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산의 사계

권용옥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자연의 혜택을 받으면서 자연을 느끼고 적응해 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자연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인생 역경을 수 없이 넘으면서 살아간다. 자연도 여러 가지 역경과 계절에 따라 모습이 다르고 느낌도 다르다. 구봉산도 춘하추동 모습을 색다르게 연출을 한다.

구봉산은 전북 진안군 정천면과 주천면에 걸쳐있는 990m의 산으로 운장산과 연석산으로 연결되는 호남 금북산맥의 한 줄기다. 구봉산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1봉에서 9봉으로 이어져 있는 바위 능선과 정상인 장군봉으로 이뤄진 거대한 산이다. 산행의 주 코스는 양명 주차장 뒤에서 작은 개울을 지나 등산로로 접어든다. 등산로는 처음부터 가파른 오름 길로 시작하여 1봉의 안부까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오름의 등산로다. 충분한 준비 없이 시작되는 가파른 등산로가 구봉산을 쉽게 찾지 못하게 한다. 1봉에서 9봉까지는 암릉으로 이어진 등산길로 위험한 곳에는 밧줄을 설치해 놓았다. 최고봉 5봉까지는 오름이 계속되고 6봉에서 9봉까지는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등산로가 돈내미재로 연결된다. 돈내미재를 지나면 등산로는 북쪽으로 깎아지른 절벽 하부를 위험스럽게 지나야 한다. 모든 산이 대개는 그렇듯 정상 8부 능선부터는 가파른 등산로가 계속 이어진다. 마지막 밧줄을 잡고 오르다보면 장군봉에 오를 수 있다. 장군봉에서 남쪽능선을 따라 남릉계곡을 지나 양명 주차장으로 원점 회귀할 수 있다.

구봉산의 봄은 포근하고 아늑하다. 양명 주차장 뒤에 흐르는 작은 개울의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고 밭도랑 건너편에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봄의 포근함을 더해준다. 잘 조림되어 있는 낙엽송에 새로 돋아난 연두색 소나무 잎의 향기를 맡으면서 오름을 시작할 수 있다. 등산로 주변에 야생화가 수줍은 처녀처럼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산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오름을 계속한다. 양지바른 곳은 뭇 잡초들이 고개를 들고 나무들도 긴 겨울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편다. 아직도 응달쪽에 쌓여있는 하얀 눈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 쉰다. 1봉과 2봉 사이에 있는 안부에 도착하여 오른쪽의 1봉을 향한다. 1봉은 위험한 바위 길을 요리 저리 올라가야 하는 어려운 코스였으나 철봉과 밧줄을 설치해 놓아 쉽게 오를 수 있다. 1봉에서 보는 조망은 지금까지 고생하면서 산을 찾은 산사람에게 더 없는 풍경을 보여준다. 땀 흘리며 오르던 등산로가 훤히 보이고 건너편의 산줄기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고 밀려오는 파도처럼 그 끝을 찾을 수 없다. 전형적인 한국의 산야 모습이다. 바위틈에 홀로 서 있는 노송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모습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비바람에 시달려 위로 크지 못하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옆으로 자라 키워놓은 분재처럼 고상하게 서서 멀리 날아가는 산새의 쉼터를 제공하기도 하고 운무에 휘감기기도 한다.

뒤로 방향을 바꿔 2봉을 향한다.

짝을 찾기 위한 산새 소리들은 더욱 커지고 바위틈에 피어있는 보라색 제비꽃을 바라보며 바위 능선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설치해 놓은 쇠봉에 맨 밧줄을 손으로 잡고 오르다 보면 2봉에 오를 수 있다.

2봉은 1봉보다 상부가 넓고 평평하다. 오른쪽으로 이어진 하산 길 인 남쪽 능선이 보인다. 저 아래쪽에 보이는 목장의 모습이 한가롭게 느껴진다.

2봉을 지나 바위 능선을 걷노라면 뜨거운 태양 빛이 온 몸에 작렬하여 땀을 배출시킨다. 땀은 등줄기를 따라서 주르르 흘러 내려온다. 산아래 쪽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의 시원함을 느끼면서 천년세월을 견디어 온 노송의 솔 향을 맡으면서 산행을 계속한다. 건너편 능선의 신록을 바라보며 바위 길을 오르락내리락 걷는다. 그늘 없는 바위 길을 걷다보면 땀이 온 몸을 적신다. 시원한 계곡 물이 그리워진다. 하늘엔 커다란 뭉게 구름이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9봉 중 가장 높은 5봉에 도착한다. 장군봉은 아직도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노송의 그늘 아래서 가지고 온 물 한 모금을 먹는다. 갈증이 사라지고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구봉산은 여름에 등산하기엔 알맞은 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5봉에서 9봉까지는 내려오는 코스다. 가파른 바위 길을 간신히 돌 틈에 발을 의지하면서 밧줄을 잡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돈내미재까지 내려온다.

구봉산의 가을은 장군봉에서 시작된다. 해발 990m 정상에서 서서히 물들이는 단풍은 가을이 깊어갈수록 아래쪽으로 내려온다. 갈색으로 물들이는 참나무 사이로 붉게 물들인 단풍나무의 붉은 색과 녹색의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가을의 깊음을 느낄 수 있다. 불어오는 소슬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와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주봉인 장군봉으로 향한다.

울창한 수목아래 쌓여있는 하얀 눈이 산의 모습을 순백의 세계로 바꿔 놓았다. 삭풍이 몰아치고 입가에서도 성에가 하얀 연기처럼 뿌옇게 뿜어 나온다. 산모퉁이를 휘감아 돌면 깎아지른 바위 절벽 아래로 등산로가 가느다랗게 이어지고 있다. 북향이고 절벽 아래라 길은 빙판이다. 이 빙판 오름 길을 아이젠으로 한 발 한 발 찍으면서 조심스레 걷는다.

절벽은 오래된 절 기둥의 배흘림처럼 불룩 튀어 나왔다. 모진 자연의 풍파를 견디어온 모습을 직감할 수 있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은 두꺼운 빙벽이 되어 바닥에 깔아 놓아 등산의 어려움을 더해주고 있다. 절벽 위에서 툭툭 떨어지는 폭포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내 몸에 떨어져 차갑다는 느낌보다 시린 정도로 느껴진다. 폭포수 아래를 조심스레 지나 긴 밧줄을 잡고 오름을 계속한다. 주먹만한 돌 위에 눈이 두껍게 쌓여 미끄럼이 위험스럽다. 손끝이 시려오고 장갑이 축축하다.

길은 가파른 산등성이 사이로 이어진다. 참나무를 요리 저리 잡으면서 정상을 향하여 걷는다. 중간 중간에 숨을 고르면서 정상을 향한다. 코끝이 시려온다. 이제 정상이 가까워짐을 알 수 있으나 정상은 보여주질 않는다. 아직도 긴 밧줄을 잡고 한동안 올라야만 정상인 장군봉에 도착할 수 있다.

정상에는 돌을 가운데에 쌓아 여기가 장군봉의 정상임을 나타내는 표시 석을 세워 놓았다.

장군봉에서 보는 조망은 일품이다. 나뭇가지에는 얼음 꽃이 활짝 피어있다. 눈에 보이는 곳은 순백의 세계가 장쾌하게 연출된다. 햇빛에 반짝이는 얼음 꽃의 영롱함이 환상적이다. 1봉에서 9봉은 장군봉을 향하여 종대로 서서 예를 표하고 있다. 저 멀리 덕유산의 향적봉 스키루프가 보이고 남덕유산이 보인다. 운장산과 연석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에 쌓인 눈이 더욱 하얗게 보인다. 멀리 마이산의 귀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북쪽의 복두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완만하다. 남쪽능선과 구봉산의 능선이 양명 마을을 휘감고 있어 좌 청룡 우 백호의 명당처럼 아늑하고 평화스럽게 보인다.

장군봉에서 10분 정도 남쪽능선으로 내려오면 저수지로 내려가는 가파른 내림길이 시작되는데 이곳을 지나쳐 남릉계곡으로 산행을 계속한다. 바위가 절리현상을 일으켜 밤톨만한 돌들이 등산화에 밟히고 양지바른 쪽의 눈 녹은 물기가 등산화에 젖는다.

긴 능선을 따라 노승들이 속삭이고 따뜻한 햇볕이 내리쬔다. 오른쪽 능선은 흐름이 완만하다. 왼쪽에 있는 9봉이 횡대로 나타나 1봉부터 9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고 높고 낮고 뾰족하고 뭉툭하고 그 모습이 닮음이 없고 제 각각이다. 정말 장관이다.

한참을 내려오면 잔디가 벗겨진 외로운 무덤이 나온다. 그 옛날 이곳까지 무덤을 쓸 정도면 세도나 재력이 있었을 텐데 이제는 무덤만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참나무 숲 사이로 등산로가 갈지자로 이어져있고 통신시설이 있는 곳을 지나 남릉계곡에 도착한다. 계곡에 시원스럽게 물이 흐른다. 손과 얼굴을 씻으니 시원함이 가슴속까지 전해온다. 통나무로 울타리를 한 별장을 지나면 양명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마을길이 나온다.

해는 뉘엿뉘엿 장군봉 저편에 걸려있고 저녁 노을이 아름답다. 돌아가는 길에 운일암 반일암의 시원한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