산도 돌아다녔고, 지리산도 몇 번 다녀왔었다.
하지만 졸업을 하면서부터는 산에 가보지 못했다. 결혼과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더욱 말 할 것도 없고...
그러던 것이 30대 중반을 넘어선 어느 날, 동네뒷산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정말 좋았다. 눈 덮인 산이 그렇게 매력이 있는지를 몰랐다. 정상이 약450m 남짓 하는 크지 않은 산이었지만, 눈 덮인 산 속의 오솔길에서 느끼는 감흥은 고립무원의 그 어느 곳에서의 느낌이었다.
낯설고, 설레고, 흥분되고.. 그러면서 포근하고, 아늑하고...
그렇게 산이 내게 다가왔다.

20대의 젊은 시절. 설악산이며 지리산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들을 내게 가르쳐주며 그렇게 산이 다가왔다.  "이제 너도 알 때가 되었어"라고 말하듯이 그렇게...

 

매일 아침 새벽산행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아침마다 수리산을 오른 지가 벌써 7개월 째다. 매일 오르지는 못 했었어도 일주일 서너 번은 오른 것 같다. 
시작할 때는 겨울철이라 새벽어둠을 랜턴불빛에 의지하며, 수리산의 주봉 노릇을 하고 있는 태을봉에 올라 해돋이를 볼 수 있었다. 도심에서 보는 해돋이는 남다른 감흥이다. 아파트 단지와 빌딩 숲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강렬한 용틀임, 그리고 잠시 후 시샘하듯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관악산과 청계산, 바라산, 백운산... 그리고 이름 모를 산등성이들...
문득, 자연에 대한 잊었던 경외감에 놀라 나 자신을 다시금 추스리곤 했다.  도시생활의 바쁜 일상에 묻혀 까맣게 잊고 지내던 것들을 하나씩 생각하며...
그렇게 새벽산행은 시작되었다.

 

봄쯤이었을까.
시간만 나면 등산용품점을 기웃거리고, 인터넷을 뒤져 남들이 자랑스럽게 쓴 산행기를 읽으며 부러워하고, 주말에 계획된 근교산행을 소풍전날의 어린아이처럼 가슴 설레며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
이런 내게 아내는 말했다.
"이번엔 좀 오래가는 것 같네."
내 성격이 원래 좀 그랬다. 무엇이든 시작할 땐 엄청난 집념과 의욕으로 시작하고 밀어 부치는데, 오래가진 못 한다. 그 동안의 내 취미생활이 그랬다.
하지만 난 속으로 아내에게 대답한다.
"이번엔 틀려... 산은 틀리다고... 얼마나 좋은데, 난 평생 산에 다닐 거야! 당신도 같이 가면 좋은데..."

 

여름이 되면서부터 이렇게 마구잡이로 산을 다닐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매일 오르는 수리산과 몇 번이나 갔었던 관악산, 청계산들이 이렇게 좋은데, 더 좋은 산이 얼마나 많을까?
우선 100산을 목표로 하기로 했다. 산림청에서 정한 '한국의 명산, 100산'을 기준으로 하고 내가 가보고 싶은 산들을 포함해서 100산을 하기로 결정했다.
산행 회차나 성공한 산의 목록에 연연치 않기로 하고 나름대로 원칙도 세웠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다. 평생 산에 다닐 거니까.

100산을 시작하며, 매 산행 후에 산행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첫 산행인 지난 7월말의 사패, 도봉산 연계 산행은 산행기를 쓰지 못했다. 엄청난 폭우와 안개로 제대로 기록도 못했고, 계획대로 산행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관악산 산행기가 내가 남들에게 보이는 첫 산행기가 된다.

 


100산의 시작, 그 첫 산행기 - 관악의 육봉과 팔봉.

 

- 관악산 육봉능선과 팔봉능선
- 2004.08.05(목) 09:50-16:00
- 맑음
- 나홀로

 

여름휴가다. 예년보다 더 무더운 여름이라 그런지 휴가가 더 기다려졌었다.
가끔 이 휴가를 보내려고 1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암튼 가족과 함께 동해안과 강원도 계곡으로 휴가도 다녀왔고, 며칠동안 산행도 못 했더니 산에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말은 못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아내와 아이들에게 "나 산에 갔다가 올께"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가까운 관악산으로 오늘의 산행지를 정했다. 먼 곳에 갈만한 사정도 못 되고, 육봉능선 오름길의 문원폭포와 팔봉능선 하산길의 계곡이 무더운 여름날씨에는 딱 일 것 같아서였다.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한 10여분을 청사를 오른쪽으로 끼고 올라가면 육봉능선의 들머리가 나온다. 들머리에 들어서니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내내 걸어 온 아스팔트길의 숨막힘이 한결 덜해진다.

 

 
공사중인 육봉능선길의 들머리

 

들머리를 지나는데 몇 무리의 산님들이 보인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는 부부산님으로 보이시는 분들도 있고... 그 분들과는 육봉능선길 내내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다.
들머리를 지나면 개울을 징검다리로 건너야 하는 곳이 있는데, 못 보던 나무다리 공사가 한참이다. 아치형으로 운치 있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난 징검다리가 더 좋은데...
한 10여분 편한 산길을 오르는데 벌써 옷은 땀범벅이다. 원체 땀을 많이 흘리기도 하지만 오늘은 워낙 덮다. 그렇지 않아도 느린 걸음 더 천천히 걸어야겠다.

30여분만에 드디어 문원폭포에 도착했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물이 별로 없다.
2단폭포인 문원폭포와 그 주변은 평상시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도심 한복판에 이런 멋진 곳이 있음에 감탄하게 하는 그런 곳이었는데... 팔봉능선으로 하산하여 쉬고 가려던 계곡도 웬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물이 별로 없는 문원폭포. 평상시의 멋진 풍광이 아니라 조금 아쉽다.

 

문원폭포 바로 위에는 약수터와 넓다란 바위가 있다. 그곳에서 500미리 짜리 물통하나를 단숨에 비우고 약수로 보충을 했다. 아쉬운 데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는 바로 일어섰다.
문원폭포를 지나 왼편으로 개울을 건너 올라가면 이내 산불감시탑에서 육봉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와 만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과 육봉능선길의 시작이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내리쬐는 햇볕에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봉우리 위에서의 시원한 산바람을 생각하며 오름길로 발길을 내 딛는다.


 
육봉능선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판


 
이내 나타난 첫 번째 봉우리

 

첫 번째 봉우리를 오르고 나서 조금 가다보면 짧은 고정로프가 쳐진 두 번째 봉우리가 나타난다. 힘겹게 오르니 숨이 턱까지 차 오른다. 하지만 곧 폐속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올라오느라 고생했다며 반긴다. 어찌 그냥 지나치랴. 또 휴식이다. 이번엔 아예 멋진 소나무 아래에 퍼질러 앉아 얼려온 커피까지 한 잔 한다.


  
소나무 아래의 멋진 쉼터

 

 
가야할 세 번째 봉우리

 

계곡에서 올라오는 찬바람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세 번째 봉우리를 향해 오른다. 곧 아까 보다 좀 더 긴 고정로프길이 나온다. 어느 산행기에서 읽은 '내가 설치하지 않은 로프나 안전확보물은 100% 믿지는 말아라'라는 말이 생각난다. 게다가 이 길에서 작년에 로프가 끊어지는 바람에 사고가 났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암튼 이래저래 로프 옆의 틈을 잡고 기어올랐다.


 
세 번째 봉우리를 오르는 길에 있는 긴 로프길

 

겨우 올라서서 조금 가다보면 이번엔 거대한 바위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로프도 없는 길이고 위험안내판까지 위협을 하고 있다. 우회길로 지나가던 곳이었는데, 지난번 육봉능선 산행 때 만난 어느 산님의 안내로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던 곳이다. 이번에 아무도 없이 혼자인데...


 
세 번째 봉우리를 오르는 길에 있는 바위 벽

 

한참을 쉬며 바위를 노려본 끝에 코스를 확인하고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쯤에서 뒤돌아 밑을 내려보니 지난번에 못 느꼈던 공포가 순간 엄습한다. 게다가 아까부터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부부산님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다.
'쉬운 곳은 천천히, 어려운 곳은 되도록 빨리 통과'를 되 세기고, 심호흡을 한번 한 뒤 , 다시한번 코스를 확인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올랐다.


 
올라서서 내려다본 바위 벽. 조금 아찔하다.

 

바위벽을 올라서고 나서 숨을 고른 뒤, 곧 바로 세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제 멀리 육봉능선의 정상인 국기봉이 보인다.


  
가야 할 능선들. 멀리 육봉능선의 정상인 국기봉이 보인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육봉능선의 정상인 국기봉까지 한걸음에 올라섰다. 국기봉에 오르니 평일임에도 많은 산님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 더운 여름에 이곳 만한 곳이 또 어디 있으랴...


 

육봉능선 정상인 국기봉

 

관악산에는 국기봉이 정말 많다. 오를 때마다 왜 이렇게 국기봉이 많은 지 의문이다. 암튼 육봉정상의 이 국기봉은 안양쪽의 산님들이 관양동 현대아파트뒤의 들머리를 통해 자주 오르는 곳이다. 그래서 이쪽의 산님들은 이곳을 제1국기봉이라 부른다. 이곳부터 연주대까지는 주능선을 타고 약 40여분이 걸린다. 그리고 주능선을 가다보면 팔봉능선 갈라지는 곳에 또 국기봉이 하나 있는데, 이곳을 제2국기봉 혹은 구국기봉이라 부른다.

오늘은 덥기는 하지만 맑은 날씨 덕분에 조망이 좋아, 이곳에서 한참을 쉬었다. 평촌에서 산본을 거치는 멋진 전망을 오른편으로 두고, 왼편으로는 멀리 청계산에서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바라, 백운, 광교산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관양동에서 올라오는 능선길과 그 뒤로 보이는 평촌과 산본의 아파트 숲.
멀리 수리산이 보인다.


 

올라온 육봉능선과 그 뒤의 과천시내.
멀리 청계, 바라, 백운, 광교산의 능선길이 보인다.

 

한참의 휴식 끝에 팔봉능선을 향해 주능선길을 15분 가량 타다보면 팔봉능선 갈림길의 국기봉이 나온다. 많은 산님들이 관악의 백미라고 말하는 곳이다. 처음 팔봉능선을 탈때의 감흥이 새롭다. '이런 멋진 암릉을 타는 맛에 사람들이 산에 가는구나'하고 감탄했던 곳이다. 아기자기 하기도 하다가 위협적인 암릉이 나타나기도 하는 멋진 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육봉능선이 더 좋다. 짧지만 좀더 남성적이고 팔봉능선의 조망이 관악산 주능선을 향하는 능선들과 삼성산에 국한되는 것에 비해, 육봉능선에서의 조망은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넓어서이다.


 
팔봉능선 정상의 국기봉

 

  
가야할 팔봉능선길과 멀리 보이는 삼성산


 
오른편으로 보이는 주능선의 멋진 암릉길

 

팔봉능선길로 들어서면 곧 바위벽이 나오고 이곳을 넘어서면 본격적인 팔봉능선길이 시작된다. 육봉능선의 험한 봉우리를 넘어와서 인지 한걸음에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섰다.


 
팔봉능선 갈림길에서 얼마 안가면 만나는 바위벽


 
이런 멋진 봉우리도 넘고...

 

가다보니 배가 고프다. 멋진 능선길에 빠져 너무 쉬엄쉬엄 오다보니 점심 먹는 것도 잊었던 것이다. 그래 이왕 늦은 김에 맘껏 즐기자. 황금 같은 휴가의 막바지에 가족들마저 뒤로하고 온 산행인데...
왕관바위가 보이는 봉우리에 앉자 아침에 준비한 김밥과 행동식으로 배를 채우고, 배낭속에서 아껴둔 얼음물까지 몽땅 비웠다. 그리고는 남은 냉커피를 한 모금씩 음미한다. 난 산에서 마시는 커피가 정말 좋다.
한참을 쉬며 주능선을 향하는 팔봉능선, 학바위 능선들의 힘찬 기상에 흠뿍 빠져본다.


 
팔봉능선길의 왕관바위와 뒤로 보이는 학바위 능선


 
팔봉능선의 멋진 암릉길

 

점심을 먹고 너무 오래 쉬어서 인지, 가기가 싫어지고 졸음까지 밀려온다. 마지막 남은 커피로 졸음 쫓고는 일어선다. 마지막 봉우리를 넘어서 계곡으로 향한다. 계곡에 발 담구고 놀아야지...


 
이런 멋진 길도 있고... 


 
팔봉능선길의 마지막 봉우리.

 

계곡에 내려 서는데, 물소리가 들리지를 않는다. 문원폭포에서 우려했던 데로 물이 별로 없다. 조금이라도 물이 있는 곳에는 이미 먼저 오신 산님들이 자리를 잡고 계신다.
무너미 고개와 안양유원지가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물을 찾다가 포기하고 유원지쪽의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내려오다 보니 아까 한참 먼저 내려가신 할아버지 한 분이 그나마 물이 많은 곳에 자리를 펴고 앉으셔서 발까지 물에 담그고는 "젊은이가 왜 그렇게 느려" 하시며 놀리신다.
"네, 좀 늦었습니다." 웃으며 대답하고는 그 밑에 적당한 곳을 찾아 눌러 앉아 땀수건도 빨고, 웃옷도 벗어 부치고 시원한 계곡물에 몸을 맡겨본다.


 
첫 번째 쉰 계곡물

 

계곡물에 적신 웃옷이 말라들 쯤 일어서서 하산길을 재촉한다. 너무 많이 쉰 것 같다. 서둘러 내려오는데,
"이런! 아까보다 훨씬 물이 많고 시원한 곳이... 할 수 없지, 또 쉬었다 가야지 뭐..."


 
두 번째 쉰 명당자리

 

등산화도 벗고 발까지 담구고 쉬었다. 이제 웃옷이 다 말랐다. 일어서서 배낭 메고 가벼운 걸음으로 날머리를 향한다.

그런데 매번 이 코스로 하산을 하다보면 길을 잃어(?) 서울대 수목원으로 들어선다. 서울대 수목원은 원래 등산객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삼성산 쪽으로의 우회로를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매번 그 우회로를 찾지 못하고는 철망 안의 수목원으로 들어서게 된다. 남들은 우회로를 잘도 찾는데, 도대체 내 눈에는 우회로가 보이지를 않으니 할 수 없지 않나...
수목원 측에서도 입구에선 등산객을 들여보내진 않아도, 길을 잃고(?) 수목원안으로 들어온 하산길의 등산객들에겐 뭐라 하지 않는다. 그나마 고마울 따름이다.
언제 보아도 멋진 수목원길을 걸어 당당히 정문으로 나가며 오늘의 산행을 마감한다.


 
멋진 수목원 길. 가을과 겨울길이 기대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