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산(436.5m) 진달래꽃 산행 Photo 에세이
<2008.4. 10/ 미꾸지고개-조망바위-진달래군락-낙조봉- 고인돌군-진달래군락-고려산/고양시 늘푸른산악회 따라 홈 http://cafe.daum.net/greenalpine2030>

*.들머리 미꾸지고개 이야기 
 나는 고려산에 진달래꽃을 찾아 4번째 왔다.
2004년 봄 등산회 따라 처음 왔을 때에는  국화저수지 청소년 수련원으로 해서 비운의 왕 고려 고종의 홍릉을 통하여 올랐고, 그때 배탈로 제대로 못 본 것이 아쉬워서 며칠 후 다시 와서 낙조대 적석사로 하산하였다.
작년에는 아내와 함께 백련사로 해서 고려산에 올랐는데, 오늘은 미꾸지고개(해발102m)를 들머리로 오른다.
미꾸라지를 북한 사투리로 ‘미꾸지’라 하니 미꾸지고개는 미꾸라지고개의 준말 같다.
이곳은 간척되기 전에는 바다 쪽으로 길게 내민 좁은 곶이었던 곳이다.그러니까 그 곶 모양이 미꾸라지 같아서 생긴 말이 아닐까 추축해 본다.
이 미꾸지 고개는 고려산의 서쪽 끝부분인데 진달래와 연관하여서인지 산화(山花)마을로 불리는 곳에 있다.
이 고려산은 봄에는 진달래로, 가을에는 억새 군락 단지로 수도권 경기 일원에서 가장 유명한 산이다.

 고려산은 정상이 겨우 해발 436.5m밖에 되지 않는 산에다가 그 정상까지 오르지도 못하는 산이지만 남보다 더 숨이 찬 체질의 나에게는 산은 산이라 몹시 힘들었다.
그러나 비온 후에 맑은 날씨라서 전망도 좋고 능선에서는 시원한 해풍(海風)이 불어 주었다.
그러다 우측으로 나타나는 고려지(내가호수)와 바다 건너 석모도의 풍경이 눈을 더욱 시원하게 하여 주었다. 게다가 도중 도중 만나는 진달래꽃은 봄날의 등반길을 만끽하게 하였다.
산악회 리더가 도중 도중 쉼 시간을 주어서 등산을 더욱 즐겁게 하였다.



그렇게 조망바위를 지나니 316봉부터는 진달래 군락지였는데 막 피기 시작한 꽃들이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에다가 간밤의 비에 씻겨서 그 색깔이 더 선명하다.

*.고려산과 연개소문 이야기 

고려산에는 이런 전설이 전하여 온다.
 -중국에 살던 5형제 산이 있었다. 어느 날 심한 폭풍에 밀려서 오형제 산이 이곳에 떠 내려오고 말았다.
그중 마니(摩尼)는 맏이므로 강화에서 제일 높은 마니산(摩尼山, 468m)이 되었고, 나머지 형제들도  강화(江華)의 혈구산(穴口山, 466m), 진강산(443m), 고려산(高麗山, 436m), 능주산( ? m)이 되었다.

이 길 말고 산의 동쪽 아스팔트를 따라 레다기지가 있는 정상 쪽으로 오르다 보면 오련지(五蓮池)가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산 정상 북쪽에는 크고 작은 5개의 오정(五井)이 있다.
이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4세기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정상의 큰 연못은 하늘에 제(祭)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 되었고, 나머지 작은 연못 4개는 연개소문이 어렸을 적에  말 타고 군사 훈련할 때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이었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 4년(416년)에 한국에 와서 절터를 찾아다니던 중국 진(晋) 나라의 천축(天竺) 조사가 강화도에 이르러 잠을 자다가 꿈에 백발노인 의 계시를 받고 이 산으로 올라갔더니 정상의 연못에 적(赤) , 황(黃) , 청(靑) , 백(白) , 흑(黑) 5가지 색깔의 연꽃이 피어 있었다.
천축 스님은 그 다섯 가지 꽃잎을 따서 산 위에서 불심(佛心)으로 공중에 날려 보냈다.


 
적석사 대웅전/ 백련사 전경
그 꽃잎이 떨어진 곳에 그 색깔을 따라  좌청룡 청련사(靑蓮寺), 우백호 백련사(白蓮寺), 북 현무 흑련사黑蓮寺, 남주작 적련사(赤蓮寺), 가운데에  황룡사(黃蓮寺)를 지었다. 청색 꽃은 조사가 원하는 곳에 떨어지지 아니하여서 조사가 원하던 곳에다 원통하다는 뜻의 원통암을 지어 놓았다. 
지금도 그 중 흑련사와 황련사는 폐사(弊寺) 되고 나머지 3개의 사찰과 1개의 암자가 천년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연못은 2003년 진달래 축제를 위해서 이 고장의 뜻있는 유지들이 출연금을 모아 정상의 오련지를 본떠서 실제 크기와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 산의 이름을 옛날에는 오련산(五蓮山)이라 하였는데 고려가 몽고의 난을 피하여 강화로 천도하면서 고려산(高麗山)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구려 연개소문은 영양왕 때(603년)에 고려산 미꾸리고개 아래 하점면의 지금으로 치면 군수였던 태조(太祚)의 아들로 태어나서 말을 타고 무술을 익혔다는 곳이 이 고려산이다.
그 후 원(元)의 사신이 강화에 와서 지맥을 끊기 위해서 고려산 사방과 오련지(五蓮池)에 큰 칼과 못을 박고 흙으로 덮었다. 연개소문과 같은 영웅이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이 영산(靈山)에 대한 투기와 시기 때문이었다.
고려산 서북쪽에 시루 모양의 시루미봉이 있는데 거기에 연개소문의 집터가 있다

*. 낙조대 이야기
고려산은 봄의 진달래도 유명하지만 가을의 억새 또한 일품이다.
게다가 지금 내가 오른 낙조봉(落照峰,350m)아래 낙조대(落照臺)는 강화 8경 중의 하나인 ‘적석사 서해낙조’로 해넘이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강화 8경이 무엇 무엇이던가.
마니산의 단풍, 전등사에서 들려오는 해질 무렵 종소리, 적석사 서해낙조, 손돌목 급한 조수의 물결과 광성보, 연미정 달맞이, 보문사 석불, 갑곶돈대, 초지진의 포대다.
그 낙조대는 낙조봉에서 우측 하산길 10m 거리 아래에 있는데 연말이 오면 이 낙조대에서 해넘이 행사가 치러지는 곳이다.
낙조대에 멋을 더하여 주고 있는 것이 적석사에서 조성하여 놓은 점점이 흩어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해수관음보살이다. 
해수관세음보살은 많은 중생들의 소원을 풀어주는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불상이다.

이런 관음보살로 유명한 곳은 남해 금산의 보리암,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그리고 강화도 보문사의 해수관음보살이다.
강화 낙조대에는 적석사 낙조대 이외에도 마니산 , 장하리 주변 일대, 석모도 보문사, 석모도 장구너머, 분오리 돈대 등이 더 있다. 
지금은 늦은 2시경이지만 적석사 낙조대는 가히 환성적인 모양이니, 강화 인들의 자화자찬(自畵自讚)의 말을 들어보자.









"낙조대는 해발 343m로 산세가 아름답고 경관이 빼어나 서해 낙조를 관망할 수 있는 명산으로 주변 2,000여 평의 억새밭과 어우러진 해질녘의 낙조는 대단히 아름다워 강도팔경(江都八景) 중 한 곳으로 점점이 깔린 섬들 사이로 떨어지는 태양은 가히 선경이다."

적석사는 이 낙조대서 500m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전등본말사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의 이름은 전설에서 말하듯 적련사(赤蓮寺)라 하다가 적석사(積石寺)로 바뀌었다고 전하여 온다.고려시대 몽고가 침입하였을 때 이 적석사는 임금의 거처로 쓰이던 절이기도 하였다.


*. 고인돌 이야기
  낙조봉에서부터는 고려산 정상의 레이더 기지를 바라보고 가는 길인데 1만평의 억새군락지를 지나면 고인돌 군이 두 군데 있다. 이 지석묘 군락지는 솔밭삼림욕장 지역이기도 하였다.
고인돌이란 선사시대 돌무덤으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는 것이다.
고인돌에는 옛날에 추장이나 부족장 같은 한 사람을 묻기도 하지만 집단 무덤인 경우도 많다.
고인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지상에 네 개의 판석으로 장방형의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는 것을 북방식(北方式)이라 한다.
남방식(南方式)은 한강 이하에 있던 고인돌로, 돌방을 지하에 만들어 놓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어 놓은 것이다.
전 세계에 이런 고인돌 수가 약 55,000 가량인데 그 중 우리나라에 그 중 지석묘의 50% 이상인 26,000 여기가 분포되어 있어서 유네스코가 2001년 12월2일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이 고인돌에서 나온 유물을 껴묻거리라고 한다. 화살촉, 돌검 돌도끼, 토기류, 옥으로 된 장식이니 박물관에 가면 유심히 볼 일이다.
강화 고천리(古川里) 고인돌 군은 만약에 울타리가 없고 거기 고인돌이라 써 있지만 않다면  그냥 모르고  지나칠 곳이다.
 -고천리 고인돌군은 다른 곳의 고인돌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인돌은 너무나 오랜 세월에 자연적으로 무너져서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로 고려산 서쪽 능선을 따라 해발 350~250m 지점에 총 20기가 흩어져 분포하여 있다. 
가까운 곳의 암석에는 이 고인돌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어 세계가 보존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곳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철없고 무식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네가 고인돌야, 제네가?”
 “지금 뭐라 했소? '제네가라니-.' 저 고인돌은 역사 이전에 우리의 조상들이 묻힌 무덤으로 세계문화 유산인 우리 민족의 자랑인데  ‘제네가!’라니-”
점잖게 타이르다 보니 그 옆의 여인은 진달래꽃을 한 아름 꺾어 들고 있었다. 그러면 되냐고 질책하니까 말한다.
 “주워 가져 가는 거예요.” 
무식한 놈들은 무식한 놈들끼리 모여 사는 모양이다. 욕이 입가에 맴돈다. ‘죽어서 지옥도 못갈 놈들 같으니-.

*. 진달래 이야기
드디어 고려산 앞 이 산의 진달래군락지로 최고의 장소라는 전망대에 이르렀으나 이제 꽃은 피기 시작하였을 뿐 만개하지 않아서 진달래꽃밭이 아니라 진달래 봉우리밭이다.
4월 12일부터 24일까지 고려산진달래 축제라는데 우리는 한 일주일 앞서 온 것이다.
그래서 다음 그림들은 전에 찍은 사진으로 그 아름다움을 대신하였다.








 
진달래꽃은 꽃 모양이 삿갓을 뒤집어 놓은 듯한 통꽃으로 잎은 손가락처럼 다섯 갈래다.
진달래꽃 색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아니다. 분홍색, 진분홍색, 자주분홍색에 흰 진달래도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를 식용으로도 하여 술을 만들면 진달래주요, 전을 붙여먹으면 화전(花煎)이요, 녹말가루를 묻혀 데친 진달래꽃을 국물에 띄우면 화채가 된다.
진달래는 약용으로도 쓰여서 천식(喘息)이 있는 사람들은 진달래를 꿀에 재어먹었고, 월경불순이나 해소(기침)는 물론 고혈압 환자도 애용하여 먹던 꽃이다.
그래서 오이보다 더 맛있는 오이를 참외라 하듯이, 독성이 있어 못 먹는 철쭉을 '개꽃'이라 하지만, 이렇게 먹을 수 있는 진달래는 '참꽃'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운의 왕 고려 고종의 능 홍릉

고려산 아스팔트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우측으로 홍릉 가는 내리막길이 나온다.
그 길에 있는 국화리 청소년 야영장에서 300m를 오른 지점에 능이 하나 있다. 
고려산(高麗山)이란 이름과 연관된 왕릉이다.
왕릉치고는 너무 초라한 홍릉(洪陵)에 앞에 서니 먼 옛날의 서글픈 역사를 뒤돌아보게 된다. 홍릉(洪陵)이란 고려 23대 고종(高宗)의 능을 말한다.
고려시대는 우리나라 역대 중에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개경(송도, 개성)의 이자겸의 난, 서경의 묘청의 난, 정중부의 난 등은 최충헌의 무인전단정치(武人專斷政治)로 이어졌고, 그 무단 정치는 최충헌에서부터 아들 우, 손자 황, 손자의 아들 의까지 무려 4대 6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뿐인가 그 동안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북으로는 거란족의 침입, 몽고족의 침입으로 이어져서 당시 고려 백성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절을 살아야만 하였다.
이렇게 하도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심해서 백성들은 하늘을 보면서 '이 놈의 세상 언제나 전쟁 없이 살게 되나' 하고 탄식을 하면서, 산속으로나 깊이 들어가 살기를 원하기까지 되었다. 그래서 고려자기 색깔이 파랗고,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라고 현실 도피를 노래하는 고려속요 청산별곡(靑山別曲)이 생겼다고도 한다.
그 불행한 역사의 한가운데에 고려 23대왕 고종(高宗)이 있었다.
고종(高宗)은 몽고의 침략으로 송도에서 강화도로 천도까지 하였고, 원 나라에 사랑하는 태자를 볼모로 보내는 수모까지 겪은 불행한 나라님이었다. 그런 한 많은 생을 강화도에서 마감한  능이 바로 고종의 능 홍릉(洪陵)인 것이다.

*.주꾸미 측제
하산하는 길은 발길도 가벼웠다.
늘푸른 산악회는 비영리적인 친목 단체라서 오늘 회비의 반은 버스 대여용으로, 나머지 반은 주꾸미 안주로 한 술 한 잔이 약속된 산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부대앞 공터 우측을 돌아 우리들의 관광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고비고개 길로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하산을 하는 것이다.
요즈음은 강화 먹거리로 쭈꾸미, 숭어가 제철이다.
'쭈꾸미'는 전라도 사투리로 표준어로는 '주꾸미'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주꾸미라 하였을까?
정약용 선생의 형인 정약전이 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어류학서(魚類學書)인 '자산어보 (玆山魚譜)'에 의하면 '주꾸미는 '준어(竣魚)'라 하고 한다. '竣' 자가 쪼그릴 '준', 웅크릴 '준'이니 쪼그리고 앉은 해물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주꾸미는 모양이 낙지와 같으나 몸이 그보다 짧고 둥글며 맛이 낙지만은  못한 연체동물이다. 몸길이가 약 20cm로 수심 10m의 모래 바닥에서 자라기 때문에 수심이 얕은 황해에서 주로 산다. 
산란기가 5∼6월이어서 알이 통통히 밴 4월 쭈꾸미는 살이 쫄깃쫄깃 고소할 뿐만 아니라 머리로 보이는 둥근 부분의 몸통 속에는 알이 가득히 있어 여간 맛있는 것이 아니다. 
그 먹통과 함께 알을 씹으면 그 쌉쌉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그래서 옛부터 '봄 쭈꾸미'라는 말이 생겼다.
그 주꾸미를 잡는 방법은 그물로 잡지 않고 굵은 줄에 빈 소라 껍데기에 구멍을 뚫어서 줄줄이 매달아서 바다에 내려 두고 한 삼일을 두면 그 빈 소라껍질 속에 주꾸미가 들어가 있는 것을 꺼내는 것이다. 소라껍데기 속에 옹크리거나(竣), 쭈구리고 있는 고기이기에 주꾸미라 했다는 것이다.
이 주꾸미는 사람이 식사로 보충하여 주어야만 하는 필수아노산이 풍부하고, 혈중 콜레스테톨 감소하며, 혈압을 정상화시키고, 당뇨 예방과 시력 회복 등에 좋은 타우린 성분이 다량함유되어 있다는 건강 식품의 해물이다.
우리들은 가천의대가 마주 보이는 선두리어판장 주차장에다 자리를 마련하고 그 주꾸미를 포식하고 있다.
오늘은 낮은 산이라 발도 즐겁고, 진달래꽃으로 눈도 즐겁고, 입도 즐거운 하루다.
"부라보, 부라보! 쭈꾸미, 아니 주꾸미여!"
"부라보, 부라보! 살아 있다는 즐거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