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1.31/2.1                포근한 날씨


 


서서히 백두대간 산행의 묘미를 느끼고 그래서 다음산행이 기다려지는 마음이 달궈지고


그 탄력으로 만사 제쳐놓고 향로봉까지 내쳐 달리면 되겠구나 했는데 아직도 우둔한 머리가


그 수순을 못 깨닫고 그날이 그날, 그저 따라가기에만 바쁘다. 허기사 그럭저럭 따라가고


있는 것 만도 큰 소득이고 그러다 보면 뭔 일이 되겠지.


 


오늘도 산행대장의 장황한 설명을 들으니 그림이 절로 그려지는데 근사하다.


유유히 능선길을 걸으면서 시원한 조망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것이냐.  그래서


흥분과 기대를 갖고 눈을 감는다. 오늘 낮 후지산 상공을 나르며 바라본 후지산의 모습,


분화구아래로 5-6부 능선까지 흙 한점 없이 백설로 덮은 미끈하게 잘생긴 후지산의 모습이


봉화산 능선길과 어우러져 그 기대를 한껏 부풀려가며 잠을 청하려는데 웬 취객이 소란피우는


통에 산통나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놈의 소음때문에 좋은 산행을 하려면 마음이 편안해야지 하고 꾹꾹


눌러 참고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그나마 흐트러진 생각을 모아 겨우겨우 모양새를


갖추어 놓고 또 눈을 감는다. 헌데 한번 흩어진 마음은 쉬 가라앉지를 않고 걱정으로 이어져서


어제밤도 얘기로 지세웠고 오늘밤잠도 부실하기가 한줌도 안 될텐데 20키로를 걸을 수 있을까


내심 걱정스럽다.


 



        


 


4:00  무령고개는 달구지가 어쩌다 한번씩 넘나드는 시골길처럼 쌓인 눈이 도로에 그대로


남아있다. 구비구비 돌아넘는 포장도로인데도 제설작업은 전혀 흔적이 없다. 그래서


20여분의 보너스행군을 하여 무령고개 정상의 진입로에 이른다.


 


처음부터 가파르게 10분여를 올라 도착한 곳이 영취산. 여기서 육십령으로 길이 갈려지고


우리는 백운산으로 향한다. 영취산에서 백운산 가는 길, 키를 훌쩍 넘는 산죽사이를 지나갈


때는 앞서가는 사람의 인기척도 없어지고 이따금 길마저 사라져 나 혼자 미로에 떨어진


느낌에 잠시나마 불안하기도 하고 스릴도 느낀다. 수북히 쌓인 눈속에 깊이 박힌 발자국을


따라 하냥 가노라니 포근한 날씨 덕에 순조롭게 백운산 정상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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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백운산을 출발해서


넓은 공터에서 아이젠을 매느라 지체를 한다. 경사가 심하다고 해서 나도 지레 겁먹고 참아


왔던 아이젠을 매서 후환을 없앴다. 그리고 선두따라 간 곳이 엉뚱한 길. 이렇게 우리는


알바를 일상생활처럼 또 했습니다. 오늘따라 심대장이 총기가 흐려지셨나 하와이여행


여독이 풀리지 않았나 갈림길에서 머뭇거림이 잦고 여느 때처럼 발걸음도 알차지가 못하다.


 


가파른 경사길, 눈에 묻혀 위험한 백운산 북사면길을 조심스레 짚어내려간다. 아이젠의 발이


커서 마냥 좋은 줄만 알았더니 밟는 족족 발가락에 온 체중이 눌려 통증이 누적되기 시작한다.


이대로는 않되겠다싶어 쉴 짬에 풀어버릴 생각을 하며 살살 달래 걷다보니 어느새 동이 터온다.


능선길을 이쪽저쪽 돌아서 그런가 방향감각을 놓쳤다가 붉게 물든 하늘을 보고서야 아둔한


이 몸이 서쪽으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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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중치에 도착


백운산에서 푹 떨어져 내린 중치에 도착해서 보니 천혜의 안식처가 있다. 움푹꺼진 공터에


잔디도 폭신하게 덮혀 쉬어가기엔 더없이 좋은 곳에서 허기주린 배를 채우려 한 귀퉁이에


앉았다. 덩치만큼이나 큰 배낭에 카바까지 씌워 짊어지고 다니시는 김종환님, 그 속에서


이것저것 풀어 라면을 맛갈나게 끓이시니 떡으로 허기를 겨우 달랜 이몸 라면냄새에 또


식탐이 도져 군침이 도는 것을 어쩌랴. (부득이 눈을 모아놓고 취사하였습니다) 후미까지


모두 모여 모처럼 흥부네 식구만치나 시끌벅쩍하며 아침을 드는 풍경이 재미있고 이렇게


해서 한솥밥식구가 되는구나 생각했다.


 


쉴 만큼 쉬었고 보이는 능선길을 치달을 생각을 하니 빈속이 나을 것 같아 서둘러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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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길에 올라서니 봉화산 가는 길이 덕유평전만치나 평탄하게 늘어져있고 멀리 앞에


지리산 천왕봉과 종주길이 하늘아래 장벽처럼 우뚝 서 있다. 가스로 희미한 것이 흠이지만


그런대로 지리산의 위용이 그대로 보인다. 양쪽으로 늘어선 산줄기도 봉화산을 수호하기라도


하듯이 쭉 뻗어 능선길 걷는 기분이 천상의 길 처럼 시원하다.


 


갑짜기 나타난 마당만한 바위. 누구나 지나다가 한번쯤 쉬며 수려한 조망에 넋을 빼앗길만한


마당바위에 나도 잠시 누워 이짝 저짝 번갈아 바라보느라니 청산은 내게 말한다. 뭐라더라


..  말없이 살다가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조용히 가라고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쏙으로 그래야 겠지..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고


촌각에 불과한 미물과 같은 우리인생들, 벗어놓을 짐들이 왜 그리 많을까. 어리석은자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처럼 들린다. 대간길 걸으며 얻는 재미가 오늘도 이처럼 소록소록..……..


 


깜빡한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인기척은 없고 심대장은 지나갔는지 아리송하다. 서둘러


시간가늠도 못하고 가던 길을 걷는데 아직도 봉화산이 까마득하고 주위에 보이는 첩첩산중


풍경들은 변함없이 시원스럽고 아름답게 옆을 달린다.


 


봉화산이 가까워지면서 광활한 억새밭이 시작된다. 아름답던 억새꽃은 바람에 난도질당해


줄기만 황량하게 남아 생명보존에 연연하고 있지만 제철이 되면 가히 장관이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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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봉화산에 올라


사통팔달이란 말을 실감한다. 봉화불을 당기면 어디로든지 수십키로를 거뜬히 갈 수 있는


그야말로 산중의 요충지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못다버린 번뇌도 욕심도 봉화불처럼 여기서


멀리 날려보내면 내려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려나 모르겠다.


 


변덕심한 날씨가 양지바른 길을 폭싹 녹여놔 진창길이 되어버렸다. 한번 미끄러져 자빠지면


개망신이다 생각하니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네다리로 꾸부정한 자세를 버티고 더듬거리며


내려오는 모습은 마치 밑 빠진 오리궁둥이처럼 내가봐도 가관이다.


 


이제 종착지도 산 넘어 어딘가 보일 듯하다. 낯익은 도로가 달려오다가 산속에 묻혀버렸고


지난번 걸었던 고남산 능선도 뿌연히 보인다. 지리산에서부터 이어저온 대간 마루금을


어렴풋이 앞뒤로 그려보니 오늘도 큰 걸음을 했구나 싶다.


 


활공기가 하늘을 박차고 올라 유유히 유영하며 내려오듯, 몇 발짝 남지않은 길엔 진한


솔향기가 가득하고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몇 걸음 안가 걸음이 멎고, 아픈 곳도 속속


달래가며, 젖은 길에 옷 버릴새라 온갖 조바심을 떨며, 흥얼거리는 소리에 맞춰 새들의


화답소리도 들으며 소나무 숲을 빠져나왔다.


 


 


어서가서 막걸리 한잔 얻어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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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초스 - 여유로운 백두대간 산행이며 사진도 아주 좋습니다.덕분에 편히 부드러운 억새밭능선을 잘 보고갑니다. 계속 건강하게 진군하시기 바랍니다.
▣ 범바위 - 같이 산행하지는 못하였지만 대원들모습이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