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04.5.2일)은 구름의 신 제우스의 심술에 놀아난 힘든 하루였습니다.
그래서 철쭉꽃을 테마로 하는 과천시 산악연맹의 회심작 "제암산-사자산-일림산"의
종주산행 프로그램이 제대로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해 아쉬움이 더한 하루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테마산행을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내장산이 가을 한 철 단풍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황매산이 5월 며칠간 철쭉 때만 오를 만한 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산을 단일테마로 재단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에 대한 성찰 없이 서둘러 이 산은 이래서 좋고 저 산은 저래서 언제
올라야 제 맛이라는 산지들의 촌평에, 저는 산을 마치 영화나 드라마처럼 엔터테인
먼트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하여 거부감을 갖습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기에 제게는 산이 고향입니다. 고향을 찾는 것이 테마여행이 아니 듯이 산을 오르는 일이 제 일상이지 결코 테마여행일 수는 없습니다. 산은 바로 자연이고 자연은 제 삶의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음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국내 최고의 철쭉꽃 단지를 때맞추어 찾는
일이 쉽지 않기에 전남 장흥군과 보성군의 경계를 이루는 제암산-사자산-일림산
일대의 철쭉꽃 평원을 밟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과천시 산악연맹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이번 산행은 예전만큼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어제 밤 11시 15분 과천을 출발한 버스가 밤을 뚫으며 달려 새벽 4시 반 제암산 몇 키로 전방의 요철이 심한 보성의 지방도로를 지나던 중 생각지도 않은 사고가 발생해 일행 중 몇분이 다쳐 인근의 병원을 찾아 들러야 했기에 제 시간에 제암산에 다다를 수 없었습니다.

아침 5시30분 보성군에 위치한 제암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하였습니다.
불의의 안전사고로 까먹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오늘 오르고자 한 연봉 중 가장 높은 해발 779미터의 제암산을 포기하고 곰재로 바로 올라 사자산과 일림산을 밟은 후 용추계곡으로 하산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5시 35분 산행을 시작해 20여분 자연 관찰로를 걸으며 몸을 풀고 나니 곰재를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6시15분 곰재를 올랐습니다. 우측으로 1.6키로 떨어진 곳에 제암산이 포진해 있었는데 그 자태가 의젓하고 웅장해 보여 못 오르는 아쉬움이 더욱 크게 느껴졌습니다. 곰재에서 사자산까지 이어지는 철쭉군락은 보기 드문 장관이었습니다. 때맞추어 흩뿌리는 봄비를 머금고 있는 철쭉꽃들이 드넓은 평원 여기저기 만개해 있어 온산이 화사했습니다.

"제암산 철쭉공원"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곰재산을 지나, 7시 5분 해발 668미터의
사자산에 올랐습니다. 한국의 철쭉꽃을 시샘하는 제우스 신의 심술이 지나쳐 잠시도 사자산 정상에 머무를 수 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드셌습니다. 사자산 두봉으로 향하여 200여미터 전진하다 다시 되돌아와 일림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을 탔습니다. 금남
정맥에서 갈려나와 전북 완주의 주화산에서 시작되는 호남정맥은 내장산-무등산-제암산-조계산-백운산으로 연결되는 호남의 큰 산줄기로, 그 거리는 도상으로 400키로가 넘어 13개 정맥 중 낙동정맥 다음으로 긴 제 2의 정맥입니다. 오늘 산행으로 내장산과 무등산에 이어 세 번째로 호남정맥을 오르는 셈입니다.

7시40분 급경사의 길을 하산, 150여 미터 고도를 낮추어 찾은 조용한 안부에서 일행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면서, 곰재를 출발한지 1시간 반만에 가진 달디단 휴식을 즐겼습니다. 소찬의 도시락을 성찬처럼 맛있게 들고 있는 몇 분들의 편안한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8시 정각 다시 발동을 걸어 일림산으로 내달렸습니다. 청계산보다 더욱 편안한 능선 길을 걸어 9시에 용추골로 빠지는 골치를 지났습니다. 회장께서 먼저 용추골로 하산하고 다른 분들과 함께 나무계단 길을 30분 가까이 더 걸어 다다른 일림산 전방 680미터 지점의 골치산에서 숨을 골랐습니다. 골치에서 다시 시작되는 철쭉군락지가 정상에 이르면 이를수록 더욱 넓어져, 철쭉꽃으로는 이곳 일림산이 작년 5월에 오른 황매산을 압도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시 47분 해발 664미터의 일림산 정상에 서자 제우스 신의 광기가 극에 달해 태초의 비바람을 재현하는 듯 싶었습니다. 거친 바람에 수평으로 휘날리는 빗방울이 귀속을 때렸고, 땀흘려 정상에 오르는 이들에 그 자태를 뽐내고 싶어하는 철쭉꽃들이 희뿌연 안개에 가려, 그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비바람이 동반한 냉기에 떠밀려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떠야하는 저희들은 이 시간을 증언하고자 같이 오른 분들의 자랑스런 모습들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이곳 일림산의 변화무쌍함을 지금까지 지켜 보아왔고 또 지켜볼 어느 분의 산소를 뒤로하고 일림산을 탈출하듯 9시55분 용추골로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매사 서두른 뒤끝이 그렇듯이 일행 4명이 무지개골로 잘못 내려와 용추골 반대편인 안양의 장수마을에 도착했음을 11시에야 확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폭우로 변한 5월의 큰비에 젖은 온 몸을 40분여 포장도로를 걸으면서 데웠습니다. 그리고 길섶에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노랑꽃의 씀바귀를 카메라에 실었습니다. 11시40분 택시를 잡아타고 회천리로 가서 일행들과 합류, 율포리해수욕장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들은 후 보성의 차밭을 들러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제우스신의 심통으로 참 모습이 가려진 철쭉꽃들에 칭찬의 몇 마디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여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지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하산한 저희들을 기다린 분들께 부끄러웠습니다. 또 불의의 사고로 산행을 같이 하지 못한 분들에 저희들만 올라 죄송했으며, 늦게나마 빠른 쾌유를 빕니다.

산밑에서 불어 올라오는 비바람이 안경을 때려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었기에 산길을 걷기가 고통스러웠습니다. 연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걸었으며, 때로는 안경을 벗어들고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제우스 신의 심술로 길의 참뜻을 되새겨본 하루였습니다.

이번 달에는 천 상병 님의 시선 "주막에서"에서 "길"을 뽑아 올립니다.

" 길"

가도 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무인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 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 가도 무인지경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