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 남한산성 성곽따라 한바퀴  4봉우리 20성문(4대문 16암문) 6옹성 답사기

 

청량산봉우리의 수어장대 

 

현황

   ○이름 남한산 도립공원

   ○높이  515m (주봉 벌봉)

   ○위치  송파구,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

   ○특징  산의 사방이 평지이다. 수림에 둘러싸인 구릉지이다.

   ○지형

남한산은 벌봉(515m 봉암), 청량산(482m 남한산), 검단산(538m 남격대) 3개의 봉우리로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있다

성곽의 중심이 서쪽끝의 청량산에서 동쪽끝의 벌봉까지 해발 300m의 낮은 분지를 이루는 요새지이다

북동쪽으로 금암산을 지나 이성산(二聖山 209m 이성산성)과 궁마을의 객산(客山 292m)이 있고, 동쪽으로 중부고속도로 중부1터널위를 지나 하남시의 검단산(685m)이 있다

동남쪽 광지원 방향에서 동문에 오르는 길은 평평하고 완만한 계곡길이며, 서남쪽 성남시 방향에서 남문에 오르는 길은 가팔은 계곡길을 이루고 있다. 북서쪽 서울시 송파구 마천동에서 하남시 학암동을 거쳐 서문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한 계곡길이다. 북동쪽 하남시 교산동에서 법화골을 거쳐 북문으로 오는길은 완만한 계곡길이다.

   ○유래

남한산은 백제 건국 당시 현재의 서울지방을 가리키는 한산(漢山)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는 한산을 중심으로 북쪽 인근산을 북한산, 남쪽 인근산을 남한산이라 하였다. 그후 도성의 방위체제로 산성을 구축함에 따라 북한산성(北漢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이라는 성곽이 위치한 산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남한산은 북한산과 더불어 서울을 수호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남한산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도읍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신라 문무왕4년(664년)에 한산주(漢山州, 한주漢州)로, 고려 태조(왕건 재위 918∼943) 23년(942) 이후부터 광주(廣州)라 불렀다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중의 하나

남한산성은 백제시조 온조왕(溫祚王 재위 BC18∼AD28)의 성터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세력을 겨루는 무대가 되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 재위 394-491)때인 475년에는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24대왕 재위 540∼576) 14년(553년)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제30대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 12년(672) 한산(남한산)에 토성을 축성하고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日長城)이라 하였다.

고려 제23대 고종(재위 1213~1259) 18년(1231) 두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입을 광주성(남한산성)에서 격퇴하였다.

현재의 남한산성은 임진왜란(1592년-1598년)을 겪은후 조선 제16대 인조(재위1623-1649) 2년(1624)에 후금(後金 뒤의 淸)의 위협이 심해지면서 백제, 신라때 축성된 토성의 옛터를 따라 석성으로 축성(築城)하였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1936-1937)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원병이 오지 않고 식량부족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45일만에 삼전도(三田渡)로 나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였다(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비)

병자호란(1636년∼1637년)후 제19대 숙종(재위 1674∼1720)은 1686년(숙종12년)에 봉암성을, 1693년(숙종19년)에 한봉성을, 1719년(숙종45년)에 신남성을 쌓았다. 영조28년(1752)에 신남성에 양돈대를 쌓았다

을미사변(1895년 고종32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閔妃) 시해사건)이후 1896년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나면서 남한산성은 경기의병의 근거지가 되었다.

남한산성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불려졌다

  ○형태

남한산성은 동으로는 벌봉(515m 봉암), 서로는 청량산(482m 남한산)을 최고봉으로 하여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축조한 본성과 외성의 석축산성이다

본성은 원성(4장대 4문 16암문), 5옹성(1,2,3남옹성, 장경사신지옹성, 연주봉옹성,)이 있다

4장대는 동·서·남·북 각 방면을 조망하고 지휘할 수 있는 4곳에 설치되었고 후에 봉암성의 외동장대가 설치되어 장대가 모두 다섯 곳이었다.

4문은 방향에 따라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다.

16암문은 본성11암문, 봉암성4암문, 한봉성1암문이며, 본성11암문은 남쪽5개, 동쪽2개, 북쪽3개, 서쪽1개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8개소에 29개의 포루가 있다 (1남옹성에 8개, 2남옹성에 9개, 3남옹성에 5개, 장경사 옹성위 본성에 2개, 장경사신지옹성에 2개, 연주봉옹성에1개, 봉암성옹성에 2개 등이다.

성내에는 125군포, 45지당(샘), 80정호(우물), 8수대가 있고 행궁, 종묘, 사직, 관아, 재옥, 객사, 종각등이 있었다.

원성(본성)은 인조 2년(1624)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본성을 의미한다.

원성의 전체 둘레는 7.55Km이다.

외성은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는데, 봉암성에는 봉암성옹성이 신남성에는 동, 서 두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성곽의 전체 둘레는 11.76Km이다. 
  ○답사일 2007.8.3. 8.20. 8.24.

 

○본성

본성은 남문과 북장대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성과 서북성으로 구분되며, 청량산을 정점으로 남북으로 뻗은 줄기의 여맥이 동서로 길게 뻗어나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본성 서북성

남한산성의 정상인 청량산(482m 남한산) 봉우리에 ★수어장대가 있다

★수어장대

★수어장대(守禦將臺 서장대西將臺) 경기유형문화재 제1호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동서남북 4장대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장대(西將臺)로서 병자호란 때 인조가 직접 이곳에서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때 단층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부르던 것을, 영조 27년(1751)에 2층 누각을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 바깥쪽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이름하였다. 안쪽을 무망루라 한 것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국하여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孝宗 조선 제17대왕 재위1649∼1659)의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애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내린 것이라 한다.

 

수어장대 동쪽에는 무망루전각이 있다

★무망루전각안의 무망루 현판 

★무망루

무망루는 서장대 2층 문루 이름으로, 현판은 2층 안쪽에 걸려 있던 것을 1989년 수어장대 옆에 전각을 지어 따로 보존하고 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땅에 조아려야 했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과 효종이 청나라에 끌려가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있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하였으나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실을 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무망루옆에는 이승만전대통령이 기념식수한 71년된 전나무가 있다.

 

수어장대 동남쪽에는 ★매바위가 있고, 서쪽옆에는 ★청량당이 있고, 청량당앞에는 360년된 향나무가 있다

★매바위

★매바위 전설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광주유수 이서(李曙)는 축성공사를 두 구간으로 나누어, 동·남쪽은 부하인 이회에게 맡기고, 서·북쪽은 승 벽암에게 각각 분담시켰다.

이회는 그날부터 오로지 성 쌓는 일에만 몰두하여 돌 하나 흙 한 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寢食)을 잊다시피 하였다. 그 과정에서 축성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자기의 사재(私財)까지 전부 던졌으나, 준공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해서 공사가 늦어지고 있었다. 반면 벽암의 공사는 착착 진행되어서 기일 안에 준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가(官家)에서 받은 공사비 중 남은 금액까지도 반납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회는 공사를 게을리 한다는 모함을 듣게 되었다. 관가에서는 이를 사실로 믿어 서장대에서 이회를 참수형(斬首刑)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 피 흐르는 목에서 매 한 마리가 나와서 이회의 시체를 돌고, 장대 근처 바위 위에 앉아 매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을 본 군중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로 쫓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조사해 본 결과 벽암이 쌓은 성은 한 군데도 정성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회가 쌓은 성은 매우 견고하였다고 한다. 이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관가에서는 서장대 근처에 사당을 짓고 '청량당(淸凉堂)'이라 현판(懸板)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매가 앉았다가 발자국을 남긴 서장대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청량당

★청량당(淸凉堂) 

산성 축조 때 동남쪽 축성을 맡아 정성을 다해 튼튼한 성을 쌓느라 기일을 지키지 못해 공사비 착복과 근무태만이란 누명을 쓰고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당한 이회(李晦)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지은 것이다.

청량당은 청량산 정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남한산성 수축 당시 서북성을 쌓았던 벽암(碧岩)대사 각성과 이회의 부인 영정도 모셔져 있다.

 

수어장대 서쪽옆에는 대한제국말기에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표석이 있다

★탁지부측량소삼각점 

대한제국말기에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표석이다

 

수어장대 서쪽 언덕에는 ★돌원탁이, 원탁옆은 암문치, 그밑에는 ★수어장대암문(6암문)이 있다

★돌원탁

돌원탁옆 암문치(언덕)

★수어장대암문(6암문) 안에서

6암문 밖에서

 

청량산에서 북쪽능선으로 내려서면 능선밑에는 왕이 마셨다는 ★어정약수가 있다

★어정약수

 

어정약수에서 동쪽의 나지막한 능선으로 내려가면 ★아래어정약수터 ★숭열전 ★침괘정 ★행궁 ★종각터가 차례로 있다

★아래어정약수터 

★숭열전 

 

★숭렬전 (崇烈殿  온조왕 사당, 온조전)

백제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모신 제전(祭殿) 사당이다

이곳에는 인조 때 축성 총책임자인 이서(李曙)의 신주도 배향되어 있다. 백제 시조묘(始祖廟)에 조선의 공신(功臣)이 같이 모셔지게 된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어느 날 밤 인조가 꿈을 꾸었는데, 온조왕이 와서 먼저 자기의 묘(廟)를 세워 준 것을 인사하고 " 나 혼자는 좀 적적하니 당신의 신하 이서를 나에게 줄 수 없겠오?" 라고 하므로 인조가 쾌히 승낙했다. 깨어보니 그것은 꿈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바로 광주유수(廣州留守) 이서가 간밤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인조는 간밤 꿈 이야기를 하고 온조왕의 묘에 이서를 함께 제사지내게 되었다고 전한다.

 

숭열전입구에는 효자정이 있다

★효자정

★효자정

옜날 북문안에 살던 정남이라는 12살난 아이의 아버지가 병이나 누워있자 지나던 사람이 진맥을 보더니 잉어가 특효가 있겠다 하고 가버렸다 효성이 지극한 정남은 잉어가 있을만한곳을 찾아 다니던 어느날 지친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이 우물가를 지나는데 누런 금비늘잉어가 있어 잡아다 고아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환이 나았다한다. 그후로부터 이우물을 효자정이라 하였다 한다

★침괘정 

★침괘정 

이 건물은 인조 2년 축성 총책임자인 이서가 울창한 숲 속에서 찾아낸 옛 건물이라고 한다. 그 당시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기둥과 초석이 모두 탄탄하고 방을 덮히는 온돌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특히 방 한 복판의 온돌이 몇 척 더 높았는데, 아궁이에 불을 지펴보니 이 방이 먼저 따뜻해지고 온기가 차차 낮은 방으로 번져갔다.

당시 주민들간에는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중수하고 '창을 베개 삼고 한시도 마음을 풀지 않는다.'는 뜻의 침괘정枕戈亭 편액을 달았다.

조선조에는 무기제작소의 사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침괘정옆에는 200년된 느티나무가 있다

★행궁 

★행궁(광주행궁, 남한행궁이라 불렀다)

행궁은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는 별궁(이궁)을 말한다. 상궐(내행전, 침전공간)과 하궐(외행전, 정치공간)을 비롯하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갖추었다. 행궁 뒷편에는 재덕당(在德堂)이 있고, 하궐 앞에는 한남루(漢南樓)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광주 지방관의 집무실로 사용하였고, 전란 때는 임금과 조정의 피난처이자 항쟁의 지휘부가 되었다.

행궁입구에는 310년된 느티나무가 있다

★종각터

★종각터

이곳은 종각이 있었던 곳이며 남한산성의 중심지이다 종을 울려 성내에 시간을 알렸으며 지금도 원주민사이에는 이주위가 종로거리로 불려지고 있다

 

청량산의 북쪽능선을 따라 가면 ★병암을 지나 ★서문(450m)이 있고, 서문밑 국청사 앞에는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는다는 천수약수터가 있다.

서문을 나가 계곡길로 내려가면 하남시 학암동을 거쳐 서울시 마천역으로 가고, 성벽을 따라가면 연주봉옹성을 지나 금암산을 지나 이성산으로 이어진다

서문에서 뿔모양의 능선봉에 오르면 능선봉밑에 ★매탄저가 있다

★병암(병암남성신수기비屛巖南城新修記碑)

★병암

정조때 산성서문근처가 파괴된것을 이곳 주민들이 자진하여 보수하였으므로 당시 부윤이 찬양하는 글을 이암벽에 기록하였으며 이글을 지은이는 서명응이다

서명응 [徐命膺, 1716~1787]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역학에 정통한 실학(實學)의 대가로 북학파(北學派)의 시조이며 왕명으로 세종·세조 때 쓰던 악보를 수집·집대성하여 《대악전보》,《대악후보》를 간행했다.  

★서문 

 

★서문(우익문) 

이곳은 서쪽 비탈면의 경사가 급하여 물자를 수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와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 진입에 가장 빠른 통로였다. 지금은 서울 지하철 5호선 종점인 마천역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는 성문이다.

★서문(우익문) 

인조14년(1636) 병자호란(1936-1937)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원병이 오지 않고 식량부족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45일만인 이듬해 정월에 세자와 함께 서문을 열고 경사가 심한 계곡을 내려가 삼전도(三田渡) 수항단(受降壇)으로 나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릅을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의 예를 올리며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비)  

★천수약수터

★매탄저 

 

★매탄저

유사시에 쓰기위하여 숯을 묻어두었던 곳이다 
 

매탄저에서 동쪽으로 가다 남북 주능선과 갈라지는 연주봉옹성암문 치밑에 ★연주봉옹성암문(5암문)이 있고 암문을 나가면 ★연주봉(連珠峰466m) 옹성이 축조되어 있다. 연주봉은 돌출된 봉우리로 정상에서 보면 북으로 하남시 일대와 한강 유역의 넓은 지역이 보이며, 남으로는 북쪽 성벽과 성 안 지수당 일대가 잘 보인다.

★연주봉옹성암문(5암문)

연주봉암문위 치

★암문위치에서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위 포루

옹성위에서 금암산과 이성산(이성산성)

연주봉옹성끝 밖에서

 

연주봉옹성암문에서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북쪽으로 돌출된 치의 안쪽에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는 ★북장대(北將臺406m) 터이다.

★북장대지

★북장대지

남한산성이 준공된후 수어청소속 중영장의 북장대가 있던곳

북장대지앞 치

 

북장대에서 경사가 완만한 비탈면을 따라내려가면 ★북문(367m)이 나온다.

북문을 나서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이르게 된다 

★북문

★북문(전승문) 

북문을 나서면 덕풍천 발원지를 지나 하남시 상사창동에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 수운을 이용하여 세곡을 운반하던 통로였다. 하남시에서 덕풍천을 따라 옛 광주고을인 고골을 지나 오르는 통로의 관문이었다.

북문은 병자호란 때 성문을 열고 나아가 전투를 치룬 유일한 문으로, 그 전투가 법화골전투이다. 이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인데, 이 아픔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하여 북문의 이름을 '패전을 잊지 말고 언제나 승리하자.'는 뜻의 '全勝(전승)'이라 하였던 것이다.

★법화골전투

총을 든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나가 청나라 군사를 공격하였으나, 적의 유인 계략에 말려들어 아군은 총 한 방도 제대로 쏘지 못하고 전멸하고 말았다. 이때 청나라 군사는 불과 2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북문에서 능선을 오르면 ★군포지를 지나 옥정사지3거리에 이른다

옥정사지3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현절사를 지나 관리사무소에 이른다

★군포지

★군포지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건물이 있던곳

★현절사

★현절사 [顯節祠]  경기유형문화재 제4호

병자호란(1636~1637)때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청(淸)나라 선양[瀋陽]에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삼학사(三學士)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현절사(顯節祠)는 '절의를 세상에 밝게 드러내 보인다'는 뜻을 가진 사당

또한 이 곳에는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었을 때 배를 가르고 자결한 정온(鄭蘊)과 척화파(斥和派)로 심양에 볼모로 갔던 김상헌(金尙憲)도 함께 모셨다.

★관리사무소앞 지수당

관리사무소에서 지수당쪽 중앙이 관어정터

★지수당

지수당은 고관들의 낚시터 정자이다. 건립 당시 정자를 중심으로 앞 뒤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뒤 2개만 남아 있다. 지수당地水堂 지수地水란 '백성을 용납하고 무리를 기른다'는 뜻을 취한 것으로 '물이 땅 속에 있음'을 뜻한다.

지수당 연못 가운데 있던 동산에는 관어정이 있었다. 지수당과 작은 배로 왕래하였다고 한다. 관어정이라는 이름은 제갈량이 못에 가서 고요히 고기를 관찰하였음에도 조조의 10만 군사를 물리친 옛 일을 생각하여 붙여진 것이다.

 

옥정사지3거리에서 능선봉(420m)에 있는 ★돌탑을 지나 능선을 내려가면 ★군포지 ★수구 ★군포지암문(4암문)의 3시설이 한곳에 있다

★돌탑

★군포지 나무앞이 군포지, 좌측이 암문, 우측이 수구,

 

★수구  안에서

수구 밖에서

★군포지암문(4암문)

 

군포지에서 능선으로 올라가 ★동장대지암문(3암문)을 지나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망월봉(504m)에 ★동장대지가 있다. 동장대지는 현재는 초석만 남아 있다.

동장대암문(3암문)은 본성과 봉암성 한봉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이자 하남시 상사창동으로 내려가는 길목이 된다.

★동장대지암문(3암문)

★동장대지

 

★동장대지

남한산성이 준공된후 수어청소속 전영장과 좌영장의 동장대가 있던곳

동장대지 치

 

동장대를 정점으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군포지를 지나 내려가면 평탄한 지면에 ★수구(水口)가 설치되어 있다

★군포지

★수구 현재성벽안은 흙에 묻혀 보이지 않고 성밖을 보면 출구가 보인다


 

수구를 지나면 ★장경사신지옹성암문(2암문)이 있고 암문을 나가면 장경사신지옹성(428m)이다

옹성 동쪽 끝 부분에 ★2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고, 남쪽으로 ★수구가 있다.

★장경사신지옹성암문(2암문)

★암문위에서 장경사신지옹성

★장경사신지옹성끝 2개포루중 좌측포루

★장경사신지옹성끝 남쪽의 수구

 

계속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장경사 아래 계곡에 ★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장경사아래 평지를 지나 장경사아래 남쪽 능선밑 끝에 ★수구와 ★장경사암문(1암문)이 있다

장경사암문(1암문)을 나가 계곡을 내려가면 큰골(돌공원)을 경유하여 엄미리, 광지원으로 간다

★장경사대웅전

★장경사 [長慶寺]  경기문화재자료 제15호

1624년(인조2) 남한산성의 축성시 승군의 숙식을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玉井寺)외에 1638년(인조16) 장경사 [長慶寺]개원사(開元寺)·한흥사(漢興寺)·국청사(國淸寺)·천주사(天柱寺)·동림사(東林寺)·남단사(南壇寺)등 새로운 사찰(총9개)을 창건하였는데 그때 함께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현재 장경사 대웅전 하나만 당시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고, 망월사·개원사·국청사는 새로 지은 건물이다.

★장경사아래수구

 

★장경사아래우측능선밑 수구  수구위에 철망을 덮어놓았다

★장경사암문(1암문)

 

능선위로 올라 서쪽으로 꺾어 도는 언덕에 ★2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본성에 설치된 유일한 포루이다

★2개의 포루가 설치된 언덕

2개의 포루중 좌측포루

 

성벽을 따라 계속 나아가며 3개의 계곡에 ★3개의 수구를 지나고, ★송암정에 오른다

★수구3

 

★수구2

★수구1

★송암정과 대부송(중앙) 

★송암정 

바위절벽위에 정자터와 말라 죽은 소나무가 서 있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 곳을 지나는데 남자 수명과 기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때 술에 취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그 사내에게 심오한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 내려 자결하였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한 소나무는 정조 3년(1779) 남한행궁(南漢行宮) 행차길에 '대부' 벼슬을 내렸으므로 '대부송(大夫松)' 이라고 부른다.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송암정에서 서쪽으로 가팔은 내리막을 내려가면 ★동문이다.


 

본성 동남성

청량산에서 남쪽능선을 따라가다 ★영춘정이 있는 천주봉(462m)에 이르면 거의 직각으로 꺾여 동쪽 방향으로 이어진다.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432m봉을 넘어 ★산성터널위를 지나 ★남문(360m)이 있다.

남문을 나서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련사를 지나 성남시 산성입구역으로, 우측차로로 내려가면 산성역으로 이어진다. 좌측성벽을 따라가면 1남옹성을 지나 검단산으로 향한다

★영춘정 

★영춘정(迎春亭팔각정 누정)

남문아래 있던것을 현위치로 옮겼다 1950년대 축조

★산성터널

★남문 

 

★남문(지화문) 

동문에서 이어져 성남시로 향하는 성내 관통도로가 지나는 주 출입통로이다. 4대문 중 '至和門(지화문)' 현판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남문은 4대문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인데, 지금은 옆으로 지하터널이 뚫려 자동차는 터널을 이용하고 있다.

 

남문을 지나 올라가면 능선 정상부(426m ★1남옹성치)에 이르는데, 여기서 직각으로 동향하여 거의 일직선상의 성벽이 이어진다. 이곳은 완경사 지역으로 산성방어에 취약한 지점이다. 따라서 방어시설로 세 곳의 옹성에 22개의 포루가 설치되었고, 치(언덕 전망대) 세 곳과 암문 4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 구간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신남성(검단산)에 화포를 설치하고 공격한 이후 더욱 중요시 되었다.

1남옹성치에서 내려오면 ★1남옹성암문(7암문)이, 바로옆에는 ★ KT차량암문이 있다

KT차량암문을 나가면 우측에 1남옹성치밑으로 1남옹성이 있다 1남옹성끝부분에는 ★전망대가 있고 옹성 끝에 ★8개의 포루가 있다

KT차량암문을 나서 KT도로를 따라가면 검단산(신남성)이다

★1남옹성치

★1남옹성암문(7암문)

★KT차량암문

1남옹성 1남옹성치밑에서

★1남옹성끝 포루뒤 전망대 포루에서 올려다봄

 

★1남옹성끝 포루 8개중 좌측포루1 


1남옹성끝 밖에서

 

1남옹성암문에서 능선으로 오르면 ★2남옹성암문(8암문)위를 지나 ★남장대지와 남장대지앞에★2남옹성치가 있다, 2남옹성암문이 잠겨 있으므로 KT차량암문을 나가 성벽을 따라가면 2남옹성치밑으로 ★2남옹성이 있다. 2남옹성끝부분에 ★9암문이 있고 암문앞에 ★남옹성무인비(南甕城戊寅碑)가 있고, 옹성끝에는 ★9개의 포루가 있다

★2남옹성암문(8암문) 

★남장대지

★남장대지

남한산성이 준공된후 수어청소속 후영장의 남장대가 있던곳. 현재 주초석만 노축되어 있다

★2남옹성치 남장대지앞

2남옹성치에서 본 검단산의 동봉(헬기장), 중봉(중계소),서봉(군부대)

2남옹성치에서 2남옹성

★2남옹성끝부분의 암문(9암문)

9암문앞 금석문

★금석문(남옹성무인비南甕城戊寅碑) 축성 감독체제와 축성군의 노동력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9암문앞 2남옹성끝 포루9개중 좌측 포루1

 

남장대에서 내려와 ★3남옹성암문1(10암문)을 지나 오르면 ★3남옹성치가 있고 다시 내려가면 ★3남옹성암문2(11암문)이 있다

3남옹성암문1(10암문)을 나가 성벽을 따라가면 3남옹성치밑에 ★3남옹성이 있다 옹성끝에는 ★포루5개가 있다

★3남옹성암문1(10암문)

★3남옹성 치

★3남옹성 치에서 3남옹성

★3남옹성끝 포루5개중 좌측 포루1

 

 

★3남옹성암문2(11암문)

 

11암문에서 동서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급경사를 내려가면 ★시구문과 ★수문이 있고 ★동문교옆에 ★동문이 있다

동문(297m)이 있는 곳은 성내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다. 이곳에는 성내에서 흐르는 모든 물줄기를 모아 배출하는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동문교(東門橋)를 만들어 차량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성내에서 유일하게 본성이 17.5m 정도 단절된 곳이다.  

동문을 나서면 광지원으로 가고 장경사방향으로 오르면 벌봉, 한봉으로 간다

★시구문 

★시구문 

신유(1801), 기해(1839), 병인(1866)박해시 순교한 토마스, 아우구스티노, 바오로등 300여분의 시신이 버려진곳

종로에서 동문으로 내려오는 도로 서쪽에는 천주교순교성지가 있다

★천주교순교성지

★남한산성순교성지

신유박해(1801)때부터 기해박해(1839)와 병인박해(1866)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이르는 여러곳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하였다 

 

★수문

★수구(수문 수구문)

성내에는 크게 네 개의 개울이 있었다. 계곡에서 각각 흘러내린 물이 지수당 부근에서 합류되어 동벽에 구축된 수구문을 통하여 성밖으로 흐른다.

성안에서 사망한자의 시신을 이수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갔다

동문이 닿혔을때는 이문을 통해 출입하기도 한 비밀문이었다

★동문교

★동문 안에서

동문 밖에서

★동문(좌익문) 

남문에서 이어진 성내 관통도로가 지나는 주 출입통로이다. 

 

 

  ○외성

★봉암성(蜂巖城 신성 동성 봉암신성蜂巖新城 벌봉성이라고도 한다)

본성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에워싸서 축조된 외성이다. 벌봉(515m)은 청량산(482m)보다 높기 때문에 벌봉 정상에서 보면 남한산성 서쪽 내부와 동벽이 넓게 보인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게 이 지역을 점령당함으로써 적이 성 내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화포 공격의 직접적인 사정거리 안에 들게 되었다.

이러한 약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숙종 12년(1686) 광주부윤 윤지선이 축성하였으며, 암문 4개와 포루 2개가 구축되어 있다.

 

동장대암문(3암문)을 나와 출입구인 ★봉암성암문(12암문)으로 들어가 북동쪽 벌봉능선을 따라가다 ★외동장대지에서 14암문을 지나 동쪽능선을 따라가면 봉암성옹성이 있다. 봉암성옹성 끝부분에 남쪽으로 2개의 포루와 ★챙성암문(15암문)이 있고 챙성암문위에 치가 있다

★봉암성암문(12암문)

★외동장대지

★외동장대

군사들이 진을 치고 조련하던곳

★외동장대암문(14암문)

★봉암성옹성 2개의 포루

2개의 포루중 우측포루

★봉암성옹성 챙성암문(15암문)

봉암성옹성끝 치

봉암성옹성끝 치 밖에서

 

외동장대지에서 북쪽으로 가면 벌봉이 있고, 벌봉북쪽밑으로 벌봉암문(13암문)이 있다 

★벌봉 동쪽밑

벌봉정상

★벌봉의 갈라진 바위

마치 벌의 날개처럼 생겼다 하여 벌봉이라고 한다

병자호란때 청태종이 이 바위에 정기가 서려있어 침략할 때 즉시 깨뜨려 정기를 끊고서야 산성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벌봉암문(13암문)

 

벌봉암문(13암문)에서 북쪽으로 가다 505m봉에서 서쪽으로 꺾어 돌아 가다 다시 언덕에서 남쪽으로 꺾어 돌아 동림사지밑을 지나 서쪽으로 휘어져 봉암성암문으로 이어진다

12암문은 출입구에 해당하고, 13암문은 상사창동으로 나가는 교통로로 이용되었고, 봉암성옹성의 15암문은 한봉성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입구이고 검단산 은고개 엄미리 큰골(돌공원)로 간다.

성내의 여러 동의 건물터는 군포(軍鋪) 15개가 있었던 터로 보인다.

 

 

★한봉성(漢峰城)

봉암성 동남쪽끝 한봉성옹성 챙성암문에서 남쪽능선으로 본성성벽과 평행으로 길게 한봉(415m)정상까지 축조된 외성이다. 숙종 19년(1693)에 수어사 오시복(吳始復)이 행궁까지의 화포 유효 사거리를 고려하여 축조하였으며, 다른 성과 달리 원형으로 닫힌 성이 아니고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봉암성옹성 챙성암문(15암문)을 나서 능선을 따라가다 한봉성암문(벌봉,한봉사이암문 16암문)을 지나 한봉정상의 서쪽에서 끝난다

한봉성암문(16암문)은 장경사아래 장경사암문(1암문)에서 큰골(돌공원)을 경유하여 퇴촌방향(엄미리, 광지원)으로 가는 길목으로 이용이 가장 빈번한 암문 가운데 하나였다.

★한봉성암문(16암문)

★한봉정상

한봉서쪽 성곽끝부분

 

 

★신남성(新南城 남격대南格臺 대봉對峰이라고도 한다)

신남성은 검단산(543m)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신남성에서는 본성의 남벽 대부분과 수어장대가 한눈에 보이며, 성남시 일대와 광주시 검복리 일대도 잘 보인다

 

KT차량암문으로 나와 KT도로를 따라가면 KT검단산중계소앞 4거리에 이른다

군부대쪽인 서쪽 봉우리에 ★서돈대가 설치되어 있고,  KT송신탑이 있는 가운데 봉우리에는 ★동돈대가 설치되어 있다. 헬기장이 있는 동쪽봉우리에는 검단산 정상석이 있다

 

★서돈대 성남시청에서 옮김

★신남성서돈대(新南城渲臺)

신남성 서돈대는 검단산 서쪽봉우리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인들이 이곳에 호준포(虎纖砲)와 홍이포(紅夷砲)를 설치하고 방포를 하였는데 포탄이 행궁의 기둥을 맞추기도 했다고 한다.

돈대의 동쪽에 설치된 문은 홍예식이다. 이곳에는 봉화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동돈대 성남시청에서 옮김

 

★신남성동돈대(新南城東墩臺)

신남성 동돈대는 검단산 가운데 봉우리의 정상에 축조되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淸軍) 이 이곳을 점령하여 대포 7·8문을 앉혀 놓았던 곳이다.

돈대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돈대의 서쪽에 홍예식으로 구축되어 있다. 원래의 문이 아니라 한국통신 송신탑 건설과정에서 돈대 내부로 차량이 진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확장 신축한 것이다. 성벽에는 평거식 수구 2개(남쪽에 1개 북동쪽에 1개)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한국통신의 송신탑이 설치되어 있다

검단산 동봉정상의 헬기장과 정상석

검단산 동봉에서 중봉의 KT중계탑

 

 

  ○용어설명

★장대 

장대(將臺)는 장수의 지휘소로 전투할 때 지휘가 쉽고 전망이 좋은 곳에 설치되었다. 대체로 성내 지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도 수행하였다고 보여진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각 방면을 조망하고 지휘할 수 있는 곳과 봉암성의 외동장대가 설치되어 장대가 모두 다섯 곳에 설치되었다.

★옹성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둘러 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옹성은 모두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에 취약한 지점에 축조되어 있다.

★포루(砲壘,포좌砲座)

산성에서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8개소에 29개의 포루가 있다 (남옹성1에 8개, 남옹성2에 9개, 남옹성3에 5개, 장경사 부근 본성에 2개, 장경사신지옹성에 2개, 연주봉옹성1개, 봉암성옹성에 2개)

★암문 (暗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은 비밀스러운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성문보다 작게 하고, 문루나 육축 등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을 하지 않았다. 암문의 기능은 성내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 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은 물론 원병을 받고 역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에 남아 있는 암문은 모두 16개로 우리 나라 성 가운데 암문이 가장 많다.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다. 본성의 암문은 남쪽에 5개, 동쪽에 2개, 북쪽에 3개, 서쪽에 1개가 있다.

암문의 일련번호는 동문에서 본성 북쪽으로 가면서 붙였으며, 다음 봉암성·한봉성 순서로 하였다.

★여장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여첩

몸을 숨기고 활이나 총을 쏘는 구멍이 뚫린 담

★돈대

망을 보는 초소, 산성으로 진격해오는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초소

돈대는 성을 쌓을 여건은 안되지만 전략적인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을 말한다

★체성 [體性] = 본성 [本城] 중심이 되는 성(城).

★치(峙) 높이 치솟은 지세가 가파른 고개, 높은 언덕을 뜻하는 말로 티라고도 하는데, 그리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고갯길로 규모는 크지 않다. 

★고개 산이나 언덕의, 넘어 오르내리게 된 비탈진 곳을 말한다.

★봉(峯) : 산봉우리[산정(山頂)] 또는 그대로 산(山)이라는 의미로 쓰임.


 

  ○대중교통:지하철/버스

★남한산성 산행기점 찾아가는길

♠남한산성 관리사무소 031-743-6610.

♠산성종로 = 8모란역,8남한산성입구역,8산성역2번 9번-남한산성입구,산성종로

9(모란역,산성입구역,산성역,산성종로)

♠서문 = 5마천역1번-도보-서문

♠남문 = 8남한산성입구역1번-도보-남문

8남한산성입구역1번(상원초교앞)  = 9,30,30-1,51.55,70,88,88-1,333,10번,10-1번

(30,30-1 잠실역6번,천호역,단대오거리역,남한산성입구역,남한산성입구,사기막골)

30,30-1,51,55,70,333-모란역,남한산성입구역,산성입구,사기막골 

88,88-1(모란역,남한산성입구역,산성입구,사기막골) 9

♠사기막골 = 8모란역4번,남한산성입구역 333,51,88-1번 남한산성입구-사기막골 하차

33,220번(모란역,단대오거리역,), 55-1번(모란역), 70번(상봉역~군자역~광나루역~천호역~잠실역~단대오거리역~남한산성입구-사기막골), 100번(잠실역6번-복정역-단대오거리역)

♠이배재고개 = 31-3번(성남~모란역~광주), 3-3번(성남~모란역-광주), 500-5번(강남역~교대역~양재역-복정역~경원대~모란역~광주) 이배재고개 하차

♠광지원리 = 2강변역 테크노마타앞,8천호역,5명일역 13,13-2번 명일동-황산(신장)경유~광주(시청)행 12분간격 광지원삼거리, 남한산성입구에서 하차. 약 50분소요. 요금 1,500원.

(광지원-산성종로 = 15-1번)

♠고골사거리 = 2,8잠실역7,8번 2성내역3번 올림픽공원역1번 30-5번 1번마을버스 고골사거리 하차 (고골사거리 은행나무집식당앞에서 100번마을버스 30분간격-고골종점)

(30-5 2성내역~잠실역~감북동~광암동~하남시청~공영차고지)

5둔촌역3번 1번마을버스 (감북동~광암동~서부농협~하남시청~에니메이션고교-하산곡삼거리) 이성산입구 하차

5둔촌역3번 80번 둔촌역~서부초교~광암동~서부농협~에니메이션고교

금암산 북릉 등산기점은 광암정수장에서, 이성산입구는 이성산성입구에서, 고골 입구, 객산은  고골사거리 서부농협(향교4거리)앞 정류소에서  하차

2강변역앞에서 13번 (명일동~황산(신장) 경유 광주행) 마방집 앞 하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