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사에 길이 빛날 백마고지 전적지(白馬高地 戰蹟地)를 찾아서

 

□ 답사일자/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맑음

참가인원/ 나 홀로 

□ 답사진행상황

   08시 25분 : 파주집 출발

   08시 50분 : 경의선 월롱역 버스정류장

   09시 15분 : 법원리 우체국 앞 버스정류장

   10시 05분 : 양주역(전철 1호선)

   10시 50분 : 동두천역(전철1호선, 경원선)

   11시 40분 : 경원선 신탄리역

   11시 58분 : 백마고지 입구

   12시 05분 : 대마리양수장

   12시 10분 : 백마고지 전적기념관

   12시 20분 : 백마고지 전적지 상승각

   13시 15분 : 대마리양수장

   13시 20분 : 백마고지 입구

   13시 40분 : 백마고지역(경원선)

   14시 40분 : 동두천역(경원선, 1호선 전철)

   16시 30분 : 서울역(1호선 전철)

   17시 05분 : 월롱역(경의선) 버스정류장

   17시 25분 : 파주집 도착

 

 

□ 백마고지 답사지도

답사코스/ 백마고지 입구 ~ 대마리양수장 ~ 백마고지 기념관 ~ 대마리양수장 ~ 백마고지 입구 ~ 백마고지역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백마고지 답사개요

백마고지(白馬高地) 전투 전 상황

1950년 6월 25일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개전 초기 낙동강 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 한만국경선까지 도달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2차례나 38선을 오르내린 끝에

1952년 10월 6일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지지 직전에는 현 휴전선 일대에서

피아간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당시는 전쟁 지속 능력이 이미 한계에 달한 공산측의 요청에 의해 휴전 협상이

계속 되었던 시기로 현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될 것에 대비하여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졋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52년 9월 이후에는 수도고지, 지형능선, 불모고지 일대에서

피아 손실을 고려하지 않은 혈전이 계속되었는데

10월에 들어서자마자 적()은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모택동으로부터

"만세군" 칭호까지 받은 중공군 정예 제38군단 112사단, 113사단, 114사단을 동원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철의 삼각지(三角地)

철의 삼각지는 김화(金化), 철원(鐵原), 평강(平康)을 잇는 지도상의 개념으로, 6.25전쟁 당시의 격전지로

1951년 6월 23일 야코프 말리크 소련 국제연합(UN)대표가 UN에서

6.25전쟁의 휴전협상을 제의하고, 6월 30일 미국의 M. B. 리지웨이 UN군사령관이

이를 정식으로 동의함으로써 6.25전쟁은 교착상태에 돌입하였다.

휴전회담을 고려한 미국과 UN은 북한을 협상에 끌어들이기 위해 승리도 패배도 아닌 제한정책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초기에 낙관적이었던 휴전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휴전회담과 전투가 동시에 벌어지게 되었다.

북한과 남한은 휴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최대한의 영토를 탈환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휴전선을 중심으로 서부에서 동부까지 전지역에 고지를 점령하려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곳 철의 삼각지는 중부전선에 위치한 곳으로 도로망이 여러곳으로 발달한 전략 요충지였다.

1951년 9월 북한은 중국인민지원군과 함께 철의 삼각지 안의

백마고지, 수도고지, 저격병능선 등을 집중적으로 하여 대공세를 전개하였다.

이곳의 전투는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인 1953년 7월 13일까지 마지막 공세와 수세가 계속되던 곳이다.

이곳은 6.25전쟁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곳으로 결국 김화와 철원은 남한의 영토로, 평강은 북한의 영토로 확정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 戰鬪) 개요

1952년 10월 6일 6.25 전쟁중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일명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마고지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그 주변이 평야이고

평강, 철원, 김화 이 세곳, 속칭 철의 삼각지를 차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곳을 탈환하면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민지원군과 국군간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공방이 전개 되었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이 었으며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국군은 이에 대응해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병력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중공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이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기간중 가장 치열하게

고지쟁탈전을 전개했던 1952년 10월에 철원에 위치한 작은 고지를 놓고

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이 고지 쟁탈전을 벌인 끝에 9사단이 승리한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불과 395m밖에 되지않는 고지를 빼았기 위해

중공군 1만여명이 전사상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국군 9사단도 총3,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발사된 포탄수는 아군 219,954발, 적군 55,000발 등 총274,954발이다.

결국 세계 전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처절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병전을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공인민지원군은 약 1만명, 국군은 3,500명의 사장자를 냈다.

현재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휴전선에 있어서

방어에 가장 강력한 교두보인 철의 삼각지의 한 축을 잇는 중요한 고지이다.

이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신명리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395m의 야산으로

전쟁 전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명고지에 불과하였으나 전선이 고착되면서부터

철의 삼각지 좌견부를 감제하는 중요 지형지물로 유명해진 곳이다.

명칭의 유래는 전쟁 중 포격에 의해 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후의 형상이

누워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는 설과

당시 참전했던 어느 연대의 부연대장이 외신기자의 질문에

"화이트 호스 힐(white horse hill)" 이라고 대답하여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격전을 치루고 난 후의 처절한 산의 형상이

마치 백마의 와상(臥床)같이 보인다 하여 불리우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전투를 수행한 국군 제9보병사단의 부대 명칭을 백마부대라 부르게 되었다.

 

 

 

□ 백마고지 답사 사진

오늘은 6.25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하게 고지 쟁탈전을 벌였다는 철원의 백마고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을 찾기로 하였다.

  집에서 가까운 경의선 월롱역 주차장에 차를 주차 하고 월롱역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법원리를 거쳐서 1호선 전철역인 양주역에서 경원선 열차를 타기 위하여 동두천역으로 향하였다.

경원선 열차는 지난 1914년에 개통된 용산역과 원산을 잇는 총 길이 222.7km의

철도였으나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현재는 동두천역에서 백마고지역까지만 운행이 되고 있다.

10시 50분에 이 경원선 열차를 타고 신탄리역에 11시 40분경에 도착을 하여서

역 앞에 대기하고 있는 철원시 동송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백마고지 입구에 도착을 하여 답사를 시작하였다.

 

 

 

백마고지를 알리는 표석 옆에 수준점(20-12-26-13)이 보이는데

이곳이 해발고도196m의 높이로 경도 127도 10분 20초, 위도 38도 15분 53초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곳이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26-1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철원군은 얼마전에 철원시로 승격되었다.

 

 

 

 

백마고지 입구에서 포장도로를 따라서 백마고지 전적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걸어 가면서

바라본 백마고지와 철원평야의 모습으로 15년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곳에 현역 군 초소가 있어서 신분을 확인하고 저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으로 가서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을 관람하였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그냥 별 제재없이 그냥 통과를 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기념비가 보이고 그 뒤로 백마고지의 모습과 우측으로 뽀족한 모습의 피의능선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대마리양수장 앞을 지나고...

 

 

 

 

청정지역 논에서는 기러기들이 제철 만난듯 한참 먹이 사냥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마고지 전적지(白馬高地 戰跡地)

백마고지는 현재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휴전선에 있어 방어에 가장 강력한 교두보인

철원, 평강, 김화의 철의 삼각지의 한 축을 잇는 중요한 고지입니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열흘 동안 국군과 적군 13,000여 명이 희생되었음은

휴전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6.25전쟁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에 백마고지 전적지(白馬高地戰跡地)가 조성된 후 전적지 관리와 안보교육을 위해

기여한 모든 관련기관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백마고지 전적지 관리부대인 제5보병사단은 국가보훈처(춘천보훈지청)와

철원군청의 예산을 지원받아 기념관을 리모델링하였고 전적지 주변 시설물을 새롭게 단장하는 등

백마고지 전적지가 국민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체험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 당시의 참전 노병들은 점차 무대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이끌 여러분이여 목숨 걸고 조국을 지킨 노병들의

희생정신을 이어받아 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활력소가 되길 기대합니다.

- 백마고지 참전 전우회 - 

 

 

 

백마고지 위령비

백마고지에서 희생된 국군과 중공군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하여 국군 5사단 전 장병과

대마리 주민, 백마고지 참전 전우회의 뜻을 모아서 세웠다는

백마고지 위령비의 모습으로 위령비 뒷 면에는 다음과 같은 백마의 얼이 적혀 있다

풀섶에 누워 그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당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끓는 피로 용솟음 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이 한몸 초개같이 바치려 숨찬 목소리로 다-같이

강물을 헤치고 산을 부수며 달려오는 적들을 막았노라

수 많은 적을 따라 소탕하고 조국의 얼로 내달려

떡갈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원수의 고함을 눌러 버렸나니

쓰러지며 죽으면서도 다시 일어나 숨결을 돌리고

숨지려는 조국을 살리 었노라

   나의 조국 영원한 땅이여 만세를 가도록 그 얼은 살았느니

지금도 그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저 몰려오는 적을 막고 있노라

푸르러 푸르러 영원한 젊음 우리는 그 품에 안겨 안식 하리라

어머니 조국에 이 혼을 맡기며 후회없이 더 강하게 앞으로 앞으로 달려 가리라 

 

 

 

백마고지 전적지 앞 마당에서 좌측으로 들판을 지나서 보이는 266고지의 모습

 

 

 

백마고지 전적지 기념관 안에 들어가 보니 당시의 무기 등 여러가지 전시물들이 보이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지 내의 상승각으로 올라 가면서 바라본 여러가지 모습들 

 

 

 

백마고지 전적지 상승각에서 바라본 남한측 D.M.Z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고도 395m의

백마고지의 모습으로 백마고지 정상에는 아군 G.P 두 곳이 모습이 보이고 있고

백마고지 우측으로 뽀족하게 보이는 산은 이북의 대성산(619m)으로 속칭 피의능선으로 불리우고 있다.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 戰鬪) 개요

1952년 10월 6일 6.25 전쟁중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일명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마고지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그 주변이 평야이고

평강, 철원, 김화 이 세곳, 속칭 철의 삼각지를 차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곳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곳을 탈환하면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민지원군과 국군간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공방이 전개 되었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이 었으며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국군은 이에 대응해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병력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중공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이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기간중 가장 치열하게

고지쟁탈전을 전개했던 1952년 10월에 철원에 위치한 작은 고지를 놓고

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이 고지 쟁탈전을 벌인 끝에 9사단이 승리한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불과 395m밖에 되지않는 고지를 빼았기 위해

중공군 1만여명이 전사상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국군 9사단도 총3,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발사된 포탄수는 아군 219,954발, 적군 55,000발 등 총274,954발이다.

결국 세계 전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처절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병전을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공인민지원군은 약 1만명, 국군은 3,500명의 사장자를 냈다.

 현재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휴전선에 있어서

방어에 가장 강력한 교두보인 철의 삼각지의 한 축을 잇는 중요한 고지이다.

이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신명리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395m의 야산으로

전쟁 전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명고지에 불과하였으나 전선이 고착되면서부터

철의 삼각지 좌견부를 감제하는 중요 지형지물로 유명해진 곳이다.

명칭의 유래는 전쟁 중 포격에 의해 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후의 형상이

누워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는 설과

당시 참전했던 어느 연대의 부연대장이 외신기자의 질문에

"화이트 호스 힐(white horse hill)" 이라고 대답하여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격전을 치루고 난 후의 처절한 산의 형상이

백마의 외상(臥床)과 같이 보인다 하여 불리우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전투를 수행한 국군 제9보병사단의 부대 명칭을 백마부대라 부르게 되었다.

 

 

 

백마고지(白馬高地) 호국영령 충혼비

아래의 백마고지 호국영령 충혼비는 전방 비무장지대(DMZ)내의 백마고지 정상에 있다.

백마고지 전투 전승 기념일인 10월 16일에는 민.관.군 합동 위령제를

철원군 대마리에 있는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 앞에서 거행하고 있는 이 행사는

백마고지 참전 전우회 주관으로 군 정병들과 보훈처, 철원군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거행되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바라본 모습과 6.25전쟁시 10일간 12차에 걸쳐서 공방을 벌이던 백마고지의 생생한 모습

 

 

 

 

 

 

 

 

 

 

 

 

 

 

백마고지 전투 (白馬高地 戰鬪)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

 

제1차 전투 - (1952년 10월 6일 19시 15분 ~ 20시 15분)

중공군 제38군 제114사단 제340연대의 선제공격으로 백마고지 전투 시작 되었다.

적은 공격 전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발의 포탄을 투하하여

아군 전 진지가 초토화 되고 매설한 지뢰까지 폭발하여 생지옥으로 변하였다.

중공군 포로 증언에 의하면 적들은 공격전에 도수 높은 배갈을 먹이고

수류탄 만을 휴대시킨 채로 공격해옴

아군은 포병과 공군의 지원사격으로 제9사단 제30연대가 극한 상황속에서 적을 격퇴시킴

 

제2차 전투 - (1952년 10월 6일 20시 40분 ~ 24시 00분)

1차 공방적이 끝난 후 25분 만에 적은 수류탄 공격조, 다발총 사격조,

장총 돌격조 등으로 연속적인 파상공격을 감행해옴

백마고지 우견부가 일시 피탈되었으나 곧 바로 역습을 감행하여 적을 격퇴시키고 진지를 회복함

 

제3차 전투 - (1952년 10월 7일 00시 40분 ~ 05시 10분)

중공 제38군 제114사단 제340연대는 두 차례의 공격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슴에도

1,000여 발의 집중 포격과 함께 40분 만에 3차 공격을 감행해 옴

적 돌격조의 3차에 걸친 연속 공격으로 피아 사상자가 속출, 능선과 계곡이 온통 시체와 포연으로 뒤덮힘

혈전 사투 4시간 30분 만에 적 퇴각, 아군 진지와 500m 거리를 두고 상호 대처함   

 

제4차 전투 - (1952년 10월 7일 20시 00분 ~ 02분 40분)

중공 제38군은 제114사단 제340연대가 공격에 실패하자 제112사단 제334연대를 투입하여

공격하여 전투 개시 3시간 후인 23시 경에 최초로 백마고지가 피탈 당함

피탈 3시간 40분 만인 02시 40분경에 치열한 공방전 끝에 백마고지를 다시 탈환함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는 제29연대와 백마고지 방어 임무를 교대함

 

제5차 전투 - (1952년 10월 8일 05시 30분 ~ 23시 05분)

주로 야간 공격만 하던 적이 주간 여명 시간에 공격을 감행, 이때부터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뺏고 뺏기는 고지 쟁탈전이 반복됨

피아간의 공격 양상은 이 일대를 포격으로 초토화 시킨 다음 새로운 공격부대로 집중적으로 공격해옴 

 

제6차 전투 - (1952년 10월 9일 00시 20분 ~ 10월 10일 00시 30분)

5차 공방전이 끝난지 1시간 15분 만인 10월 9일 0시 20분경에 적은 백마고지를 탈취 못하면

사단장을 총살하겠다는 명령과 함께 새로운 부대인 제114사단 제342연대를 투입하여

공격 전에 백마고지 일원에 1,100여 발의 집중 포격으로 해옴으로서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하며 03시경에 백마고지가 또 다시 적에게 넘어감

아군은 다음날 새벽 0시 30분까지 8차례의 격전 끝에 33,000여 발의 포탄을 사용하며 백마고지를 재 탈환함

전투 후 쇠사슬에 묶인 채 기관총 진지에 얽매여 있는 적 시체를 발견, 중공군의 비인간성에 놀람  

 

제7차 전투 - (1952년 10월 10일 01시 30분 ~ 06시 40분)

아군은 제9사단 제29연대가 제28연대로부터 백마고지 방어 임무를 인계 받음

01시 30분부터 적들은 포격에 이어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공격을 재개해옴

    03시 30분 적의 수류탄전과 백백전으로 집중 파상공격으로 또 다시 백마고지를 빼앗겼으나

아군은 06시 40분 격전끝에 백마고지를 재 탈환함

이날 일곱번째로 백마고지에 발을 들여놓았던 중공군은 많은 사상자만 남긴채 다시 퇴각함 

 

 제8차 전투 - (1952년 10월 10일 08시 00분 ~ 13시 20분)

중공군 제114사단 제342연대는 4차례에 걸쳐서 막대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7차 공방전이 끝난지 1시간 20분만인 08시에 다시 공격을 감행해옴

안개가 11시까지 낀 가운데 적의 근접으로 순식간에 수류탄전과 백병전이 벌어져 혈투를 계속하던 중

아군 포병의 오폭으로 참화를 입고 다시 백마고지를 적에게 내어 주었으나

아군은 다시 역습을 감행하여 고지 정상과 30m 거리를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50명의 수류탄 특공대를 조직하여 육탄돌격으로 적 기관총을 파괴하고 백마고지를 재 탈환함

 

제9차 전투 - (1952년 10월 10일 10시 00분 ~ 10월 11일 12시 04분)

중공군 제38군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제114사단 제342연대 대신에

제112사단 제335연대를 투입하여 10일 18시 45분경에 파상공격으로 다시 백마고지을 빼앗겼으나

피아간 포격으로 온 산이 무릎까지 빠지는 모래밭으로 변해 쓰고 있던 철모로도

대피호를 팔수있을 정도에 이른 11시 04분경 수류탄이 떨어져 돌맹이로 저항하는 적을 섬멸하고 고지를 탈환함

 

 제10차 전투 - (1952년 10월 11일 15시 30분 ~10월 12일 13시 20분)

11일 15시 30분 집중 포격 후 적의 공격으로 처절한 백병전 끝에 17시경에 또 다시 백마고지를 빼앗김

12일 13시경 정상을 눈 앞에 두고 적의 기관총으로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하자

제9사단 제30연대 1중대 3소대장 강승우소위가 오귀봉하사, 안영권하사와 함께 수류탄을 들고

육탄 돌격을 감행하여 기관총진지를 폭파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여

백마고지를 다시 탈환하여 이 육탄 3용사는 백마고지 3군신으로 호국의 별이 되면서

내, 외신기자들에 의해 이때부터 395고지는 세계적인 관심속에 국군의 명예를 건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었다.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가 제29연대로 부터 백마고지 방어 임무를 인수 받음 

 

제11차 전투 - (1952년 10월 12일 14시 40분 ~ 16시 50분)

중공군의 10차 공방이 끝난지 1시간 20분 만에 아군 부대가 교대하는 사이 또 다시 역습을 해옴

16시 50분 전후 국군 제30연대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적에 대해 포격과 사격으로 궤멸적인 큰 타격을 가함  

 

제12차 전투 - (1952년 10월 12일 19시 30분 ~ 10월 15일 11시 00분)

12일 19시 30분부터 13일 03시 35분까지 적은 3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포격과 총격 후

돌격을 감행, 피아간에 필사적으로 공방이 이어짐

이후 15일 11시까지 최후의 결전 끝에 백마고지 일대 전 지역에서 새로 투입된 적 38군

제112사단 제336연대의 반격을 격퇴하고 10일간의 혈전을 종결하였다.

중공 제38군은 이 전투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고 후방에서 부대를 재건하다가 53년 7월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상승각 백마고지 전망대 앞에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민간인 통제구역이 이어지고 있다. 

 

 

 

백마고지가 눈 앞에 바라보이는 상승각 전망대에서 바라본 좌, 우 주변의 모습들 

 

 

 

 

 백마고지 답사를 마치고 전적기념관 주차장에서 역광속에 바라본 좌측의 금학산과 우측의 고대산의 모습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을 나와서 백마교를 지나서 백마고지역으로 향하고...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백마고지역을 향하며 잠시 뒤 돌아서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을 바라보고...

 

 

 

참으로 편안하고 옛 고향이 생각나는 철원벌판의 한적한 논의 모습과 뒤로 고대산, 금학산, 소이산의 모습 

 

 

 

백마고지역을 거의 다 와서 다시한번 백마고지를 바라보고...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에서 철원벌판을 바라보면서 20여분 걸어서 백마고지역에 도착하여 오늘의 백마고지 답사를 마쳤다.

 

 

 

무원마을

http://blog.daum.net/cho2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