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9

추월산의 달그림자를 찾아서

 

 

 

 

 흐르는 강물도 가버린 세월도 다시는 제자리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아주 평범한 이치가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지 하늘의 뜻을 알고 있다는 목리(木理)의 길목에 서서 자꾸만 되새기는 것은 나이 듦일까.

 

 분명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다는 생각 때문에 살아온 날에 더 진한 향수를 느끼면서 조급함에 허둥대는지 모른다. 지나간 일들을 돌이키며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고 푸념을 늘어놓은들 이제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자연(自然)은 어김없이 해야 할 일을 잊거나 그냥 넘기지 않고 또다시 찾아왔다 돌아가지 않는가.

 

 지나간 세월은 주름이라는 굴곡진 삶의 증표를 얼굴에 남기지만 꿈과 열정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면 영혼에 주름이 지는 것이다. 쪼들린 삶에 꿈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반복된 일상으로 전락하여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지기에 뒤틀린 심사를 확 풀어버리고 화석처럼 굳어가는 마음자리를 조금이라도 이완하려고 산으로 가련다.

 

 지난주에 금성산성을 일주할 때, 담양호 건너편에 秋月山이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있어 오르고 싶었는데 느닷없이 그 욕구가 충동질해 오늘도 담양으로 달려간다.

 

 추월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스님이 드러누운 형상으로 비춰진다. 누워있는 사람의 머리 부분이 보리암(菩提庵) 정상이다. 이 암봉(岩峯)은 요즘 흔한 말로 몸짱 같이 잘생기고 우람한 남성미를 드러내 보이기에 많은 山友들이 관심을 갖고 찾는 곳이다.

 

 숨이 콱 막힐 정도로 위압적인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가 한데 뭉쳐 신령스러움을 간직한 채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찾아오는 길손을 반갑게 맞이한다. 주차장에서 山頂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길이 있다. 예전에는 보리암을 거쳐 오르는 외길이었으나 근래 암자를 거치지 않고 오를 수 있는 제2등산로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산행할 때는 보리암을 거쳐 산정에 올라갔다가 제2등산로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 여러 가지로 무난하다. 그러나 모처럼 명퇴하신 선배님을 모시고 산행하기에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제2등산로로 접어든다.

 연두색 신록의 농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남도의 정취를 맛보기 위해서 대구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했다는 단체 산우들과 함께 산행을 시작한다.

 

 추월산은 어느 코스로 오르든지 에누리 없이 가파른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조금만 오르면 사위(四圍)가 훤히 트여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어 피로감이 상쇄되므로 그리 힘든 줄 모르고 산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가파른 오르막은 어김없이 기분 좋은 구슬땀을 쏟아내게 한다.

 

 어젯밤 지인(知人)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상사는 얘기를 나누면서 잔을 비운 탓인지 여간 부대낀다. 그러나 누구를 대신 품 팔아서 오를 수 없기에 가쁜 숨에 장단을 맞춰 묵묵히 걷는다. 담양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굴 쉼터에 도착했으나 멀리서 오신 손님들이 선점해버려 짐을 풀지 못하고 천근같은 무거운 발길을 터벅터벅 더 옮긴다.

 

 꽤 오랫동안 같은자리를 지켜온 단풍나무 그루터기에 고만고만하게 열두서너 줄기가 한데 엉켜있는 모습이 특이하기에 잠시 발길을 멈춰 선다.

 

 “저기 저 단풍나무 참 이상하게 생겼네.”

 “나무줄기가 한곳에 붙어있으니 兄弟木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네.”

 

 요즘 우리사회는 급속한 핵가족화로 형제간에도 남 보듯 무심하게 살아가는 세태로 변모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돈독(敦篤)한 형제애를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훈훈한 미담은 어느덧 선망의 대상이 되어 화젯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좋은 일에는 남이요 궂은일에는 형제간이다”라는 속담처럼 형제지간에 깊은 우의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살맛나는 인간살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동안 늘 바쁘다는 핑계로 형제들에게 안부전화도 자주하지 않고 살아온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전망 좋은 동굴에서 山頂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는 오솔길로 이어진다. 병풍처럼 깎아지는 듯한 암벽을 우측으로 끼고 녹음이 우거진 한적한 길을 걷는 기분은 상연(爽然) 그 자체다. 마지막 고갯마루 쉼터에서 시원한 산들바람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며 지난주에 거닐었던 금성산성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삼스럽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담양호의 자태는 또 다른 풍취에 흠뻑 취하게 한다.

 

 길가에 소담스런 연분홍 철쭉꽃이 나무그늘에서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어 지친 길손을 맞이한다. 山頂에는 이곳까지 힘들게 올라왔다는 성취감에 젖은 산우들이 가쁜 숨을 고르면서 따사로운 햇살아래서 넉넉함을 만끽하는 모습은 한없이 여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답답한 세상살이가 고달파 근심 걱정을 훌훌 털어버리려는지 목청을 돋워 소리치는 山友의 모습이 애잔하기 그지없다. 산에서 함성을 지르면 산행 예절에 어긋난다고 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저토록 처절하게 절규할까 고단한 세파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이곳에서 보리암을 거쳐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한 주의가 요구되는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원점 산행이 아니라면 건너편 약수터 길로 내려가거나 그다지 볼품은 없지만 호남정맥에 솟아있는 진짜 추월산 정상을 밟아보고 밀재나 월계마을로 내려가는 것도 좋으련만 세상만사가 어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일행들에게 안전산행을 신신당부하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선다.

 

 암자에 들리지 않고 계속되는 위험구간을 천천히 내려간다. 순간의 실수로 평생을 두고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안전산행에 최선을 다한다. 보리암 山頂에서 이곳 동굴까지가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산에 오를 때에는 언제나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禮를 갖추는 태도가 산행의 기본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동굴 벤치에 앉아 별 탈 없이 내려온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목을 축인다.

 

 그동안 골프에 열중하다가 모처럼 산행에 나서는 선배님을 배려해서 쉬엄쉬엄 거닐다보니 2시간 30여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어찌 시간이 문제인가 오랜만에 뵙고 싶은 사람들과 다시 만나 함께 땀 흘리면서 산행하는 묘취를 그 누가 알겠는가. 이런 맛에 길들어졌기에 그 맛을 잊지 못해 또다시 산을 찾는가보다.

 

 "자네들과 어울려 산에 다녔던 지난시절이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어.” 유난히 흰 머리카락이 늘어나신 선배님의 한마디가 자꾸 뇌리를 맴돈다.

 

 秋月山은 이름그대로 가을 산이지만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만춘(晩春)에 찾아갔더니 더 좋은 것 같다. 보리암 山頂에 올라 달그림자를 잡아보려 했으나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하고 아쉬움에 젖어 돌아서는데 秋月山 달그림자가 潭陽湖에 아련하게 떠있으나 안쓰럽게도 건져 올릴 수 없어 탄식하며 바라만 보았노라.

 

 언제나 마음의 그물을 만들어 저 달을 끌어 올릴지 - - - - - (끝) 

 


▣ 브르스황 - 한 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 멋진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반대로 올랐었는데..... 항상 건강하시고 즐산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