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산행기(19)

 

‘10년간 100군데 산 찾아다니기’ 그 열아홉 번째.

 

1. 산행계획, 그 실행은 쉽지 않다.

 

 바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하루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실업자는 시간도 무척 많고 고민도 그만큼 많다. 반면, 정신없게 바쁜 사람은 시간도 없고 고민도 비교적 적다.

 지난 3월초 우선 5월말까지만 일해주기로 하고 3월 10일부터 서울에서 용인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매일 편도 49km를 달려 출퇴근 한다는 것은 예전의 운전서툰 나로서는 꿈도 못 꾸는 모험이었지만, 기꺼이 각오한데는 이유가 있다. 여러 분야의 영업왕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하루 주행거리에 놀랐고, 하루 200km를 달리는 여인 영업왕을 만나고 나서는 나도 이런 바쁜 대열에 끼고 싶어 했다. 일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판단하기를 고객 100명이 넘으면 꽤 바쁘고 200명이 넘으면 정신없이 바빠 자기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순간 사람들은 일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용인으로 다니다보니, 아침 6시 30분에 서울 집에서 출발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밤 10시 가까이 돼야 퇴근하게 되는 일이 예기치 않은 일상임을 알게 됐다. 그러니 하루 13~14시간은 맡은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도통 시간이 나지를 않았다. 돋보기를 쓴 채 숫자와 씨름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집에 오면 11시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지 13일 째 되는 3월 하순 모기업 임원 출신 어느 분과 자서전 집필 계약을 했다. 연말까지 토요일 일요일만 집필키로 했다. 그나마 주 5일제니 가능했던 거다. 그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평일 외에 토·일요일까지 저당 잡힌 셈이다. 거기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빠질 수 없는 경조사도 많았다.

거창하게 시작된 ‘10년간 100군데 산 찾아다니기’ 도 위태위태하게 됐다.

이어 바쁘다는 이유로 드문드문 이빨 빠지듯 한두 달 빠지다보니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홍역 끝에 정한 목적지가 경남 합천에 있는 가야산이다. 물론, 이 가야산은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로 더 유명한 곳이다.

금요일 아침 용인에서 합천으로 출발할 생각에 차에 짐을 챙겼으나 그날도 퇴근이 매우 늦은데다가 서울까지 갔다가 갈 일이 생겨 출발치 못했다. 결국, 토요일 밤이 돼서야 전에 늘 그랬듯 밤 11시 30분 대구행 심야버스에 몸을 실었다.

 

2. 배갈(고량주)과 시루떡

 

 나는 바로 잠이 들었다. 잠을 자기 위해 라면에 술을 반 컵 마신 것이 주효했다. 심야버스를 기다리면서 술 한 잔 생각이 간절했다. 오늘 따라 배갈에 구미가 당겼다. 막걸리는 양이 많은데다가 용기가 컸고, 소주는 독한데다가 날카롭게 깨지는 유리가 싫었다. 고량주로 불리는 배갈은 원료도 요즘은 보기 힘든 수수라 잊혀진 추억도 살려냈다. 특히, 중국 공리 주연의 ‘붉은 수수밭’ 도 그렇고, 어린 동생 돌에 해주던 수수팥떡의 붉은 수수도 그렇다. 배갈은 크기도 손바닥만 하고 제법 독해서 근처 중국집에 가 3천원을 주고 샀다. 라면을 먹으면서 물 컵에 반을 따라 마시자 ‘캭’ 소리가 절로 나며 딱 좋다.

다만, 술에서 나는 향기가 무척 거슬렀고 메스꺼웠다.

그렇게 동대구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새벽 3시.

그런데 합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서부터미널로 가야한다는 거다. 행인에 물어보니 여기서 거기까지는 극과 극이라는 거다, 일단 택시로 이동했다. 택시비가 8,500원 나왔다. 그런데 그곳에 가니 흔한 찜질방이 보이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많이 돌아다니는데 두 시간 정도 보낼 마땅한 곳이 없다니. 재래시장에 들렀더니 벌써 두 집이나 문을 열고 장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시루떡은 천오백 원, 촉발은 3천원을 내주고 점심으로 샀다.

거의 한 시간을 헤매고 DVD 영화관을 발견했으나, 한 편을 다 보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그때서야 찜질방이 10분 거레에 있음을 알았다. 이제는 소용이 없다.

5시 30분.

구수한 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잠시 후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6시 40분 버스로 합천 해인사로 이동했다.

 

3. 터무니없는 소실 이유

 

 유적지 부근만 울창한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계곡을 따라 길고 긴 노송 무리가 차창 밖으로 지나가 바깥 풍경 자체가 역사의 무게로 다가왔다.

주차장에 오니 8시.

거기서 한 시간 이상 유서깊은 해인사를 둘러보았다.

1200년 됐다는 죽은 느티나무 고목.

주변 나무들을 보니 수령 수백 년은 보통이고 천년을 넘나드는 나무도 더러 보이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경내로 들어갈수록 오르는 계단을 밟아 높은 곳에 오르는 구조는 큰 절 모두 비슷했다. 경외감을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 오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역사에 빛날 행적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김영환 장군의 해인사공적비였다.

우리는 숭례문이 불타면서 문화재는 삽시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도 쉽게 사라질 수 있음을 화면을 보면서 목격했다. 그 비슷한 위기를 팔만대장경도 겪었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

공적의 내용은 이렇다.

1951년 12월 18일 미군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기의 공군 편대에 명령을 내렸는데 이 편대장이 31세의 김영환 대령이었다. 당시 이 전투기에는 네이팜탄과 로케트탄을 싣고 있어 네이팜탄 하나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잿더미로 변해 버릴 위기였다.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당시 가야산 일대에 있던 인민군 낙오병 500여과 유격대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함인데 전시작전권 없는 국군으로서는 미군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즉결처분을 받을 수 있어,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항명이었다. 그 명령을 거부하고 해인사와 대장경을 지킨 영웅이 김영환장군(당시 대령)이다. 명령 불복종죄로 미군 작전 사령부에 호출되어 간 김영환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로 영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국의 대 문호, 세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해인사 팔만대장경과는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오가는 승려들의 표정을 볼 때마다 그들의 품은 생각이 궁금했다. 특히, 승복을 입은 젊은 남녀들을 보면 더욱 그러했다. 벽화를 볼 때도 그 불화가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다. 스님이 호랑이를 타고 길을 가는 것도 그렇고 문설주에 매단 밧줄이 나무 밑동에 엮여 있는 것도 그렇고 스님 앞에 세찬 물결이 그려진 것도 무언지 잘 모르겠다.

알아서 생각하라는 건가.

불화감상법이라도 익혀야할 노릇이다. 일반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면 그런 설명은 당연할 듯한데. 오가는 사람들 바쁜 세상에 언제 따로 시간을 내어 연구할 수 있을까.

팔만대장경도 그렇다. 불경 역사도 길어 패다라라는 나뭇잎에 칼끝이나 송곳으로 새겨 만든 패엽경에서 출발했다. 경전의 종류도 많거니와 내용도 광범위해서 이것을 읽는 일에 평생 고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일반인이 범접 못할 벅찬 경계 같아 반감도 좀 있다. 생각 많고 시간 많이 들여 이룬 결과가 위대한 업적일 수도 있으나, 사회를 정적으로 몰아가는 위험이나 단점도 있기 때문이다.

9시 30분경.

목적지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가야산 이정표만 보고 따라 올라갔다. 희한한 것은 그렇게 유명한 사찰이 있는 산인데 산행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본 젊은이들 4명을 제외하고는 2.6km 극락골 갈림길까지 가는 한 시간 동안 한 사람도 보지 못해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몇 번이나 고민했다.

걷다보니 10시 30분 됐다.

 

4. 상왕봉(우두산)

 

 1.4km를 한 시간 반 걸어 12시에 정상 아래에 도착했다. 그런데 젊은 행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가야 산이지 안가면 산이 아니라는 농담과 정상까지 안 갔으면 그런 정상이 있는지 알았겠느냐는 그 여인의 말이 솔깃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이제 그만 내려갈까 생각할 정도로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참고 견뎌 언덕 정상에 오르자 평원처럼 시원한 앞이 전개됐고 확 트인 하늘이 웅장하게 다가왔다. 유쾌하게 걷다가 또 올려다보니 상왕봉이 우뚝 서 있다.

가야산 하니 가야국이 떠올랐고 요새 같다는 생각 끝에 고구려의 도읍지 오녀산성(졸본)이 떠올랐다. 물만 있다면 철옹성일 수 있다. 주변에 좋은 곳이 더 있었지만 아껴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반기는 연분홍 철축인지 진달래인지 너무 새롭다. 왜 이제 오는가 묻는 것 같다. 셔터를 눌렀다. 해발 1430미터의 정상은 바람도 세었지만 산행의 시원한 보람도 무척 컸다.

 

4. 하산

 

 한 쪽에 앉아 시루떡을 먹는데 아직도 온기가 있다. 쫄깃쫄깃한 것이 무척 맛있다. 요즘도 시루에 떡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정겹다. 남은 배갈을 홀짝홀짝 마신 후 족발을 뜯으니 그 맛도 그만이다. 그러면서도 배갈의 지독한 향기는 무척 싫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걷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니 무척 멀게 느껴졌다.

주차장에 오니 2시 40분.

노파가 정정한 모습으로 호령하며 표를 파는데 시간을 기다려 3시 20분에 해인사를 떠났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한 후인 4시 50분에 서부터미널에 도착했다. 그곳이 전철역 성당못역이다. 전철을 타고 동대구로 갔다. 그러고 보니 심야버스에서 내려 택시타고 갈 일이 아니라 근처 찜질방에 들어가 있다가 전철 다니는 시간에 지하철로 서부터미널로 이동했어야 맞는다. 5시 20분 동대구에 도착했고, 6시 10분에 고속버스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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