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가면서.
풍수 조예가 깊은 대원군은 충남 용봉산 .일월산. 봉명산.오서산. 덕숭산 .성왕산. 성주산. 백화산. 중에 있다는 지구상에 최고 명당자리인 (자미원)을 그때 당대 최고의 풍수지관 정만인을 통해서 알려고 했었다고한다.

그러나. 그때 1백년후에나 자미원 자리에 묘를 쓰기가 가능하며 그때 자미원 자리에 묘를 쓰면 백발백중 벼락을 맞을 것이라 했으며 정만인계략으로 오늘날까지 감추어온 지구의 신비를 증명해낼 그곳을 산악인 여러분은 산행을 하여봅시다

자미원) 이자리는 1988년부터 땅이 열려 있다하며. 불세출의 영웅을 낼사람을 만나면 묘를쓰게 될것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유일무인한 명당터 다스리는 인구가 72억 대제왕이 나올자리라고 하며 우리나라 풍수사들은 말할 것도없고 중국지사들도 와서 기도를하며 민박까지하면서 자미원 자리를 찾고있다고 한다. 육관 손석우웅만이 그 자리를알고 있었으나 그도이미 세상을 떠났다, 천하제일 명당이 있다고한 용봉산 등산하면서 각자 관심을 한번 갖으시길바람.

대원군은 정만인을 통해 그곳 지리 약도를 소중히 보관하였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수없다고한다 그자리는 사유지가 아니고 국유지라 한다 추운 겨울에 폭설이 내려도 그주위에는 절대 눈이 쌓이지않는 천하제일 명당자리라고한다

(자미원)은 대원군에 의해서 그 정체를 드러낼뻔 했었지만 신비의 지사 정만인 지략으로 오늘날까지 그비밀이 이어올수 있었다고한다,
남연군 묘 발복으로 대원군 아들 고종과 손자인 순종이 제왕이 되었지만 외국인에 의해. 남연군묘 도굴 훼손당했으니 묘정기가 끝나 불길한 최후를 맞이했다. 대원군은 분노했지만 이미 민비와 불화가 시작되어 대원군은 파란 만장한 일대기는 1873년 11월 종지부를 찍게돈다.

터의위력은 이렇게 신묘하다고 한다.
터의 위력으로 제왕에 오른 고종 순종은 남연군 묘도굴 훼손으로 인하여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조선왕조 몰락을 맞이하게 되었다.
충청도 산하는 비산비야 어디를 가든 낮은능선이 하늘과 맞닿으며 여린곡선을 그린 고장이다 .말씨와 행동은 느리지만 이고장 명멸한 인맥만은 그렇게 유순하지만은않는다

고려말 최영장군.고불 맹사성 .근보 성삼문.토정 이지함. 추사김정희.면암 최익현. 그리고 만해한용운 .매헌 윤봉길 .김대건신부 .김좌진장군 .그매서운절개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즐비하다. 사람사는곳에 길이나고 그길따라 인간삶의 역정도이어진다. 나도 죽고 만나서 헤어지는 인간사 .우리가 걸어가는 윤희길이 아닌가.
유순한 산야에서 태어나 이땅에살다간 충에 인물들을 산악인들이 그고장을 지나면서 향으로 맡으면서 이 기회를 통해 기억해보자.


용봉산: 384 M
기암괴석과 어울린 산 금강산만물산을축소해 놓은 것 같아 이고장사람 들은 소금강이라고 자랑하고있다한다.

용봉산 북서쪽 병풍바위밑에 위취한 용봉사. 이 절은 백제 29대 법왕 1년(599년)에 지명 법사가 창건했으며 보물 제355호인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고한다.
용봉산에서 동남쪽으로 보이는 산은 천년 고찰인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이다.

덕숭산은 덕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덕산땅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온 명당 남연군묘. 남연군은 홍성 대원군의 아버지이다. 덕산 땅에 만대에 영화를 누릴곳과2대에 걸쳐황제가 나올 자리가 있었는데. 대원군은 황제나올 자리를 택했다. 대원군은 안동김씨들 세도정치 때문에만대 영화보다 2대 황제 자리를 택해서 왕권을 회복 시킬 목적이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야심에 사로잡혀1840년 덕산 가야사 절을불태우고 석탑을 부순뒤 경기도 연천에있던 남연군묘를 이장했다고 한다 그때 상여가 지나가는길목에 있던 마을사람들이 릴레이식으로 번갈아가며 옮겼는데 마지막으로 상여를 맸던 마을은 광천리 주민들이라고한다.
대원군은 장사가끝난 뒤 그마을 사람들에게 상여를 선물로 주었다. 오랬동안 마을 상여로 쓰이다가 1974년에 중요민속자료 31호로 지정되었다.

천하의 명당으로 묘를 이장한덕에 대원군 아들이(1863년) 왕위에오르게하였다
대원군이불태웠던 가야사 절터에 1871년 고종이 왕위에 오른 그은혜를 고맙게 여겨 새로절을 창건했다. 가야사를 승계한 새절은 . 보덕사로 칭했으며 오늘날 그이름이 보덕사라 한 것이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열사를 밀사로 파견한 사건으로 연루되어 고종이 물러나고 대원군 손자인 순종이 등극하니2대에걸쳐 황제에 오른셈이다.

1868년4월21일밤 대원군 쇄국정책 천주교 박해건 때문에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묘 도굴 사건으로 묘정기와 역사적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한다. 소백산맥을 조산으로 하여 속리산을거처 차령 청양의 백월산 홍성의 대월산으로 이어져 가야산이 만들어지고

덕숭산 용봉산 덕산일대가 여러 명당이있다고하며 자미원 지구에서 하나박에없는 천하명당 자미원이있다 고한다. 그자리 임자는 누가 될지. 72억 인구를 다슬릴 지도자가 나올자리라하니. 눈여겨 보시길바람..

천안하면 유관순 열사가 생각난다. 유관순은 본관이 고흥이며 1902년 5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 1919년 이화학당 학생으로 독립선언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4월1일 아우내 장터 독립만세 주역으로 항쟁했다. 감옥에 갇힌 유열사는 갖은 고문에굴하지 않고 . 여섯 토막으로 찢기는 참살을 당해 죽었다 유열사 시신은 서울 이태원동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부모님도 항일운동으로 순국했으니. 누가 묘를 돌볼수 있겠는가 ?
1930년 이곳으로 도로가 건설되면서 흔적도 없어졌다. 비록 유골은없어졌지만 애국정신만은 찬란히 빛나 1973년 사람들이 힘을모아 천안 이곳에 추모각과 초흔묘를 만들어 넉을위로하고 있다고한다. 천년에한번씩 나타나는 크고 빛나는 별. 바로 이곳에 내려와 음력 1902년 3월 15일 유관순으로 태어나우리 민족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다.

태화산 광덕사 호서제일서원. 조선시대3대명기 황진이 부안에 이매창 김부용이라 시잘짓고.가무에 능한사람으로 미인별곡에 한 만은 일생과 열녀기생으로 널리알려진 김부용 . 옛말에

사람을 보거든 후반생을 보아라 하였으니 진실로 명언이였다 . 비록 천한 기생이였지만 낭군을따라 수절한 김부용은 그 이름이 지금도곱게 내려오고 있다 비단 수건에 눈물젖은 김부용은 1812년에 평안도상천에서 무산 열두봉정기를 받고 가난한 선비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김부용은 15세에 기적에 올라 평양감사로 부임해온 김이양을 만났다. 김대감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끔찍이 사랑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애타고 눈물겹다.

운산 회원님 여러분은 이별이 없길 바람니다.
재회날만 기달린 부용 . 한양으로와서 김대감과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살았다.
김대감이 세상을떠나자 천안태화산에 묻혔으니 부용은 16년 더살다 죽어 낭군곁에 묻히고 싶다하여 후손들이 김대감아래 묻었다고한다. 지금도 태화산 기슮에는 김이양과 김부용이 함께 정답게 지내고 있다하니 운산산악인 여러분들도 부러움을 갖으시길 바람니다.

고려태조2년에 승상하는 고장이라 덕산 고을 지명. 넓은 들을바라보며 사람들이 심성이 곱고 . 시기하지않은 온순한 성품을 타고 났다하여 이런 연유로 가야산의 덕산과 수덕사 보덕사 그리고 열녀 맵덕. 맵덕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맵덕이란 아가씨가 시집을갔다 . 불행하게도 23세 되던해 남편이 죽었다그러나남편무덤에 막을 짓고3년동안 제사를 지내며 소금과 장을 먹지않았다고 한다. 부모가 재가시키려 하였으나 부모뜻을 따르지 않고. 남편 명복을빌기위해 승려가 되어 맵덕이 죽은후에 열려로 정해졌다고한다.

홍성 노은단은 낙락장소는 더 푸르더라. 발길을멈추고 이고장을 우러러 보아야 할홍성 성삼문이 있기에 조선의 한결 그빛이 푸르고 충절의극치와겨레의 혼은살아있는 것이 아니겠는가한다 .

홍성군흥북면 노은리 바로이 마을이 성삼문이 태어난 곳으로 사육신위패를 모신 노은단이 있다. 성삼문은태종 18년(1418년) 무관인 아버지승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 태여났다고한다. 성삼문을 낳을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고 묻는 소리가 세번 들려왔다고 해서 이름을 삼문으로 지었다고한다.

성삼문은 기이하게도 최영장군 생각에서 태어났다. (동국여지승람)에 고적에보면. 그가태어난그집에는 외조부 박첨이 살았다. 삼봉산 아래 적동리가 지금은 노은리로 바꿨는데.상삼문 때문에 노은리로 붙여진 것이다. 노은리는 논산군 (단종)에 대한 은혜를 줄인 말이라 한다.

단종에게 충성을다하기위해 모진 형벌과 멸문.그리고 화마가 그 육신에 빛을 뿜었다. 노능 서원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이지등 사육신 위패를 모시고 별사에는 성삼문 아버지 성승의 위패도 봉안한 충절 사당이라고한다.
오늘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훈민정음 성삼문과 같은 학자가 있기에 이나라 번영이 있지 않나 생각해보자. 성삼문은 새남터 형장으로 가면서 시한수를남겼다,

울리는 저북소리 이목숨을 재촉한대
고개를 돌려보니 해는 서산에 저문구나.
저승가는길엔 주막집도 없다는데
오늘밤은 누구집에서 쉬어갈고..

성삼문 가문의 대가 끊기였지만 노량진 언덕의 충절은 만년이 지나도 충절로 살라 계실 것이다
홍성 홍주성은 사적 제231호로 고종 7년(1870) 홍주부사 한응필이 각지 석공 들을 동원하여 개축하고 네 방향에 문을 세웠다고 한다.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는 스님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생가가 있다. 그리고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는 1920년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 생가가 있어 홍성은 충의 고장임을 느끼게 해준다.
이곳 고장을 산행을 하시면서 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길 바람니다.

김좌진은 본관이 안동이며 김혁규 아들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3세때 아버지를 여의시고 . 김좌진은 15세때 대대로 집을 돌보던 하인 30명을 모아놓고 그들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신분을 해방시킨뒤 각자에게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김좌진은 1916년에 광복단에 입단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했고 1918년 만주로건너가 뛰어난
지도력과 애국심을인정받아 1919년 북로군정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했다.
그후 청산리 대첩에서 홍범도 장군과 함께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한다
만주에서 시해된 김좌진 유해는 국내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만주에 묻혔다가 1940년 유골이 들어와 홍성군 서부면에서 장사를지냈다. 그후1957년에
후손들이 보령군 청소면 진죽리에 이장을 했다한다.

그리고 김좌진 생가터는 항일 투쟁의 유적지로 교육자료를 삼는다 하니 이민족가슴에 영원히 장군얼이 남아 있을것이다
충남보령 만세토록 편안하다. 보령은 산이높고 아름다운 고장이다,

고정리 앞바다에 효자도에 속한 월도가있다. 섬이 반달처럼 생겼는데 15가구 이상이
이섬에서 살면 불운이생긴다하여 . 항상 가구수를 조절하며 지금도살아간다하며 월도
가구수는 현재13가구라한다.
달도차면 기운다는 옛말처럼 보름이넘으면 달이 기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보령에도 매우 희소한 성씨가 있었다. 궉씨성인데 보령지방에 처녀인지 과부인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고 있었다.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 바위 아래 몸을 피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새우젓 장사도
바위밑에 들어왓다. 두사람은 큰일을 저질러 버렸다. 10개월이 지난 후에 옥동자를 .
낳았다..
집에서 쫒겨난 여인은 고을 사또를 찾았다. 아기성을 지어달라고 난처한 입장에 처한 사또.
마땅한 성씨가 떠오르지 않아 당시 정황을 자세히 말하라고 하자
그 여인은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바위 아래서 일을하는 동안 비가 그처 밖으로 나오니 궉궉하며 새한마리가 하늘로 날아갔습니다.

그러자 사또가 무릅을 치며 성씨를 새가 하늘로 날아갔으니 하늘천자 밑에 새조자를 붙이고새가 궉궉 울렀으니 궉가로해라. 그래서 세상에 궉씨성이 생겼다.
그동안 후손이 많이 나왔으나, 1995년 성씨 대가끊겼다고 하며. 우리나라 성씨가 171 성씨인대 이제 170성씨다. 지금 부산에 서양인이 와서 하씨성을 갖었으나 기존 하씨성이 있으니 성씨170성 숫자 변동은 없다.

자연과 산하을 사랑하는 산악인 여러분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받아 땅에 의지 하며 산행을.한지가 각자 나름대로 되었을 줄 압니다.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 자연과 다르지않다.
인간과 자연은 마치 부모의 과계와도 같다고 했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산하 의 각자의 산행은 자연과 일치한 역할을 여러분에게 하고 있다. 여러분 건강을 책임지니 말이다.

자연과 함께 등산하시면서 좋은 점은 여러분 마음에 선불을 주고 본을 받고 좋지 않는 일을
볼때에는 얼마라도 부도를 내도 괜찮다 하는 말씀과 아울러 앞으로 10_15년 후에는 식량
문제는 괜찮다는데 물부족 때문에 국제분쟁이 잃어나지 않을까 하는 학자들 예언도 있다하고 동남아 지역 어린이 성매춘 문제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거라 하며,

더욱이 우리나라 사람들 예외가 아닐거라 생각한다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풀입에서 떨어진 한알의 이슬방울이 아무리 작은것일지라도

크기만큼 대지를 적시듯이 한가정이 건강할 때만이 사회가 밝아 질것이다 산악인 여러분 각자 자녀에게 큰관심 갖으시길바람니다..

사람에게 칭찬은 농작물에 비료, 거름 주는것과 같다했다 산악인여러분 .우리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맙시다
www.alpenglow.co.kr


▣ 김현호 - 학교다닐때 국사공부 열심히 했었는데 이글을 보니 제가 모르는게 넘 많네요^^알팬글로우님! 항상 행복하시길...
▣ 김정길 - 나는 총각 시절부터 지금까지 장항선 애찬인 이기에 지금 김완중님의 모음글이 더욱 소중하군요, 수고하셨습니다.
▣ 운해 - 지난 의상봉 모임때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햇는데 이렇게 온라인에서 뵈오니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덕산일대의 방대한 자료에 의한 풍수지리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는군요 . 잘 보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 김찬영 - 구구절절이 맞는말만 하시는것같군요 많은글중에 맨 마지막부분의 칭찬은 농작물에 비료와 거름을 주는것과 같다는말이 가슴에 와닿으네요 ,우리 모든것에 인색하지맙시다
▣ 진맹익 - 너무 좋은 글인지라 몇번을 뜻을 새기면서 읽었읍니다. 다음부턴 산과 정사 야사를 아우르는 좋은 글을 방방골골 확대 시켜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과 민족의 굴강한 기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겄을 깨닫게 해주십시요. 좋은 글 기다리며 선생님의 건강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