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지산(岷周之山, 1241m) 산행 Photo 에세이
(2008. 9. 4/ 충북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한천주차장- 황룡사입구- 민주지산
지름길- 쪽새골갈림길-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 한천주차장/고양 한뫼산악회 Tel 016-372-2267 매월 첫주 화요일 출발)
 
*. 물한계곡(勿閑溪谷)인가, 물한계곡[水寒溪谷]인가
민주지산 가는 길에는 4 가지 코스가 있다.
‘영동군 상촌리 물한계곡,용화면 조동리,무주군 설천면 대불리, 김천시 부황면 해인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에 가장 인기 있는 길은 물한리계곡에서부터가 주 코스다. 교통이 편하고 정상까지 경사도 완만하고 물한리 계곡의 경치가 뛰어난데다가 넉넉잡고 6시간만 투자하면 민주지산(1,241m)에다가 석기봉(1,230m)과 이 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삼도봉(1,174m)까지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쪽에 있는 각호봉(角虎峰, 1,176m)을 갈 수 없는 것이 흠이다.

  등산이 막 시작되는 11시경 반갑지 않은 비가 또 내리고 있다. ‘오전에만 비가 온다는 수도권의 일기예보만 보고 영동지방의 예보에 소홀하였구나' 하고 우장 준비를 소홀히 한 것을 탓하고 있지만 이제와서 그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천주차장에서 조금 올라오니 좌측 다리 건너가 황룡사 입구인데 대웅전 지붕을 텐트 조각으로 둘러 싼 것을 보니 비가 새는 모양이다. 이 절은 1972년에 지은 절인데다가 이 부근은 두메 산골이어서 신도가 적은 모양이다. 
오늘도 가장 후미에서 여기 저기를 카메라에 기록하느라 나 홀로 떨어져서 산행하다 보니 시간에도 쫓기어서 고찰(古刹)이 아닌 것을 핑계 삼아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 귀가 길에 차속에서 비로소 후회하였다. -대웅전 뜰에 장군바위라는 둘레 5m, 높이 2m의 비슷한 크기의 3개의 바위가 있다. 옛날에 한 장군이 있어 이 바위를 뛰어넘으며 무술을 연마하였다 하여 이 주위의 물한계곡을 '뛰엄박골'이라고도 한다는데 그걸 못보고 왔기 때문이다. 그래 산행을 하다보면 개울을 서너 번 건너야 하는데 그 때마다 커다란 바위로 된 징검다리를 몇 번이고 뛰어넘으며 건너야 하는 것이 민주지산 가는 길이다.
-왜 이 계곡이 이름도 생소한 물한계곡(勿閑溪谷)이라고 불렀을까? 아니 ‘勿(물)’, 한가 ‘할 閑(한)’, 그러니까 한가하지 않은 계곡이란 말인데, 깊고 가파른 계곡의 흐르는 물이어서 사람이 이곳에 이르면 그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한가롭지 않다는 말일 게다.
이 물은 아무리 한여름이라도 발을 담글 수 없도록 물[水]이 차서[寒], 물한계곡[水寒溪谷]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비가 오고 있는 중이라서인가.‘물 색깔이 원래 흰가?’ 할 정도로 하얀 물줄기가 장엄한 소리를 내며 우렁차게 흐르고 있다. 이 물은 상류 미니미골에서는 미니미폭포를 이루다가 내려오면서 음주암폭포, 의용암폭포, 옥소폭포로 물한계곡의 절경을 이루며 길고 하얗게 흐르고 있다.

옥소폭포를 '기우제(祈雨祭)폭포'라고도 하는데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통일신라시대 가뭄이 심할 때에 황간 현감이 이 옥소폭포에서 기우제를 지내어 가뭄을 이겨냈다. 그 후에 이 상촌지방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을 때였다. 이 옥소폭포에서 면장이 농민들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려고 하였더니 지내기도 전에 후드득 후드득 내리기 시작한 비가 장대비로 변하더란다.
그 후로는 마을에서 큰 고목이나 큰 바위에서 지내던 기우제를 아예 이 옥소바위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전설 어린 유서 깊은 옥소폭포가 어디인가. 
이정표에도 없었다. 계곡수를 보호한다고 형무소처럼 높게 흉측한 철조망(펜스)를 드리워 가두어 놓아서 오히려 그 경관을 해치고 있다. 그 담을 좀 낮추어 미적인 면을 고려할 수는 없는 것인가. 'ㄷ'자 형으로 도중도중 전망대를 만들어 아름다운 물한계곡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사진 한 장이라도 찍게 할 수는 없는 것인가. 게다가 이곳 모든 폭포에는 이름 하나 써 붙여 놓지 않아서 내려와서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야 건성지나친 곳을 아까와 하게 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정표는 올라가는 이들만을 위해 만들어 놓고 하산하는 사람에게는 전연 배려가 없었다.

*.민주지산(岷周之山)으로 가는 길
 -민주지산은 그 이름 때문에 여러 가지로 말이 많은 산이다.
3자 산 이름이 일반적인데 왜 이 산만이 4자냐? 그 한자로 ' 珉周(민주)로 쓰느냐, 眠主(면주)냐, 眠周(면주)냐, 아니면 민주(民主)가 아니냐?' 등등으로 설왕설래하고 있다.
그걸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현재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이다. 과거가 만든 것이요,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는 지나간 현재요, 미래는 다가올 현재라면, 현재는 다가온 현재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이름은 민주지산(岷周之山)이다. 산 이름 '岷(민)', 두루 '周(주)'다.
그러니까 민주지산(岷周之山)이란 이름은 주위에 산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면 된다.
'之(지)' 자는 왜 부쳤는가 하면 서울 사대문 중에 동대문만 유독 '興仁之門(흥인지문)' 넉 자인 것은 '之(지)'의 글자 모양이 산맥과 같아서 동궁(東宮, 長子)에 해당된다는 낙산(洛山)이 너무 낮아서 '之' 자를 넣어 기(氣)를 보충한다고 해서였다지만, 여기서는 주위에 그런 산이 산맥 같이 많았기 때문에 흥인지문('興仁之門)처럼 산맥 같은 '之(지)'자를 붙인 말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는가.

비가 오고 있어서 우리 산악회는 두 구릅으로 나누어 등산을 한다.
왕복 네 시간  내외의 삼도봉 코스와 민주지산으로 해서 석기봉, 삼도봉의 5시간 코스였다.
하늘을 찌르듯이 높이 솟아 있는 잣나무숲길이 시작되는 곳이 3거리 갈림길이었다.
좌측으로 가면 삼도봉으로 가다가 그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석기봉을 갈 수도 있는 비교적 쉬운 길이요, 우측으로는 '민주지산 지름길'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민주지산 길로 들어섰다. 여기 저기 사진을 찍다 보니 우리 산악회 후미와도 한 20분 떨어진 위치였다.

*. 코피가 난다, 그 무서운 코피가
  그런데 큰일 났다. 갑자기 코피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가장 무엇보다 두려워해 오던 코피다. 나는 코피와 연관된 아픈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아내의 생일에 가족과 모여 회식을 하며 코를 '휑하게-'하고 풀었더니 코피가 나왔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솜을 얻어 코를 막아 놓았어도 그 피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더니 목구멍으로 커다란 선지 같은 덩어리 피가 나오지 않는가.
겁이 덜컥 나서 찾은 것이 백혈병으로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여의도 성모병원이었고 그 길로 그 무서운 백혈병 무균병실(無菌病室)에 입원하게 되었다. 아내는 밤새도록 눈시울이 퉁퉁 붓도록 울며 아내가 믿는 부처님께 기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박박 같은 환우 8명 입원하여 있는 무균병실은 간병인 하나 외에는 아무도 면회 올 수 없는 위생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여야 할 중환자실이었다.
며칠 걸러 퇴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족과 가까운 친지와 마지막 작별을 위한 퇴원이었다. 그분들이 퇴원하면 곧 다른 백혈병 환자로 그 자리는 메워지곤 했다. 그 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병상일기'를 노트북에 열심히 쓰는 것이 당시 나의 하루하루의 일과였다.
 -백혈병은 암(癌) 중에도 가장 무서운 암이다. 그 백혈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어디에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몸의 군데군데 멍이 커다란 자리를 잡고 생기면 그것이 첫 증상이다.
우리의 핏속에는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여 주는 액체인 적혈구(赤血球)가 있고, 세균을 잡아먹고 면역에도 관계하는 무색의 백혈구(白血球)가 있다. 또 혈소판(血小板)이라는 게 있어 피를 엉기게 하는 '피티'라는 널빤지모양의 작은 물체가 있다. 그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이 혈장(血漿)이라는 투명한 담황색의 액체에 섞여 있다.
그런데 세균을 잡아먹어야 하는 백혈구가 이상이 생겨서 너무 수치가 많아져 오히려 핏속의 적혈구와 혈소판을 잡아먹는 병이 암(癌) 중에 왕이라는 백혈병이다.
이 병은 돈만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그 치료를 위해서는 젊고 건강한 사람의 피[혈소판]을 필요로 하는 집안을 망하게 하는 큰 병이다.
그런 와중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내가 만약 퇴원을 하게 된다면 그 좋아하는 술은 물론 끊을 것이다. 아침마다 일산의 호수공원을 뛰면서 몸을 위하며 살 것이고. 그리고 더 많은 나의 장점을 하루하루 만들어 나아가며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그런 내가 50년 전에 21세가 되는 이 나이에 들어서도 목숨을 걸고 술을 마시고 있으며 이렇게 높은 산을 오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인가. 
지금도 코피가 나면 그때 그 악몽이 되살아나서 만사를 제치고 병원으로 달려가서 혈소판 검사를 받아 왔는데 오늘 등산 중에 코피가 나는 것이다.
집을 나설 때 아내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여보, 실크로드(Silk Road) 출발이 4일 남았으니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냥 뒤돌아설까 하면서도 산에 대한 욕심이 민주지산의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민주지산 정상만 갔다가 뒤돌아서지 뭘-.'
코피가 날 때에 가장 상책은 안정이요, 코피가 나오는 쪽을 꼭 눌러두고 한 동안 있을 일이다. 그러면 그 고마운 혈소판이 피를 응고시켜 준다.

*. 우중의 등산
물한계곡은 요란한 계류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판초를 입고 산을 오르지만 가을 비가 오고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울창한 잣나무 숲이 시원하게 하늘을 가려 주고 있었다.

그 숲을 지나니 작은 잡목이 열병식 하듯 양쪽에서 터널을 만들어 우산처럼 비를 막아 준다. 
길은 정상까지 완만한 오름길로 너덜겅이지만 작은 돌길이라서 그리 힘들지가 않았고 그래서 질지도 않았다. 그 돌길 위로  시내처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쪽새골로 들어서서 징검다리로 개울을 몇 번 건넜지만 그 소리가 그쳐야 정상이 가까울 터인데 여울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개울가에 앉아 행동식을 먹는다. 오늘 나의 점심은 누룽지 행동식이다. 그래야 앞서간 사람이 점심 식사하는 동안만이라도 조금이라도 따라 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우산이 되어 주던 나무 숲 터널이 모자를 벗듯 벗겨지더니 정상 1km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다.
등산 중에 가장 반가운 것 중에 하나가 땀 흘려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능선이다. 대개의 경우 능선부터는 전망이 있고 그 길이 평탄한 법이다. 드디어 나는 그 쪽새골갈림길 능선에 서게 된 것이다.
황룡사에서 3.2km지점이요, 민주지산은 400m가 남은 곳이었다. 
 잘 다듬어진 통나무 층계를 오른 후 로프가 있는 오름길을 지나니 거기가 바로 정상인데 안타깝게도 운무에 가려 5m 이상이 안 보인다.

정상에 올라서니 안개가 전부이네.
푸른 하늘 속에도 별들이 반짝이니
안개 속
흐르는 산파(山波)나
마음속에 담아 가자.



민주지산은 남북으로 각호산과 삼도봉을 양 날개로 하여 펼쳐 서 있다. 그 중 삼도봉이 백두대간 상에 있는 봉이다. 민주지산 그 오석의 정상석에 '해발 1,241m'과 함께 '←2.9km 석기봉2.9km/ 각호산 3.4km→' 음각 되어 있다.
각호산(角虎山, 1,176m)은 도마령[고자리재, 843m]에서 산불감시초소를 통해 오르는 산으로, 옛날 이 산에 뿔이 둘 달린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로 인하여 생긴 이름이다. 그 이름처럼 정상을 멀리서 보면 'M'자 형의 두개의 암봉이 보이는 산이다.
다시 쪽새골 갈림길로 내려와서 보니 대구에서 온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점심도 못 먹고 부지런히 따라 왔는데 일행은 벌써 휑하게- 가버린 모양이다. 길 위에는 "한뫼산악회☞" 라는 먼저 간 산우(山友)들의 흔적이 있다.

신과
인간의
사이 지켜 우뚝 서서
산은
한국의 산은
꽃밭으로 눈을
녹음으로 몸을
단풍과 흰 눈으로 마음을
언제나 새롭게
설레며
찾아들게 하더니

이제는
삶의 목적이 되어
생활의 전부가 되어
취미와 등산의 경지를 넘어
종교 같은 깊은 사랑이 되어
산 있어야 사는 사람들
산이 없으면 못사는 사람들
산 그대로가 행복인
아아,
'산하사랑‘ 사람들'


시계를 보니 부지런히 가기만 하면 석기봉까지 가서 하산하기에 넉넉할 것 같아서 발에 속도를 붙였다. 조심스럽게 코를 만져 보았더니 고맙게도 코피도 그쳐 있었다.

*. 석기봉의 삼두마애석불(三頭磨崖石佛)
  석기봉으로 향하여 난 능선 길은 지금까지 오름길의 너덜겅을 버리고 푹신한 흙길이 되었는데 빗물이 도중도중 빗물이 고여서 질퍽거리는 진흙탕 길이었지만 계속 내리막길이고 추위를 느낄 정도로 몸이 젖어있어서 판초를 입고도 덥지는 않았다. 그렇게 달리듯이 달려갔지만 남들은 한 시간이면 삼도봉까지 간다는데 1시간이 지나서야 길을 턱 막아서는 석기봉 아래에 이르렀다.  가파른 바위로 어지럽게 굵은 밧줄이 매어 느러져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석기봉인데 먼저 간 우리 산악회의 표지는 '석기봉 돌아가는 길' 방향으로 놓여있다. 그 표지를 따라 산을 빙 돌아가면서 얼마나 후회를 하였던지-. 아무래도 이 길은 석기봉을 지나치는 길 같아서였다.

그러다 마주친 것이 샘물이었다. 천정 바위에서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고인 약수물탕이었는데 수량도 많고 시원하였다. 이 샘은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 한다. 그 앞에는 20 여 평 되는 공터가 있고 큰 바위 밑에 제단이 있어서 예로부터 하늘과 산신에게 비는 기도처였던 모양이다.
거기 서 있는 안내 설명을 읽을 시간도 없어서 사진으로 대신하고 가려다 다시 한 번 보았더니 '일신삼신상(一身三神像)'이란 마애석불이 있다고 쓰여 있지 않은가. 그냥 지나쳤다면 크게 후회할 번한 일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샘물 위로 뻗은 바위에 삼신상(三神像)이 있다. 
석기봉 서남쪽 50m 바로 아래였다. 이 마애석불은 높이 6m,폭 2m로 60도로 비스듬하게 경사진 암벽에 새긴 백제 때 혹은 고려 때 만들어졌다는 마애석불이다. 이 석불의 특이한 점은 몸은 하나인데 천(天), 지(地), 인(人)을 상징한다는 머리 셋이 있는 점이다, 그리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모습이 왼쪽 발가락이 오른쪽 정강이 밑으로 튀어나와 있는 특이한 자세다.
산행하기 전에 늘 사전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오는 나였지만, 며칠 후면 떠날 중국의 실크로드(Silk Road)에 정신이 팔려서 오늘도 새벽 1시에 일어나서도 5시까지 우루무치, 투루판, 둔황의 자료 수집을 하느라고 민주지산은 준비 없이 그냥 따라 온 것이 불찰이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고려시대 이전의 마애석불을 1,191m 높이에서 만났으니 그 놀랍고 황홀함이 어떠하였겠는가. 환호작약(歡呼雀躍)하면서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나 뒤돌아보다가 석기봉을 향하였다.
삼도봉은 몇 년 전에 다녀와서 산행기까지 남긴 곳이라서 생략하고 이제는 서둘러 내려갈 시간이로구나 하면서 물한리계곡으로 빠지는 길을 찾았으나 삼도봉으로 가는 표지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왼쪽으로 밧줄 드리운 높은 바위 봉이 있다. 석기봉이었다.
석기봉(石奇峰,1,230m)은 그 봉의 모습이 쌀겨처럼 생겼다 하여 '쌀겨봉'이라고도 하지만, 암석이 옹기종기 쌓여 마치 송곳니처럼 솟은 봉우리가 ‘기이한 돌로 된 봉우리’ 같다 하여 석기봉(石奇峰)이라 이른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홀로 비를 맞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밧줄을 부여잡고라도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에 쫓겨 하산 길을 찾다 보니 저 아래 커다란 이정표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물한리계곡으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없었다.





하릴없이 삼도봉 쪽으로 달리다 싶이 걷다 보니 비로소 나타나는 물한리계곡 하산 길, 그런데 이정표가 지워져 있어 잘 안 보이지만 600여 m만 더 가면 삼도봉인 것 같다.
몇 년 전 카메라를 잊고 와서 사진 없는 삼도봉 산행기를 쓰고 아쉬워하던 기억이 난다. 그 욕심에 팔려서인가. 발길은 저절로 삼도봉을 향하고 있었다.
드디어 헬기장이 나타나고 이어 3도(三道)의 멋진 삼도대화합(三道大和合)의 기념탑이 보인다. 지금까지 고소원 하던 삼도탑(三道塔)의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하루요, 그래서 원을 푼 셈이지만 지금은 늦은 4시이니 우리 산악회에서 주어진 시간은 5시까지인데, 이 삼도봉에서 황룡사까지가 4.4km나 되니 무슨 재주로 시간을 맞출 수 있단 말인가. 앞서 간 사람들이 좀 늦게 가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오늘도 우리 산악회의 많은 분들이 나로 인하여 귀가길이 늦게 생겼으니 이를 어떻게 하여야겠는가. 아아, 아아!
이하는 4년 전인 2003년 9월 2일에 아내와 함께 쓴 나의 '삼도봉 산행기'의 일부다.

*. 정상석(頂上石) 삼도봉 화합기념 탑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1,174m의 정상. 여기가 충북, 경북, 전북의 경계선이라는 삼도봉(三道峰)이다. 드디어 아내도 옛날의 등산 실력을 되살려 정상에 선 것이다.
그런데 저건 뭔가. 정상석(頂上石)이 상식을 넘는 호화로운 모습으로 서있지 않은가. 중국의 어느 산에 올라온 것 같이 이국적 모습이었다.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국의 아픔을 살면서도, 또 다시 경상도로 전라도로 동서를 갈라놓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살고 있는 그 동안 우리 민족의 현실적인 아픔을 고쳐 보자고 영동, 무주, 금릉(김천)의 군수가 지역 주민들과 뜻을 모아 지역감정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세워 놓은 삼도화합기념탑이었다.
3 도(道)를 향한 세 마리 거북조각 기단부 위에 역시 대리석으로 용 세 마리가 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든 여의주 원구(圓球)를 떠받치고 있다.
영원과 길상을 상징하는 거북이 위에 용으로 표현된 삼도(三道)가 희망의 해와 달을 떠받치며 지역간의 화합을 다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탑은 안병찬 화백이 도안하여 제작한 것을 육군 제 5019부대가 헬기를 지원하여 1989년 완공한 것이다.
매년 10월 10일이 되면 충북의 영동, 경북의 금천시, 전북의 무주 군수들과 그 주민들이 이 탑 앞에서 우리의 하나임을 위한 만남의 장을 이렇게 갖는다니 이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들의 불행했던 과거를 인정하는 탑이고 보니, 난생처음 찾아와서도 운무밖에 볼 수 없는 우리들의 마음처럼 서글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