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만에 찾아간 칠선계곡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다.

33년전

1977년 12월 30일 - 1978년 1월 3일 지리산 칠선계곡 동계등반

그 당시 칠선계곡을 오르는데 3일 걸렸다.

선녀탕 부근에 C1 , 마폭포 위에 C2,

(이렇게 지명을 써 넣지만 그 때만 해도 지명 표시도 없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죽음과 같은 고요의 계곡,

칠선계곡

  

33년만에 다시 간다.

  

2010년 5월 6일(목) - 칠선계곡 올라가기 신청

2010년 5월 7일(금) - 칠선계곡 내려가기 신청


 

5월 6일 새벽 3시 40분 길을 나섰다.

가는 비가 오락가락한다.

6시 추성리 도착

하나 둘 모여 들어 20여명이 된다.

국립공원 지리산 관리공단 가이드 4명이 나와서는...

새벽에 상부에 비가 많이 와 계곡에 물이 너무 불어 올라가기를 할 수 없단다.

날이 맑아지면 내일 내려오기는 가능하단다.

어쩔 수 없다.

백무동으로 올라가 장터목에서 자고

내일 내려오기를 할 수 밖에 없다.

  


2010년 5월 6일(목)

백무동 - 장터목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길



봄의 계곡



짙은 안개 그리고 비

 

2010년 5월 7일(금)

장터목 - 천왕봉 - 칠선계곡 - 추성동

맑게 갠 하늘 지리산 능선이 저 멀리까지 뻗어 있다.

  

* 아래에 있는 흑백자료들은 1972년판 원로 산악인 손경석옹의 저서 '지리산'에 들어 있는 것임 *

 

  천왕봉 옛 정상석

  

1978년 1월 2일 칠선계곡 3일만에 정상에 선 대원들(비브람에 오버 트라우즈...)



국립공원 지리산 관리공단 가이드가 문을 열고 드디어 내려가기가 시작된다.

(올라가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놈의 날씨가 받쳐주지 않으니...)


 칠선계곡 9.7km 이제 내려간다. 저 멀리 보이는 추성동 마을까지

  

 

 천왕봉에서 내려다 본 칠선계곡

  


 칠선계곡 개념도 (1972년판 지도)

(지도속에 있는 소요시간은 모르는 상태에서 잡은 소요시간으로 실제 걸린 시간이 아님.)

(77년 당시에는 버스가 마천까지만 들어가  마천-추성동까지는 걸어야만 했음



중봉쪽

  



내려가기가 바로 시작되는 철계단에서 바라 본 천왕봉 정상 쪽

(33년전인 77년 당시에는 이 사다리 구조물은 없었음)



6시 51분 해는 밝게 빛나고 하늘은 맑다. 정상 부근에는 간밤에 날이 추워져 얼음이 얼었다.



가파른 상단부, 동계에 눈 덮힌 저 곳을 어떻게 올라갔지?



여행자 보험이 없는 두 신청자를 못 내려오게 하고 뒤 따라 늦게 내려오고 있는 공단 가이드(총 4명의 가이드가 앞, 뒤, 중간에 있음)



정상쪽을 바라 보며



내려오며 바라 본 제석봉 쪽, 파란 하늘이 반갑다.



주목

  

선녀탕부근 C1에서 하루 종일 올라와 마폭포 위 주목 아래 어딘가에 눈을 다지고 설치한

C2 동계 윔퍼텐트 지친 대원들, 꼼짝하기 싫었다.

(뒤에 보이는 것은 온도계로 안과 밖 두 군데 설치하여 온도를 재었음)

78년 1월 1일 마폭포 위 주목이 있는 아래 부근에 C2를 친 기억이 나는데

어딘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대충 짐작만...



마폭포 - 77년 그 당시에는 지도상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 무슨 폭포인지도 몰랐음



마폭포 오른쪽 - 마폭포 오른쪽으로 돌아 급사면을 기어 올라가 주목 부근의 눈 덮힌 사면에 눈을 다지고 C2를 설치함



칠선계곡은 이제 봄이 온다.



진달래도 이제 피고



삼층폭포의 힘찬 물소리 - 그 당시에는 무슨 폭포인지도 몰랐음



  



대륙폭포, 주 계곡에서 하봉쪽 계곡으로 들어가 있음( 33년전 그당시에 이 폭포를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음)



칠선폭포

  

 

 칠선폭포



  



  



비선담 위 다리


 비선담

 

비선담의 옛 모습



 옥녀탕

 

 옥녀탕의 옛 모습



선녀탕



 선녀탕

이 부근 어딘가에 C1을 쳤습니다. 계곡을 건너기 전...


  두지터 마을 앞 밭에 핀 꽃

  

두지터에서 추성동 내려가는 고개길에서 바라 본 칠선계곡 하단부


 

같은 지점, 60-70년대 (그 당시에도 두지터로 가는 자그마한 소로가 있었음)



그렇게도 가파르게 느껴졌던 추성동에서 두지터 올라가는 길, 예전에는 자그마한 소로였음


 추성동, 60-70년대에는 몇채의 초가집만 있었음 - 전형적인 오지 마을

  

  마천의 현재 모습

  

 60- 70년대 마천의 모습,

당시에는 버스가 마천까지밖에 들어가지 않아 여기서부터 추성동까지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4km나 걸어야 했음

  

날씨 때문에 비록 올라가기는 못했지만

내려오기를 통해 옛날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었습니다.

2027년까지 통제라니

이제 동계등반은 살아 생전에 힘들겠지요...

  

  

  

1970년대 초, 중반의 동계등반

  

특히 부산, 울산 지방에서는 겨울에 등산 간다면

얼어 죽을려나며 미쳤다고 할 때입니다.

사실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70년대 초, 일요일 부산역 앞에 가면 모자와 조끼에

관광지 뱃지를 잔뜩 붙인 등산객들이 운동화 농구화 또는 군화등을 신고

등산을 간다고 할 때입니다.

그것도 봄, 여름 가을에만 다녔고 정상을 오른다기 보다는

경치 좋은 계곡이나 능선에 앉아 즐기는 편이었습니다.

  

겨울에 영남 알프스(가지,신불,영취등)를 가면 적막입니다.

사람 그림자를 찾아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일요일에도...

  

영남에서 접근하기 쉬운 소백산, 겨울 동계등반을 가면

일요일에도 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 10-20명 정도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소백산 겨울 동계등반 일요일에 가면 줄서서 비로봉을 올라야 합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아주 황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비로봉에서 국망봉쪽은 거의 접근을 하지 않을 때,

일요일 둘이서 희방폭포에서 연화봉, 비로봉을 거쳐 국망봉을 럿셀하며 갔다가

초암사로 내려갈 때 4-5시경 초암사 거의 다와서

경찰관 3명으로 부터 검문을 당했습니다.

이 겨울에 눈덮힌 산에서 이 시간에 내려오니 수상하다고

신분증과 회사 사원증을 다 확인하고 검문일지에

상세한 인적사항과 여기에 온 목적등을 기록하였습니다.

오후 늦은 시간에 산에서 내려오니 수상하다는 겁니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초암사에서  비브람을 신은 무거운 발을 이끌고

버스 노선도 없는 비포장 길을 순흥까지 컴컴해진 길을 걸어 가서

거기서 풍기 가는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동계 등산화

 

그 당시 동계 등반이 가장 될 수 없었던 요인중의 하나가 등산화 였습니다.

70년대 초, 중반 당시 국내에서 비브람을 제작하는 곳은 RF(레드 훼이스)와

송림제화였으며 주문 제작이었습니다.

  

울산서는 주문하는 곳도 없어 부산까지 가야 했고 부산서 발 그림을 그려

서울로 올려 보내면 제작해서 내려 보내주었습니다.

  

비브람 1켤레 가격이 25,000원 정도로 당시 고졸 봉급 4-5만원나

부산대 의대 등록금 8만원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가격으로

감히 이 거금을 투자해서 비브람을 맞춰 신고

겨울 등반을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35년된 동계 비브람 등산화(1975년 주문 제작) 

 동계등반이 일반화 되지 않았던 1970년대 중반,

거금 25,000원 정도를 주고(당시 고졸 봉급이 4-5만원, 부산대 의대 등록금 8만원)

서울 (RF)레드페이스로 주문해서 제작한 동계 비브람 등산화.

 

  

무게가 무려 2.5-2.7kg으로 처음 신으면 발걸음이 잘 옮겨지지 않아

상체는 앞으로 나가는데 발은 저 뒤에 따라오는 느낌이 날 정도로 무거웠음.

   ( 지금의 고어텍스 중등산화 캠프라인 블랙스톰 GTX가 675g 이니 4배 정도 무겁습니다.)

  

고어텍스 등산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산에 신고 다녔습니다.

  

  

  -겨울산 갈 때마다 왁스를 입혀 방수처리를 했으니 왁스가 엄청 입혀진 것입니다.-

                             지금의 고어텍스처럼 저절로 방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왁스를 주기적으로 발라주고 불에쬐어 왁스가 가죽에 스며들어야 제대로 방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여년 전에 창 갈이를 했고 아직 신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