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상)


가. 산행 계획


(1)
12년 째 근무하는 우리 회사에서는 매년 겨울에 속리산에서 冬季敎育을 하는데
교육 마지막 날 아침에 문장대 登頂 과정이 있다.
교육을 빼먹은 적이 없으니 문장대에 12번은 오른 셈이다.
학창시절에도 오르고 아내와 오른 적도 있으므로 15번 이상은 오른 것 같다.
문장대에 3번 오르면 神仙이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오르고도 아직 신선을 모르니 30번은 올라야 어떤 조짐이 보이려나?
아무튼 문장대에서 바라보는 장쾌한 충북 알프스를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縱走해보리라 다짐하며 그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2)

충북 알프스는 크게 [서원리-구병산-장고개]의 남릉 구병산 구간,
[장고개-형제봉-천왕봉-문장대]의 주능선 구간,
[문장대-관음봉-묘봉-상학봉-활목고개]의 북릉 암릉 구간의 3개 구역으로 大別되는데
그 거리는 무려 44km에 달한다고 한다.
급경사의 오름과 내림이 예사롭지 않은 구병산 구간,
암릉과 급경사로 어우러진 공개된 주탐방로인 주능선 구간,
기암과 괴석의 암릉미가 압권이어서 속리의 속살이라고까지 칭하는 암릉 구간 중
어느 하나 만만한 區間은 없다 할 것이다.
그동안 오를 때 마다 쳐다보는 관음봉, 묘봉, 상학봉, 천왕봉, 구병산은
어서 오라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종주는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내고
계획은 圖上으로만 그치고 말곤 하였었다.

(3)
그러나 묘봉이나 상학봉이 암릉의 壓卷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젠가는 마주해 보리라며 숨겨놓은 보석처럼 마음속에 품어오던 차였다.
매번 문장대에 오를 때 마다 그러한 熱望은 더하였지만
직장인으로서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44km라는 長距離와

암릉이라는 障碍物 앞에는 그 意志를 접고 [문장대-천왕봉]정도로만 만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번 [만인-식장]능선과 계룡 남부능선 20km를 동반 종주한
농협 오병관 사장님과 달포 전에 속리산 종주에 의기투합하였는데
역시 등산 베테랑인 박상채차장이 가세하여 상세한 계획을 짜 둔 터였다.


 

나. 속리산과 암릉의 형성에 관한 자료 조사


(1)
속리산의 유래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었다.
속리산이란 “세속을 여읜 산”이란 뜻으로 옛 이름은 구봉산(九峯山)인데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風岳鉢淵數石記)”에 의하면
법주사가 창건된 지 233년 후인 신라 선덕왕 5년(784년)에,
이 구봉산을 지나던 금산사의 고승
진표(眞表) 율사 앞에 지나가던 소달구지가 멈추어 선다.
소가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다. 주인이 그 이유를 물으니 율사는
“이 소는 겉으로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이렇게 우는 것이오.” 한다.
이 말에 감동한 주인은 스스로 낫을 들어 머리카락을 자르고 율사를 뒤따른다.
“축생도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사람에게 어찌 신심이 없겠습니까?”라는 이유였다.
이후부터 구봉산을 속리산이라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신라 말 대문호이자 학자였던 최치원이
이곳 속리산을 찾았다가 읊었다는 시(詩),


‘바르고 참된 도는 인간을 멀리하지 않는데,    (道不遠人)
인간은 그 도를 멀리하려 든다.                 (人遠道)
그렇듯 이 산은 매양 세속을 떠나려 하지 않는데 (山非離俗)
세속은 산을 떠나려 한다.                      (俗離山)


에서 지금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는데
그만큼 이곳은 말티를 넘어서면
세속과는 단절된 풍광을 연출하였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지금이야 관광지로 변모하고 말았지만
우리가 탐방하려는 3개 구간 중 어느 곳인가에는 분명
그러한 이름에 걸맞은 풍광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2)
地政學的으로 살펴보면 백두대간이 남서진하며 태백산과 소백산,
그리고 죽령과 이화령 사이에 월악산群을 품어내고
이내 방향을 남으로 돌리는 지점,
한반도 남쪽 땅덩어리 한가운데에 또 하나의 名山을 일구어냈으니
바로 충북 보은과 괴산,
그리고 경북 상주와 문경 사이에 위치한 속리산(1,058m)인 것이다.
속리산은 일반인들에게 산 자체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 대사찰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진
법주사와 조선조 임금 태종에게 벼슬을 하사받았다는
正二品松이 산자락 내에 자리 잡고 있어 더 잘 알려진 산이다.
그러나 구병산(876m)에서 형제봉(803m)을 거쳐 속리산에 이르는 산군(山群)은
산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북 알프스’로 통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산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3)
속리산은 주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길상봉, 수정봉, 문수봉, 관음봉 등
1,000m 내외의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고,
그 사이로 문장대, 신선대, 입석대, 경업대, 학소대, 배석대, 산호대, 봉황대 등의
기암괴석과 암릉이 울창한 산림과 어우러져 뛰어난 풍치를 자아내고 있다.
이로 인하여 속리산은 설악산, 월출산, 계룡산, 북한산, 월악산 등과 함께
남한을 대표하는 암산(巖山)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봄철 산 벚꽃, 여름에는 청송, 가을의 단풍, 겨울철 설경으로 바꿔가며
사시사철 장관을 이루는 속리산은
우리에게 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속리산의 진수는 역시
설악산, 월출산, 북한산, 도봉산 등과 더불어
산 전체가 바위로 넘쳐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등 완만한 산릉으로 육산(肉山)
혹은 토산(土山)의 형태를 이루며 북상하던 백두대간은
이곳 속리산에 이르러 그 형상을
골산(骨山)과 암산(巖山)으로 바꾸며 크게 솟구쳐 올랐다.

(4)
속리산은 처음에는 主峰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비로봉, 길상봉, 관음봉, 수정봉, 보현봉, 문수봉, 묘봉 등
아홉 개의 連峰으로 활처럼 휜 형상을 이루었다고 하여 구봉산(九峯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우리나라 8경의 하나로 그 절경이 금강산에 맘먹을 만큼 뛰어나 소금강(小金剛),
혹은 제2금강(第二金剛)이라고도 하며, 또 광명산(光明山)이라 불렸다고도 전해진다.
사시사철 秀麗한 山勢를 자랑하며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속리산이 만들어낸
깊은 계곡에 들거나 능선 자락에 오르면 어느덧 俗世의 시름과 고뇌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능선과 계곡에 발달한 수많은 奇巖들이 불을 뿜어내듯 하는,
기품과 위용이 넘쳐나는 속리산의 絶景은
마치 속세를 떠난 선경과도 흡사하여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5)
속리산은 풍수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산(火山)으로 통한다.
이는 바위들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같은 형국으로
산 전체를 덮고 있는 광경을 두고 일컫는 것으로 여겨진다.
속리산 이곳저곳의 능선을 타고 넘쳐나는 기암들,
그리고 속리산에 속하는 산군으로
큰군자산(948.2m)과 칠보산(778m)을 끼고 발달한 쌍곡계곡,
도명산(643m)과 낙영산(684m) 아래로 발달한 화양구곡에 가득 들어선 기암들은
속리산의 진면목이 바위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 속리산은 산 전체가 바로 하나의 암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
산 전체에 다양한 형태의 암괴들이 넘쳐나고 있다.
속리산은 그야말로 ‘바위들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과연 이렇게 많은 바위덩어리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인가?
이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지질사에서
가장 지각변동이 심했던 중생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생대 당시 한반도는 여러 차례에 걸쳐 거대한 화산이 폭발하며 땅이 갈라지고,
이로 인해 지각의 일부가 내려앉고 올라가며,
또 지층이 휘어지는 등 단층과 습곡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났다.
그야말로 한반도는 ‘불의 시대’를 맞아 땅덩어리 전역이 요동쳤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한반도를 차지하는 암석 가운데
약 30% 가량의 화강암이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관입되어 형성되었다.


(7)
화강암은 대규모 지각변동에 따라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고온의 불덩어리인 마그마가
지각의 약한 틈을 뚫고 올라오다가 냉각·고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지하의 화강암 암반을 덮고 있던 지표 물질들이
오랜 세월의 지질 시대를 거치며 깎여 나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속리산을 포함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설악산, 월출산, 계룡산, 북한산, 월악산 등의
화강암 산지들은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중생대 지각변동의 산물이다.

(8)
다만 화강암 산지별로 그 화강암의 형성 시기가 각기 다르다.
화강암 관입과 관련하여 한반도 중생대에 일어났던 화성활동은
크게 3차례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트라이아스기 중기(약 2억2천만~2억1천만 년 전)에 송림 운동으로 인하여
평안북도와 함경남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송림화강암’이 관입되었다.
이후 쥐라기 중기에서 말기(1억8천만~1억6천만 년 전)에 걸쳐 대보 운동으로 인하여
원산~서울을 잇는 추가령구조곡 이남에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은 ‘대보화강암’이 관입되었다.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설악산, 계룡산 등을
이루는 화강암들은 이 당시에 생겨난 것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악기 중기 이후(1억~7천만 년 전)에 일어난 불국사 변동에 의하여
경상퇴적분지와 옥천습곡대 주변 지역에 소규모의 ‘불국사 화강암’이 관입되었다.
월출산, 월악산, 속리산 등을 이루는 화강암들은 이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9)
속리산이 위치한 이 지역 일대의 기반암은
고생대 당시 이곳이 바다였을 때 쌓여 형성된
옥천누층군에 속하는 변성퇴적암이 주를 이룬다.
속리산을 이루는 화강암은 중생대 백악기 말 9천만~8천만 년 전
바로 한반도에 공룡들이 넘쳐나고 있을 당시
붉은 마그마가 변성퇴적암의 기반암을 뚫고 관입한 후
지하 약 3~4km 부근(대보 화강암은 약 10~12km)에서 식으면서 굳어져 형성된 것이다.
속리산에서 북으로 뻗어나간 지산(枝山)에 속하는
도명산, 낙영산, 군자산, 백화산, 칠보산, 대야산 등에 분포하는 화강암들 또한
모두 속리산의 화강암과 동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이를 총칭하여 ‘속리산 화강암’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북동쪽으로 더 멀리

주흘산, 조령산, 신선봉, 만수봉, 포암산, 월악산, 구담·옥순봉, 제비봉, 금수산으로 이루어진
월악산군(월악산 화강암이라고 말함) 또한 속리산과 거의 같은 시기에 형성된 화강암체로,
백두대간을 타고 속리산군과 연결되어 있다.

(10)
그렇다면 지하 약 3~4km 부근 깊은 곳에 있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어떻게 해서 지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일까?
화강암 관입 이후 오랜 지질시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지반이 융기함과 함께 피복 물질들이 침식과 풍화를 받아
차츰 깎여나가면서 지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생대 제3기 중신세 약 2,300만 년 전 한반도에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지질구조선인 소백산맥은
속리산의 화강암체를 지표로 드러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1)
소백산맥의 형성으로 지반이 높게 융기하게 되자
하천의 침식력이 증가하여 피복 물질들은 보다 빠르게 깎여나갈 수 있었다.
소백산맥의 형성은 지하 깊은 곳에 있던
화강암체의 육상 출현을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약 3~4km에 달하는 두꺼운 피복층이
중생대 백악기와 신생대의 지질 시대를 거치며 모두 깎여 나갔다.
속리산의 화강암이 아름다운 얼굴을 내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인간의 시간관념으로 쉽게 가늠하기가 어렵다.

(12)
속리산 능선과 계곡 곳곳에는 특이하고도 기묘한 형태의 암석 지형들이 널려 있다.
마치 돌을 일부러 조각하여 쌓아 놓은 성곽 같기도 하고
혹은 비석, 돌탑 같기도 한 다양한 암괴 지형들이 산지 전역에 넘쳐난다.
마치 칼로 무를 자른 듯 정교하게 재단되어 있는
암석 무더기들이 저마다 모양새를 갖추며 산릉과 계곡 곳곳에 들어서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암석 예술을 거석 체험을 통해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속리산이다.

(13)
단단한 화강암 덩어리들이 이와 같이 다양한 암괴 지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화강암 재단의 마술사’인 절리(節理, joint) 작용 덕분이다.
화강암은 지표 가까이로 올라오면서 점차 압력의 하중이 제거됨에 따라 팽창한다.
이때 암체에는 팽창에 의해 금이 가면서 갈라지는 절리가 발생한다.
이때 절리는 보통 수직 및 수평 방향으로 발달한다.
이후 암체에 발달한 절리면을 따라 수분이 침투하여
암석을 구성하는 광물질들과 반응해 화학적 풍화를 이끌고,
또한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한편
나무와 이끼 등의 뿌리가 안착하면서 그 틈새를 더욱 벌리는 등의
기계적 풍화가 암석의 붕괴를 촉진시킨다.
그 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표를 덮고 있는 피복 물질들이
빗물, 바람, 하천수 등에 의해 씻겨 내려간 후
지표에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14)
화강암은 매우 단단한 암석에 속한다.
그렇지만 화강암이 일단 지하 심층부에서나
표층에서 물과 접촉하면 쉽게 풍화되어 부서지는 특성이 있다.
실제로 북한산이나 도봉산 등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을 오를 경우

등산로를 따라 화강암이 풍화되어 쉽게 부서져 내리는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화강암의 푸석푸석한 풍화토를 가리켜
‘썩은 바위’ 혹은 ‘석비레’라고 말하며,
지형학 용어로는 새프롤라이트(saprolite)라고 한다.
한편, 화강암에 가해진 절리의 방향과 발달 정도에 따라
그 암괴의 형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수직 방향의 절리가 탁월할 경우 암주(巖柱) 모양의 기둥 바위들이 발달하는데,
입석대를 중심으로 문장대에 이르는 종주 능선을 따라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판상의 수평절리와 수직절리가 서로 동일한 간격으로 형성된
격자상 절리가 발달할 경우는 모서리 풍화가 진행되어
핵석(核石·tor)이라고 하는 돌알(돌탑) 바위들이 발달하는데,
문장대에서 청법대, 그리고 칠형제봉으로 이어지는 곳에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수직보다는 판상의 수평절리가 탁월할 경우는
평탄한 너럭 형태와 돔 모양의 바위들이 발달하는데,
경업대를 비롯하여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 등이 이에 속한다.

(15)
그런데 속리산의 주봉을 이루는 천왕봉만큼은
유독 그 형상이 다른 봉우리들과 달리 펑퍼짐한 육산의 형태를 띠고 있어 특이하다.
이는 어떤 이유에서일까?
천왕봉 일대를 이루는 화강암은 주변 암석에 비하여
절리의 규모가 미세하게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화학적인 풍화작용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기 때문에
다른 능선과 봉우리에 비하여 침식과 삭박이 빠르게 진행되어
암석 파괴가 손쉽게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두꺼운 토양층의 피복이 형성되어
여러 다른 암봉들과 같은 걸출한 암석의 돌출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16)
한편, 남한만을 두고 이야기할 때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속리산에서
한남, 금북정맥으로 갈라지는 까닭에 속리산은 국토의 종갓집 산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를 반대로 표현하면 남한 땅의 산줄기들이
이곳을 정점으로 몰려드는 형세라고도 볼 수 있다.
속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꼭짓점으로 하여
남한 땅의 모든 산들이 뻗어나가고 또 이곳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이러한 지형에 의해 한반도 남반부의 대동맥을 이루는
한강, 금강, 낙동강 등의 삼대 강은
이곳 속리산을 기점으로 서로 물길을 달리하며 나누어져 흐른다.
바로 그 삼파수(三波水)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이 속리산의 정상 천왕봉이다.

(17)
1481년 우리나라의 지리, 풍속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한강, 금강, 낙동강의 물이 나누어지는 삼파수의 기점이
속리산의 문장대라고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속리산은 보은현 동쪽 44리 되는 곳에 있다.
아홉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산꼭대기에 문장루대가 있다.
문장루대는 천연적으로 돌이 포개져 힘차게 공중에 솟아 있는데,
그 높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그 넓이는 삼천 명이 앉을만하다.
이 누대 위에 가마솥 같은 구덩이가 있는데
물이 철철 넘쳐서 가뭄에 줄지 않고 장마철에도 불지 않는다.
이 물은 세 갈래로 나누어져(삼파수) 흘러내려 가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꺾어진 것은 달천(한강)이 된다.’

(18)
그러나 필자의 답사와 지형도 판독에 의하면
이는 지극히 잘못된 사실이기에 바로잡는다.
문장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경북 상주시 하북면 용유리를 지나
농암천을 따라 문경시 가은면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낙동강의 발원지에 대한 설명은 옳다.
그러나 문장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는 금강이 아니라 한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장대 남쪽으로 파인 용바위골을 타고
법주사를 돌아 나온 물이 대청호로 흘러들어 금강에 이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물은 금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내속리면 상판리를 지나면서 물길을 갑자기 북쪽으로 돌려
보은군 산외면 백석리~청원군 미원면 운암리~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를 거쳐
남한강 지류인 달천으로 흘러든다.
따라서 문장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이 아닌 한강으로 흘러든다고 함이 옳다.

(19)
문장대를 기준으로 서쪽으로 흘러드는 물 또한 달천(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문장대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정낭골과 합산골을 타고 흘러내려
상주시 화북면 중벌리~운흥리를 거쳐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를 타고 달천(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러므로 문장대가 삼파수의 분기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속리산에서 금강의 물길을 가르는 분수령은
문장대가 아닌 속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이다.
천왕봉에서 남쪽으로 파인 대목골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삼가 저수지를 거쳐 삼가천을 타고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탄부면 하장리~마로면 관기리~옥천군
대청호로 흘러들어 금강에 이른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동국여지승람에서 속리산의 문장대를
우리나라 남한 땅의 삼파수로 단정 지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형적으로 볼 때 한강, 금강, 낙동강의 삼파수 기점을
문장대에서 천왕봉으로 옮겨 놓고 보면 삼파수의 물길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우평 백령종합고교 교사 http://blog.naver.com/doll114 에서 참조]






다. 제 1 구간 [활목고개-상학봉-묘봉-문장대]


우선 단풍을 놓치기 전에 06/10/14(토)
북릉인 [활목고개-상학봉-묘봉-문장대]구간을 감행하고,
06/10/21(토) 주릉인 [장고개-형제봉-천왕봉-문장대]를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남릉인 [서원리-구병산-장고개]구간은 後日을 도모키로 했다.
그러므로 금번 종주 산행의 순서는 북릉, 주능선, 남릉의 順序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이품송이나 법주사및
속리산 초입은 이번 탐방구간에서 제외 될 것이다.

資料에 의하면 충북 알프스의 終點은 충북 신정리(新正里)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도를 보니 진정한 종주자들 대부분의 탐방로가
일반인들의 묘봉, 상학봉 들머리인 충북 신정리 바윗골이나
경북 운흥리(雲興里) 사기매기골이 아니라
마루금이 이어지다 내려앉은 활목고개란 사실을 알았고
우리는 그 활목고개를 산행 깃점으로 잡았다.
신정리로부터 상학봉까지가 4km이므로 활목고개까지는 7km정도라고 추측해 본다.
04:30분 기상,
아내가 차려주는 국밥을 먹고,
역시 정성껏 장만해준 도시락과 준비물에 배낭에 차곡차곡 넣고,
약속장소에 05:30분 집결,
경부고속국도와 옥천-보은 도로를 이용하여 활목고개로 향하였다.

(1) 활목고개-미남봉(656m)

[07:00-07:50, +50=50분]

활목고개에 도착하니 정확히 07:00다.
고개 너머로 아침햇살이 막 퍼져 오르고 있다.
부지런한 농부 한 분이 지나간다.
확실히 確認하기 위하여 여기가 활목고개냐고 물어보니 맞단다.
그런데 登路 입구에 [활목고개-상학봉]구간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다.
그제야 충북 알프스 종점이 왜 신정리로 되어있는가를 깨달았다.
첫 봉우리가 나타나기까지는 추석 성묘객들이 수풀을 제거하여 편안했다.
무명 묘지를 지나자 수풀이 우거져 있지만 지나갈만하다.

안부에 도착하자 몸을 움직이는 腸운동을 하여서인지 뒤가 마렵다.
일행에 먼저 가라하고 일을 보니 그 시원함이란?
大自然 속에서 뒤를 보는 맛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난 일부러 산행 전 참았다가 1시간 정도 오른 다음
산속 편안한 곳에서 뒤를 보는 습관이 있다.
대자연에 영양분을 주고 난 기쁨을 얻고...(一石二鳥)
안부를 지나자 북릉의 眞面目이 시작된 듯 된비알이 시작된다.

산행기에서 본 미남봉의 전위봉인 것 같다.
급경사인데 아직 바위지대는 아니지만 여간 힘들지 않다.
안부에 올라서니 드디어 바위가 나타난다.
그 바위에 올라서니 미남봉이라 짐작되는 봉우리가 나타난다.
그런데 미남봉이라면 예뻐야 할 텐데
산 정상까지 참나무가 자라는 그저 그런 肉山이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직은 모르겠다.



(2) 미남봉(656m)-매봉(593m)

[07:50-08:50, +60=110분]


오늘은 베테랑인 박차장님이 先頭에 서고 제일 미숙한 내가 中間에,
역시 탄탄한 저력을 과시하는 오사장님이 後尾를 따라 가기로 하였는데
나는 중간에 끼어서 요령도 피울 수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두 분과 이야기하기가 좋은 위치였다.
박차장님의 걸음걸이를 보건데 역시 등산 베테랑임이 틀림없다.
산을 좋아 하는 분이라고만 알았는데 이야기를 하여보니
내가 지난여름 갔던 일본 북알프스도 다녀왔고
티베트 라싸 인근의 해발 6000m급 산에도 다녀오셨단다.
그 말씀을 듣고 박차장님을 다시 보니
딴딴한 몸매, 사뿐사뿐한 걸음걸이, 가벼운 손놀림등이 예사로이 보이지 않고
전문 등산가의 냄새가 철철 넘쳐난다.

미남봉을 넘자 다시 내리막이다.
안부를 지나자 다시 오르막인데 마루금에 다다르자 긴 능선이 이어진다.
능선 갈림길에 송이 채취를 금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때론 암릉도 출현한다.
능선을 따라가는데 부부가 사이좋게 앉아서 朝食을 들고 계시다.
그런데 부인은 장화를 신고 계시다.
우리가 다가서자 “많이 따셨느냐?”고 물어온다.
그제야 그들이 송이 채취꾼이라는 걸 알았다.
청주에서 새벽에 오셨다는데 불법채취라는 것에 良心이 걸리는지
쭈뼛쭈뼛하는 것이 역력하다.
활목고개 구간이 입산 금지구역이고 충북 북알프스의 종점이
활목고개가 아니고 신정리인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다.
국가에서 許可를 맡아 인근 농촌 마을에서
송이를 채취하는 지역을
우리가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눈이 아주 크게 떠진다.
아주 귀하다는 자연 송이를 얻을 수 있는 幸運이 따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3) 매봉(593m)-상학봉(862m)

[08:50-10:00, +70=180분, +7=7km]

산행시작 1시간여가 지나니 그제야 몸이 풀리는 것 같다.
산행이란 아무리 완만한 코스라 하더라도 처음이 힘들다.
그러나 1시간정도가 지나면 아무리 된비알이 나오더라도
적응이 되는 걸 보면 평소에 운동 부족임을 실감하겠다.
매봉으로 짐작되는 봉우리를 우회하자 584봉이 나타나고 암릉지대가 연속된다.
길가의 야생화는 시들어 가고 산부추만이 뒤늦게 자주색 꽃을 벌려보고 있으나
차가운 서리에 그마저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신정리에서 올라오는 정규 충북알프스 갈림길이 나타난다.
여기서 왼쪽은 경북 운흥리 사기매기골로,
오른쪽은 충북 신정리 바윗골로 내려가는 길인 것이다.
그 안부를 통과하자
속리산 特有의 붉은 광물질을 포함한 커다란 덩치의 바위들이 나타난다.
이른바 1억 년 전, 지하 4km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온의 마그마가 유입되어
서서히 식으면서 탄생되어 잠자다가
2천만 년 전에야 대지긱변동으로 지상에 고개를 내밀어
갖은 풍상에 씻겨 생성된 문경석이라는 화강암이다.
그러니까 이 놈들 위로 4km두께의 흙이 덮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대자연의 장엄한 조화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곳은 큰 돌덩이들이 포개어져
그 돌 틈으로 난 개구멍 같은 곳을 기어서 통과해야 하고
20여m의 직벽을 외줄을 잡고 올라야 한다.
그렇게 암릉을 통과하다 보니
커다란 기암으로 피라미드같이 구성된 상학봉이 보인다.



(4) 상학봉(862m)-855봉

[10:00-10:40, +40=220분]

상학봉(上鶴峰)은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정작 표지석은 그 바위에 있지 않고 頂上 아래 平地에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정상부위가 좁아 낙상사고가 날 것을 염려하여 옮겨 놓은 듯하다.
정상엔 표지석이 설치되었던 흔적이 있다.
철계에 올라 정상에 앉아서 지나온 길을 바라보니
4시간여 답사한 길이 아스라하다.
그리고 왜 미남봉인지 몰랐던 그저 그런 산이었던 미남봉이 예쁘게 보인다.
우리가 밟지 않았던 신정리 쪽 斜面이
암릉으로 구성되어 반듯한 美男의 앞이마 같다. 
그러므로 미남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할 것이라고 수긍해본다.
앞으로 가야할 길을 보니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묘봉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위치에 있고
높다란 관음봉이 뒤에 떠억 버티고 있다. 그 뒤로 문장대도 아스라이 보인다.

상학봉은 이름 그대로 정상 부근 암봉에
상급의 학들이 많이 모여 살았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상학봉에서 묘봉 쪽으로 가는 길은
속리 북릉 중 암릉의 압권 지역으로 능선을 따라가 보면
옛날에 어떤 사람이 돈을 몰래 만들었다는 주전봉과
감투바위, 낭바위, 덤바위, 말바위, 병풍바위, 애기업은바위, 장군석, 치마바위 등
기묘한 암석으로 형성된 바위들이 봉우리 주변을 장식하고 있슴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기암들을 눈요기하기에도 바빠 디카에 담을 여유가 없다.
기암에 한눈 팔다보니 드디어 855봉 턱밑이다.



(5) 855봉-묘봉(874m) 

[10:40-11:20, +40=260분, +1.3=8.3km]

상학봉을 내려오니 급전직하의 암릉이 이어지며 노련한 박차장 조차 헤맨다.
그러나 그는 길이 아닌듯한 암릉 샛길을 용하게 발견해내는
노련한 마술사같이 요리조리 잘 찾아 가신다.
바위 사이 개구멍 같은 곳에
붉은 스프레이로 화살표가 그려져 있어 산꾼들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화살표가 자연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본 북알프스 암릉지대에도 흰 스프레이로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는데
자연과 안전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그 화살표 덕에 쉽게 길을 찾았다면 마땅히 화살표에 감사해야 하지만
그래도 고개가 갸웃해짐은 자연에 대한 사랑이 깊어서일까?
안부까지 안착하자 다시 벼랑길이 나타난다. 절벽과 절벽사이로 奈落이 보인다.
地獄의 奈落이 있다면 이러한 모습일까? 대단한 절벽이다.
누군가 통나무로 사다리를 엮어 놓았다.
거기를 오르니 다시 외줄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를 통과하자 널찍한 마당바위가 나타나 한숨을 돌리며
법주사 방향을 조망하나 법주사는 보이지 않고
수많은 봉우리들이 수 없이 솟아 있어 東洋畵를 그린다.
마당바위에서 한숨을 돌리고 일어서자 다시 암릉이 시작되는데
긴장을 늦추지 않아서 인지 이제 저런 암릉이 예사로 보인다.
계룡산 쌀개봉 암릉의 열배정도 되는 암릉이 도열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위형상도 기기묘묘하다.



(6) 묘봉(874m)-북가치(770m) 

[11:20-11:45, +25=285분]

힘겹게 묘봉에 오르니 널찍한 바위가 있다.
뒤로 바위를 기대니 편안하다.
앞엔 경북 화북면의 산골짜기가 발아래 엎드려 있다.
살펴보니 그 골짜기에도 예쁜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서 있다.
그 골짜기로 수많은 암봉의 산줄기가 아름다움을 뽐내며 달려가고 있다.
지나온 상학봉은 산 전체가 커다란 바윗덩어리인데
歲月의 흐름에 군데군데 침식당하여 아름다움을 더한다.
갈 길을 살피니 커다란 바위를 머리에 인 큰 산이 바로 관음봉으로 보이는데
거기까지도 크고 작은 봉우리 4개가 도열해 있고
관음봉 뒤로도 문장대에 이르기까지 巖峯들이 줄지어 읍소하고 있다.
그러한 암봉들은 흡사
하느님이 무언가 만들려고 조각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미완성품인 것 같지만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는
거의 완성된 듯 온갖 動物과 事物을 닮아 있기도 하다.

두류봉이라고도 하는 묘봉에서 숨을 돌리고
보은에서 오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려오니 또한 급사면의 내리막이다.
역시 암굴과 直壁에 걸린 외줄을 잡고
잘록이에 도달하여 살펴보니 북가치(北加峙)라는 곳이다.
북가치라는 지명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속사치(俗寺峙)라는 곳도 있는데 그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치”라는 말은 “고개”를 뜻할 것인데 그 이외는 잘 모르겠다.
왼쪽은 경북 절골 미타사 방향이고 오른쪽은 충북 수정봉 여적암 방향이다. 



(7) 북가치(770m)-속사치(803m) 

[11:45-13:00, +75=360분]

북가치에서부터는 낙엽이 쌓이고 흙이 두텁게 깔린 肉山이다.
언제 암릉지대였냐고 되물어 오듯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능선길이다.
너무 편안하여 불안하다. 하지만 계속된다. 그래! 믿어보자.
앞으로는 편안한 길만 남았다고...
몇 개의 소봉(770봉, 840봉, 819봉, 880봉, 803봉)들이 연이어 나타났지만
우리는 그 정상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우회길로 신속히 통과한다.
정상을 일일이 알현하다가는 시어동 가는 길은
어둠이란 음험한 놈이 지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880봉을 통과할 때 밑에서 올려다보니
너무 아름다워 올라가 보고 싶은 충동도 일었지만
가야할 길을 생각하면 우회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880봉을 넘자 산죽이 낮게 깔린 길이 계속된다.
오사장님께서 관음봉 근처에 오니 觀音竹을 닮은 山竹이 나타나는 것이라 하신다.
그러고 보니 산죽은 점점 키가 커져가고 있다.
커져 갈수록 오솔길을 덮고 허리께까지 닿는다.
곧 안부에 이르렀는데 누군가 굴참나무에
스프레이로 속사치(俗寺峙)라고 써놓았다.



(8) 속사치(803m)-관음봉(983m) 

[13:00-14:00, +60=420분, +3.9=12.2km]

여기서 왼쪽을 살펴보니 가물가물한 실낱같은 오솔길이 나 있는데
지도상으로 보니 경북 중벌리 방향이요,
오른쪽은 충북 법주사 후면 중사자암 방향이다.
속사치를 통과하니 관음봉이란 봉우리를 쉽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집채 같은 바위들이 포개어진 틈새와 절벽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박차장님이 우회하자고 권유하지만
그렇게 많은 소봉들을 우회 했는데 관음봉만은 문안인사 드리자고 우겨서
겨우 그 정수리에 달라붙었다.

정상엔 역시 커다란 바위덩어리들이 시루떡처럼 포개어져 있는데
접근을 허락지 않으려는 듯 역구배의 경사를 자랑한다.
양쪽 바위사면에 발꿈치를 의지하고 오르니 감탄사가 절로 난다.
문장대가 絶景이라지만 철책과 안전시설로 天然의 맛을 느낄 수 없는데 反하여
관음봉은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 인지
문장대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그대로 버티고 있어서 천연의 멋을 자랑한다.
고생하며 올라온 보람을 느끼게 한다.
속리산 법주사의 殿閣들도 우람한 미륵대불이 굽어보는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덕유산 종주 때에도 視界가 좋았는데
오늘은 그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아주 좋은 편이다.
여기를 우회했다면 후회막급이었을 것이다.

우람한 문장대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위치에 있었는데
여기서 보니 문장대 정상에 사람들이 개미처럼 닥지닥지 모여 있다.
빼곡히 들어차 안전시설이 식별되지 않는 여기서 보니 위태하게 보인다.
그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우리도 마주 흔들었다.
문장대는 위 부분만 바위가 아니고
계곡에서부터 문장대 상부까지 거대한 한 개의 바위 덩어리임을 알겠다.
또한 미남봉에서부터 지나온 능선이
잘 꼬여진 새끼줄처럼 길게 늘어서서 관음봉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그렇게 정상에서 20여분을 보내니 가을 해는 점점 붉은 빛으로 대지를 물들이며
멀리 활목고개 쪽으로 移動하고 있다.



(9) 관음봉(983m)-문장대(1028m) 

[14:00-15:30, +90=510분, +2=14.2km]

관음봉으로 올라간 암벽들을 다시 내려오자니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키 높이 까지 자란 산죽 숲을 헤치고 나가자
문장대에 이르기까지 지도상으로도 봉우리가 2개(917봉, 977봉)있었는데
그 길은 커다란 바위봉으로 깊은 내리막과 오르막일 뿐 아니라
바위덩어리들이 포개어진 형상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의 내왕이 드물어 길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오사장님과 박차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혼자 힘으로 바위덩이 사이에 난 개구멍을 통과하기가 불가능했으리라.
관음봉에서 2km라는 문장대는 그렇게 쉽게 接近을 허용하지 않았다.
드디어 문장대를 이루는 바위 덩어리 뿌리 부분에 도달했다.
거기서 급사면을 이루는 오름만 극복하면 오늘의 산행의 모든 난관은 극복되고
지금까지 참아온 때 늦은 점심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10) 문장대(1028m)-휴게소(1013m) 

[15:30-16:00, +30=540분]

오름을 통과하니 바로 문장대 初入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종주를 축하하듯이 무리지어 앉아있다.
우리 셋은 그들이 보거나말거나 껴안고 충북알프스 첫 구간 종주를 自祝했다.
그리고 세 번 오르면 신선이 된다는 문장대에 올라
우리가 지나온 능선을 眺望하고 다음 주 가야할 능선에 눈 맞춤하고
휴게소로 내려오니 그제야 허기가 아우성친다.
부랴부랴 배낭을 풀고 自祝의 건배를 들지 않을 수 없어
막걸리 한 병을 시키고 식사를 하는데 주인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야채며 밥, 그리고 정상에서 나오는 물이라는 貴한 藥水를 내놓으신다.
후한 인심을 접하니 興이 절로 난다.
그리고 다음 週 다시 들르겠다는 約束을 드리고 시어동으로 향하였다.


(11) 휴게소-시어동 

[16:00-17:00, +60=600분, +3.3=17.5km]

휴게소 이정표를 보니 시어동까지 3.3km로 1시간 반 소요란다.
우리는 速步로 가기로 하고 뛰다시피 내려갔다.
덕유산 향적봉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처럼 급사면과 계단이 반복되는 길이다.
계곡 양 옆으로 기암과 괴석의 절경이 펼쳐지고
칠형제봉이며 암벽등반가들이 좋아한다는 할미봉등이 일렬로 도열하여
우리의 종주 산행을 배웅해 주고 있다.
가족단위의 등반객들이 下山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에 일일이 양해를 구하고 앞질러 내려오니
문장대에서 딱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우리는 다음 주를 기약하며 속리산에 하직 인사를 告하고 돌아왔다.


- 오늘의 산행 총시간, 거리 : 600분, 17.5km
- 오늘의 산행 순시간, 거리 : 540분, 14.2km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0/14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라. 제 2 구간 [갈령-형제봉-천왕봉-문장대]

2006/10/21(토)아침 05:30분.
일주일이나 지났건만 約束을 잊지 않고 세 사람은 정확한 약속시간에 약속 장소에 모였다.
모두들 환한 얼굴이다.
지난 주 어려운 구간을 무사히 완주하여서인지 여유까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다음으로 예정된 3구간(구병산) 종주를 쉽게 하기 위하여
오늘의 출발지를 갈령이 아니라 장고개나 동관음고개로
바꾸는 문제를 긴급의제로 논의했으나 결국 최초의 계획대로 갈령으로 하기로 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인 報恩 삼년산성을 지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본향인 尙州지경으로 접어드니
아직 未踏구간인 구병산이 여명 속에 날카로운 실루엣을 자랑한다.
역시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산세이다. 그
러나 우리는 너마저 정복하고야 말리라. 너의 아름다운 허리를 껴안고야 말리라.



(1) 갈령(443m)-갈령삼거리-형제봉(832m) 

[07:00-08:10, 70=70분, +2=2km]

구병산에서 장고개까지의 산마루를 돌아
지난 주 보아두었던 갈령(葛嶺)에 도착하니 하늘이 꾸물꾸물하다.
내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오늘은 지난번의 맑은 眺望같은 행운은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생사도 그렇듯 매사 순탄하지 만은 않은 것이 宇宙의 법칙이니까.
갈령 기념탑 옆의 표지판을 보니 형제봉이 90분,
대궐터산이 110분 거리에 있슴을 알겠는데
대궐터산이 있슴을 보니 계룡산 신도안 대궐평처럼
누군가 이곳에 수도를 삼으려고 도모하였는지 궁금하다.
들머리부터 여간 가파르지 않다. 조금 前進하니 속리산 특유의 奇巖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연이어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지도상의 721봉으로 짐작된다.
07:25분 721봉을 지나니 안부가 나타나는데 표지판을 보니 갈령3거리임이 분명하다.
구병산 신선대까지 9.6km요, 장고개까지 6.5km, 형제봉이 700m라고 표시되어있다.
능선을 지나 앞을 보니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앞을 막아선다.



(2) 형제봉(832m)-피앗재 

[08:10-09:15, +65=135분, +1.6=3.6km]

왠지 이름도 모르는 그 봉우리를 오르고 싶었다.
박차장님과 오사장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제일 실력이 부족한 내가
바위 모서리를 붙들고 천신만고 끝에 올라서니 둥그스름한 바위 두 개가 솟아 있다.
거기에 대간꾼들이 달아 놓은 리본이 현란하다.
여기가 형제봉인가? 아마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 유명한 형제봉이라면
분명 표지판이 있을 것인데 아무런 표지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의 염려 속에 벼랑을 내려와 그대로 直進했다.
마테호른봉 같은 칼날 삼각바위봉이 또 나타났다.
거기는 도저히 오를 자신이 없어 그대로 전진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리본도 안보이고 大幹길치고는 낙엽이 너무 많이 쌓여있다. 발목까지 차오른다.
길을 분간하기도 어렵다.
길라잡이 박차장님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낙엽이 쌓인 희미한 오솔길을 20여분 전진하다가는 되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마테호른봉을 지나 내가 오른 봉우리에 가 보고야
그 봉우리가 바로 형제봉이고
그 바위봉 바로 아래 우회전하는 길이 뚜렷이 나 있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님! 박차장님의 용단이 아니었으면
우리의 충북 알프스 종주 2구간은 不發로 끝날 뻔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거기서 20여분을 헤매었으나
제대로 판단하여 변경하여 갈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충북 알프스를 종주하시는 분들은 잊지 말 것을 부탁드린다.
갈령3거리에서 첫 번째 나타나는 봉우리가 형제봉이고
형제봉을 넘자마자 직진하지 말고 우회전하여 가실 것을...

형제봉을 지나자 계속 내리막이다.
지도를 보니 형제봉이 832m요, 피앗재가 630m이므로 200여m의 고도차이니
엄청난 내리막이라 짐작은 했지만
막상 急轉直下의 급경사를 만나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급경사를 지나고 조그만 봉우리(803봉)을 지나자 능선인데
능선 바로 아래로 비닐하우스단지며 田畓이 보인다.
이어서 내속리면 만수동에서 올라오는 피앗재가 보인다.
“여기서 뛰어서 7분 내려가면 물이 있다.
형제봉까지 1.6km, 천왕봉까지 5.8km”등 情報가 刻印된 이정표가 반겨준다.



(3) 피앗재(630m)-전망바위 

[09:15-10:50, +95=230분]

피앗재에서 10여 분 휴식 후 진행하여 보니
부드러운 흙으로 된 肉山이 지속된다.
오사장님은 巖山보다 오히려 이런 산이 운동이 되며 편안하다고 하시는데
박차장님은 성에 차지 않는 듯 내달리기도 하며
가다간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면 오두마니 서 있기도 하다.
그리곤 연신 지도를 꺼내보며 계속 地形地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부지런하신 분이다. 앞에 문득 소봉(667봉, 09:45)이 나타났는데
그 소봉을 올라서자 연달아 봉우리들이 줄지어 있다.
그러나 편안한 낙엽 쌓인 오솔길만큼은 지속된다.
10:00시 가파른 726봉, 10:30분 703봉을 연이어 올라서니 빨간 단풍이 아름답다.
올 가을은 지독히도 가물어 단풍이 흉년인데
이곳에서 原色的인 단풍을 만나니 새삼스럽다.
산죽(조릿대)이 우거진 길을 치고 오르니
병풍 같은 계곡과 단풍이 물들어가는 절벽 아래
대목리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바위에 다다라 한동안 忙中閑을 즐겨 본다.


(4) 전망바위-천왕봉(1057.7m) 

[10:50-11:50, +60=290분, +5.8=9.4km]


전망바위를 지나 소봉에 올라서니
커다란 암봉인 천왕봉이 접근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高壓的인 자세로 굴참나무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천왕봉이 육산이라 흙으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남측에서 거슬러 올라가니
계룡산 쌀개봉 같은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자랑하고 있어
이러한 선입견에 혼란이 일어온다.
전망바위에서부터 주변 巖質을 살펴보니
속리 특유의 붉은 반점을 가진 문경석이 아니고
거무튀튀한 계룡산 바위 같은 特性을 드러낸다.
그리고 바위 덩어리가 아니고
편마암같이 판상형으로 절리를 이루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암질 분석가들이 말한 대로 속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
천왕봉은 상봉이지만 훨씬 後代에 生成되었슴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오솔길에 울창하게 우거진 산죽을 헤집고
소봉을 넘어 안부에 도착하니 안내판이 보인다.
가파른 오름은 참나무 계단으로 되어 있다.
그 안내판 앞에 50대 부부가 서 있다.
오늘 5시간 산행 중 처음으로 부딪힌 사람들인 셈인데
우리는 그만큼 인적이 드문 대간길을 밟아 온 것이다.
내일 비가 온다고 豫報 된 탓인지,
오늘 조망이 좋지 않아서 인지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 노년에 접어든 부부를 보니 반가웠다.
그런데 그 부부가 안내판 앞에서 난감해 하고 있었다.
법주사에서 출발하여 상환암을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문장대에 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천왕봉에서 문장대 방향을 잘못 판단하여
그대로 직진하여 이 안부에까지 넘어온 것이었다.
내려온 비탈이 보통이 아니라며 난감해 하기에
내가 “상봉을 두 번 배알함은 큰 행운입니다.”라고 위로하였더니
빙그레 웃으시는 것이었다.

천천히 된비알을 오르니
갈참나무 사이로 보이는 절벽이 상봉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다.
이어 상봉의 봉우리가 보이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산죽은 내 키를 넘본다.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여 변성퇴적암이 군데군데 섞여있어
변성 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이고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아름다운 근육을 자랑하는 상봉이 고압적이었던 아까의 느낌과는 달리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여기에 오니 꽤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다.
총 면적이 283.4㎢란 어마어마한 속리산이 안고 있는
산줄기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속리산 천왕봉은 상봉으로써 구병산으로부터
문장대, 묘봉, 도명산, 큰군자산까지 전체 국립공원이 한눈에 조망되며
삼파수(三波水, 三陀水))의 발원지로 유명하다.
한반도 남반부의 대동맥을 이루는 한강, 금강, 낙동강 등의 3대강이
이곳을 起點으로 서로 물길을 달리하며 나누어져 흘러내리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한강, 금강, 낙동강의 물이 나누어지는 삼파수의 기점이
속리산의 문장대라고 적혀 있지만
최근 자료에 의하면 천왕봉이 그 발원지로 판명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산마루에 옛날엔 대자재천왕사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천왕신이 해마다 가을 10월이면 법주사에 내려가서
45일 동안 머무르다가 상봉으로 도로 올라오는데
그 동안에 이 산 아래 사는 모든 주민들까지
그 신을 맞이하여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산 이름 중에 천황봉이 많은데
이 곳 속리산의 주봉도 현재 일반적으로 천황봉으로 부른다.
그런데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는 천왕봉이었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천황을 상징하는 천황봉으로 바뀐 듯하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를 비롯하여 구한말에 만들어진
실측지도에도 천왕봉으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지금부터라도 천왕봉으로 바꾸어야 하며 그렇게 쓰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5) 천왕봉(1057.7m)-비로봉(1008m) 

[11:50-12:20, +30=320분]

생각보다도 훨씬 방대한 영역을 가진 속리,
삼파수의 발원지로써의 천왕봉을 생각하며 문장대 방향으로 향한다.
조릿대 가득한 오솔길을 내려오니
잘 닦아놓은 헬기장에 점심을 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우리도 여기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각자의 배낭에서 맛깔스런 김치와 밑반찬,
그리고 과일이며 커피등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조그만 배낭에 이 많은 먹거리가 들어갈 수 있다는 自體가 신기하다.
식사 중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의 등반대장 박차장님은 경북 청송의 주왕산에서
암벽등반대회가 있어 심판으로 참석해야하는데
하루 미루고 오늘의 산행에 동참하셨단다.
너무나 감사하다. 사실 형제봉에서 박차장님의 예리한 판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피앗재에도 못 오르고 대목리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 하산하였을 것이다.

맛있는 점심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암릉이 압권이다.
“저 바위들이 수 억 년 전 지하 4km에서 불덩어리 용암이 굳어
2000만년 전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지?
엄청난 지각변동과 풍우에 씻겨 하느님이 만든 작품들이란 말이지?
참! 대단한 名作이로고. 대자연이신 하느님이여! 당신께 경배 드립니다.”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헬기장을 내려와
암릉에 근접하여 스쳐 지나가며 가까이 바라보니
암릉은 또 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분명 저런 기암괴봉 하나하나에도 이름이 있고
전설이 있을 텐데 알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디카에 그 모습의 한 컷을 담아 보지만
연이어 펼쳐지는 주능선의 동영상이 나의 뇌리에 얼마나 지속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모습이 보고 싶다면
다리가 허락하는 한 다시 오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헬기장을 내려와 전진하니 비로봉인데 들어 갈 수 없다.
여기서 장각동이 3.7km란다.
그러므로 상봉만 알현코자 한다면
경북 장각동에서 오르는 길을 택하여야 할  것이다.



(6) 비로봉(1008m)-입석대 

[12:20-13:10, +50=370분, +1.6=11km]

조금 내려가니 상환암으로 내려가는 길과 문장대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경업대1.9km, 천왕봉0.6km, 상고암 0.7km, 법주사 5.1km"란 이정표가 서 있다.
그 삼거리를 지나가니 비로봉인데 입산금지로 들어갈 수는 없다.
비로봉을 지나니 지난 겨울 폭설이 내렸을 때 아내와 와 본 상황 석문이다.
백설을 뒤집어 쓴 석문과 단풍 속의 석문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지난 번 묘봉 구간 종주시 상환 석문 같은 석문이 거기에도 많음을 보았거니와
자연의 조화를 그 누가 흉내낼 것인가?
여기서 지난겨울 속리 방문 후 지은 시조 한 수를 읊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즈음 -속리산 설경(雪景)-

속세(俗世)의 하늘 아래  그 속에 살아가도
사람들은 왜 이 곳을 속리(俗離)라 불러줄까? 
말티를 넘어서 보면 저절로야 알 것을.

찬바람 맞으면서 가쁜 숨 몰아쉬고
석문(石門)을 돌아 지나 경업대 올라보니
상고대 시려운 숲이 꿈 속에 들어온 듯

버리려 들었지만 얻어서 넘는 길에
돌아보지 않아도 아련히 눈감으면
미륵님 따스한 미소 눈꽃처럼 피어나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2/11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속리산의 어느 구석 하나
금산사 미륵대사 진표율사와 관련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 곳 비로봉(毘盧峰)에도 진표의 體溫이 느껴지는 곳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렇다.
진표율사가 속리산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밝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쳤다.
대사가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사발팔방으로 비추고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배례를 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毘盧蔗那佛)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하여 구름을 타고 떠났다.
대사는 비로자나불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산봉우리를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붙여 비로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비로자나”란 인도말로 "모든 곳을 두루 비친다(光明)"란 뜻이라고 한다.

비로봉을 멀리서 바라보고 문장대로 가는 방향으로 전진하니
그 좁다란 길에 오는 사람, 가는 사람으로 人山人海이다.
다들 올해 단풍은 별로라고 실망한다.
그런데 삼도(일본)에서 본 것처럼 미리 지나가길 기다리는
양보의 미덕과 미리 꺼내는 인사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사장님은 항상 먼저 인사하기를 잊지 않으신다.
사실 인사를 먼저 받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왜 그게 잘 안될까?
정규 탐방로를 벗어나 암릉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어떤 부부는 접이 의자를 갖고 와 나란히 앉아 풍광을 감상하고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계곡을 내려다보니 법주사의 경내가 보일락말락이다.
우리나라 사찰은 대부분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숭유억불을 표방했던 조선에서
어떻게 사찰은 대토지를 하사받았을까?
숭불정책을 취했던 고려조에 받은 토지를 조선시대에도 인정받았던 것일까?
정이품송을 지나 법주사로 향하다 보면 “은구석 공원”을 만나게 되는데
이“은구석”이란 곳에 속리산 법주사의 영역에 관한 설화가 있다.

세조(世祖)가 악질(惡疾)로 인해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이곳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에서 요양을 하고부터 병에 차도를 느꼈다.
왕은 속으로 몹시 기뻐해서 많은 불전(佛錢)을 올려
승려들로 하여금 불교숭상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질환에서 쾌유됨을 경하하는 자리에서 왕은
속리산에 있는 승려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 이곳에 와서 부처님의 은덕으로
악질을 고치게 되었으니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함이니
복천암 앞에 있는 돌을 끌고 다니다가
힘이 빠져 멈추는 곳을 경계로 해서
산천전답을 모두 절 소유로 인정하겠다.”고 했다.
이에 모든 승려들이 크게 기뻐하여 밖으로 나가
그 커다란 돌에 밧줄을 매어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고 해서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복천암에서 내려와 법주사를 지나 사내리를 벗어나자
보은 땅을 차지할 생각으로 말티재(馬峙)를 향해 돌을 끌었다.
그런데 상판리 “새목이”쯤에 이르자 모두들 기진맥진이 되어
더 이상 돌을 끌어갈 힘이 없어지고 말았다.
좌상주지스님이 앞에서 호령을 하면서
다시 한 번 힘을 내도록 독려를 했으나
이제 돌은 더 이상 움직이질 않았다.
이것을 본 왕은 미소를 지으며 “세상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
이제 그 자리를 한계선으로 정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며
“그만하면 공양미와 승려들의 량도(糧度, 식량)가 족할 것이다.”라고 하며
사전(寺田) 문서를 작정해 주고 돌을 끌어온 자리에 놓아 주도록 했다.
이리해서 돌이 있는 곳에서 속리산 쪽 전부의 땅을 법주사에 내주었다는 것이다.



(7) 입석대-신선대(1018m)-경업대삼거리

[13:10-13:30, +20=390분, +0.5=11.5km]

암릉을 지나 조그만 나무계단으로 된
고갯마루를 내려서니 거대한 입석대가 보인다.
입석대 初入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보니 천왕봉 1.6km, 문장대 1.9km이니
천왕봉에서 문장대까지 3.5km인 셈이다.
이곳을 지날 때 항상 입석대에 가보지 못하고 우회길로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人波도 피할 겸 입석대에 接近해 보기로 했다.
좁은 바위틈이 보이는데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몸을 움츠리고 비집고 들어가 겨우 빠져나와 절벽에 올라서니
우람한 입석대가 마치 大虎가 입을 벌리고 앞발을 쳐든 모습으로 다가온다.
장중하다.
발아래는 천애의 절벽인데 법주사 방향의 계곡은 깊기가 한량없고
건너편 봉우리에 상고암이 보인다.
계곡에 가득한 수림은 단풍으로 타들어가고 있다.
누군가 입석대를 올랐다고 했는데 그것은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촛대처럼 깎아지른 암벽을 어찌 오른단 말인가?
그리고 조금 지나니 신선대, 경업대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그 곳들 모두 휴식하기에 좋은 장소여서 인산인해이다.
특히 신선대 휴게소는 시골 난전이다.
속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입석대와 신선대, 경업대, 청법대의 傳說을 알아보았다.


[입석대 立石臺]
조선 인조 때(1623~1634)에 임경업장군이 이곳에 이르러
6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장군의 기상을 닦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단련이 그의 체력한계가 되는지를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시험해 보고자 했으나
기준조차 알 길이 없어 매우 당혹하게 여겨오고 있었는데
하루는 석굴에 앉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임경업이 정신을 모아 그 말을 들으니
“마주 바라다 보이는 석벽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을 비석처럼 세워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하는 내용이었다.
임경업은 곧 경업대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일으켜 세우는데 아직도 힘이 부족했다.
이에 임경업이 그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체력을 단련하기를 1년,
마침내 7년째 되던 해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 데 성공을 했다.
그 후부터 “돌을 세웠다”고해서 입석대(立石臺)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신선대 神仙臺]
아득한 옛날 속리산에서 絶景에 혼을 빼앗긴 高僧이
청법대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白鶴이 수없이 날아와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은 고승이 평생 원하는 仙遊世界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지나 神仙들과 놀고자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승은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이곳을 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를 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으로 달려갈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업대 慶業臺]
신선대를 내려오면 천황봉과 법주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법주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만나게 되는 바위이다.
이곳에서 바라다보는 입석대의 모습이 제일 아름답다.
조선시대 인조 때 임경업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라 경업대라 부른다.
이 경업대로부터 5보 지점에 뜀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임경업이 심신을 단련하고 있던 어느 날 밤,
하늘의 별을 향해 救國 神力을 내려줄 것을 빌고 있던 임경업은
바람처럼 계곡을 날라 오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태연하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 正體를 확인하고자 암석위에 버티어 서서“요괴는 무엇이냐”고 고함을 쳤다.
그러자 난데없이 산 계곡에서 강풍이 몰아치는데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을 만큼 심했고 자칫 잘 못하면 하늘로 날아가 버릴 듯 했다.
그러나 임경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암석위에 버티어 서서 그 强風을 막아냈다.
이윽고 바람이 멎으면서 바랑을 진 도승 하나가 사뿐하게 암석으로 날아올라왔다.
임경업이 그 동작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알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신력(神力)을 내려주도록 부탁을 했다.
도승은 그 스스로가 독보대사(獨步大師)라고 말 하고
언제든지 이 암석을 둘로 갈라놓고 그 사이에 길을 만들어 놓는다면
그 때 비로소 신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석굴 곁에 있는 물을 하루에 다섯 번 씩 마시면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임경업이 수행을 하는데 그 곁에서 戰略과 學識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그
리고 난 후 만 5년이 되던 해 가을 임경업은 혼신의 힘을 쏟아
마침내 거대한 암반을 두 조각으로 갈라놓는데 성공을 했다.
그 후 이곳 관음암으로 통하는 곳이 하나의 명소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 중간에 경업이 정신수양을 하던 석굴이 있으며
임경업이 5년 동안을 마시고 힘을 기른 물이
해발 800m의 경업대에 오늘날도 마를 줄 모르고 흘러나오고 있다.
그 물은 차고 신묘(神妙)해서
한 모금을 마셔도 몸이 상쾌해서 악질을 쫓는다고 하며
“임경업 장군이 마신 물”이라 해서
“장군수(將軍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법대 廳法臺]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 절경에 영혼을 잃고 방황하던 중
이 봉우리에서 불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제 정신을 차렸다 하여 청법대라 부른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문장대 왼쪽능선으로 펼쳐진 등산로를 따라 가노라면
병풍처럼 솟아오른 다섯 봉우리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들 바위모습이 흡사 부처가 앉아 있는 듯하다 해서 청법대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 와서 이 바위를 보고
스승 복보대사가 은거하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는 전설도 있다.




(8) 경업대 삼거리-청법대-문수봉-문장대(1028m) 

[13:30-14:00, +30=420분, +1.3=12.8km]

그러한 전설들을 생각하며 능선을 오르내리며 나아가지만
입석대와 오늘 가지 않는 경업대 빼고는
어디가 신선대이고 어디가 청법대이고 문수봉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안내판이라도 세워놓으면 오죽 좋으랴만
좋은 속리산이라고만 하지
나처럼 그런 分野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겐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문수봉이라 짐작되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멀리 문장대가 보이는데 사람들이 벌떼같이 오르내린다.
그리고 문장대 근처에 다다르자 휴게소에는 시장바닥처럼 난전의 극치이다.
이곳이 왜 사유지인지 주인에게 물으려 했는데 접근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또 문장대를 자주 배알함도 산신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 같아
우리는 그대로 시어동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지난번처럼 한 시간에 주파하기로 하고 내달렸다.



(9) 문장대(1028m)-시어동 

[14:00-15:00, +60=480분, +3.3=16.1km]

어느 곳에는 문장대가 1028m,
또 어느 곳에는 1054m라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라고 사료된다.
하산하면서 문장대를 바라보니 세조대왕이 생각난다.
속리산 하면 진표와도 관련이 깊지만 조선의 세조대왕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말을 타고 넘었다는 고개가 곧 “말티”이며
하도 자주 임금님이 행차하셔서
그 말티에 박석을 깔았다고도 하며
내속리면에는 세조의 가마가 소나무 가지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자
“길을 열어라.”는 세조의 명에 가지를 들어 정이품을 하사 받았다는
“정이품송”이 있슴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또한 세조대왕은 “복천암”이나 “상환암”에 자주 들러 기도하고
“복천샘”에서는 눈병을 치유했다고도 전한다.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낸 자책감에 시달려
피부병과 종기가 많았던 세조는 불법에 더욱 매달렸다고 한다.
세조는 평소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미 대사의 권유로 자주 속리산을 찾았다고 한다.
이는 신미의 불교 중흥의 야망과도 부합되어 있다.
속리산 복천암을 찾아
신미(信眉),학조(學祖),학열(學悅) 스님 등과 함께 3일 동안 법회를 열고,
기도를 드린 뒤 절에 이르는 길목의 한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는
오랜 동안 앓아왔던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臧臺)라 하였으나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치병할 때
문무 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운장대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세조가 속리산에 와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월광태자(月光太子) 라고 자칭하는 귀공자가 꿈에 나타나
동쪽으로 시오리에 영봉이 있으니
그곳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세조가 신하들을 데리고 온 종일 올라가 보니
하늘 위에 오른 것처럼 사방이 구름과 안개 속에 가린 중 영롱한 봉우리가 보였다.
그러나 위태로운 바위라 올라갈 수 없어 철못을 박고 밧줄을 늘어 정상에 올라보니
널따란 반석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세조가 집어보니 오륜(五倫)과 삼강(三綱)을 명시한 것이라
세조가 크게 감동하고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글을 읽으며 신하들과 강론을 하였다.
그 뒤부터 이 봉을 문장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며
또 한편으로는 정상이 언제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는 봉이라 해서
운장대(雲壯臺)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시어동의 왼편엔 견훤산성이라는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도 애달픈 전설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 산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성하였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며,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을 위한 최전방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견훤이 그의 누이와 함께 성을 쌓고
군사를 양성하여 후백제를 일으켰던 곳이라고 하는데
아주 옛날, 근처에 장사로 이름난 남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단다.
둘 다 장사였는데 두 남매 중에 누가 더 힘이 센지 그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놀이를 한다는 것은 힘자랑 놀이였다.
오빠가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면 누이는 바위를 손으로 쳐서 산산조각을 내고 말아
과연 누가 힘이 더 세고 누가 덜 센지 알 수가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두 남매는 서로 힘자랑을 하였지만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두 남매를 불러 앉히고
“너희 남매는 천하장사다. 매일같이 힘자랑을 하다간 끝이 없고 한이 없겠다.
그러니 단번에 끝장이 나는 것을 해 보아라.
오빠인 너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몰고 서울을 다녀오너라.
그리고 너는 오빠가 서울을 다녀올 동안
돌을 날라 이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아보아라.
시합은 아침 해 뜰 때 시작해서 서산에 낙양이 지는 사이에 끝나야 한다.
시합에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목을 잘라 버리도록 하여라.” 라고 말하였는데
시합의 결과가 너무 잔인하지만 이런 시합을 시키면
두 남매가 앞으로는 힘자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시킨 것이었다.
이리하여 다음날 아침 동쪽에 해가 솟자
두 사람은 마지막 결판을 짓는 시합에 들어갔는데
그러자 홀어머니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목숨을 걸고 시합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시합 결과에 따라서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는 죽어야만 한다.
왜 이런 시합을 시켰는가? 하고 후회도 했지만
이젠 별 수 없이 결과를 볼 수밖에 없었다.

뜨겁던 햇볕이 시들고
서산마루에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딸은 성을 다 쌓아 올렸다. 이제 나무로 문짝만 달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들은 어디쯤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초조해졌다.
“아들이...아들이 와야 할 텐데...”
시합이 끝나면 그 결과에 따라서 어느 한 쪽의 목숨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딸보다 아들을 살려야 한다. 이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진 어머니는 무서운 계략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머니들의 공통된 심정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딸이 문짝을 만들지 못하도록 지연시킬 계략을 꾸며냈다.
즉 이제 성을 다 쌓았으니 팥죽을 먹고 쉬엄쉬엄 하라고 꼬드긴 것이었는데
참으로 맛있는 팥죽이라 딸은 식혀가면서 맛있게 먹었다.
이제 팥죽도 불과 몇 술만 남았다.
그때 오빠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동생이 쌓은 성을 둘러보았다.
“야! 내가 이겼다. 봐라 이 성은 문이 없다. 문을 만들지 못했구나.”
이 사태에 난처해진 것은 어머니였다.
딸이 능히 아들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었는데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뜨거운 팥죽을 먹였기 때문에
조만간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얘야, 아무리 언약이 중하기로서니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죽일 수야 있단 말이야?
이 에미를 봐서 참아라. 동생을 죽이려면
차라리 에미의 목을 끊어다오.”울며 애원했으나 아들은 냉담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장사인데 항상 누이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누이동생을 죽이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장사가 되려는 것이다.
헛간에서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나오는 오빠를 보고 누이는
“오빠! 동정을 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 약속대로 내 목을 자르세요.
그리고 부디 홀로 남은 어머니를 잘 봉양하셔요.”하면서
늙은 어머니의 뒤를 보살펴 드리지 못하고 죽으니 억울하다고 울며
오빠가 내려치는 도끼날 아래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전설을 생각하며 시어동에 내려오니 오늘도 저번처럼 딱 한 시간 걸렸다.
우리는 시어동의 손두부집에 여장을 풀고 충북 알프스 2구간 종주를 自祝했다.
그리고 11월중 남은 구병산 구간을 감행하기로 결의하였다.
남은 구간이 20여km는 족히 될 것이고 이동 중 山勢를 관망하니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15시간은 소요될 것이지만 우리의 意志를 꺾지는 못하리라.
그러자면 아예 금요일에 속리산으로 이동하여 1박을 하고
이른 새벽 서원리 서원교로 이동하여
시작하여야 늦은 저녁 종주를 끝낼 수 있을 것이란 結論이 나오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굳은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서로 격려하며
속리의 아름다운 암릉을 그리며 2구간 종주를 끝내었다.


- 오늘의 산행 총시간, 거리 : 480분, 17.5km
- 오늘의 산행 순시간, 거리 : 390분, 11.5km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0/21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