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紺岳山(675m) 산행기

•일시: '04년 8월 19일
•날씨: 비, 27℃
•오전 7시 10분 경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범륜사 입구 도착

볼일로 서울 갈 때 간혹 파주의 감악산 지도를 갖고 다녔는데, 시간이 안 맞아 아직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8월 18일 업무에 이어 19일은 오전 시간이 자유로워 며칠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태풍이 남부에 상륙하고 18일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려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경기지방에는 비가 크게 내릴 것 같지 않아 강행하기로 하였다.

의정부 북부역 맞은편 버스승강장에서 25번 버스를 타고 적성면 설마리 범륜사 입구인 설마교에는 7시 10분 경 도착하였다. 비가 많이 내려 ‘법륜사휴게소’ 차양막 아래서 우의로 갈아입었다.

(07:23) 설마교를 출발, 동쪽으로 시멘트길을 나아가니 또 다른 휴게소 직전에서 왼쪽으로 꺾였다가 왼편 계곡으로 옮겨서 길이 이어진다. 매표소는 있으나 이런 날 근무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법륜사 0.15km, ↓매표소 0.5km’ 이정표가 하나 보였다.

(07:32) 범륜사에 닿았으나 이전의 선답기를 많이 보아서 그런지 옥으로 만든 관음상을 포함, 절의 풍경이 눈에 익다. 해탈교 직전에 있는 이정표 ‘→임꺽정봉 2.7km·감악산 정상 2.5km·까치봉 2.3km’를 따라 오른쪽(동쪽)으로 나아가니 돌팍 길이 이어진다. 계류의 물은 다소 붇기는 했으나 발을 적실 정도는 아니다.

(07:46) 왼쪽으로 갈림길이 보이는데, 이정표에는 ‘↖까치봉 1.4km, ↗정상 1.7km, 범륜사 1.0km’로 적혔다. 오른쪽(동북쪽)으로 오르니 곧 이어 쉼터(만남의 숲)가 나오는데, 오른쪽으로도 길이 있을 듯했으나(나중에 알고보니 임꺽정봉으로 오르는 길이 있음) 직진하였다. 막바지 참호와 나무계단을 지나면 능선이다.

(08:09) 안부에 이르니 ‘←정상 0.2km, →임꺽정봉 0.2km’ 이정표가 있다. 거리도 얼마 안 되고 하여 임꺽정봉을 올랐다가 돌아올까 생각했으나 비바람이 거세 그만두기로 했다. 왼쪽(북북동쪽)으로 오르니 ‘위험’ 표시판이 보였으나 바윗길이 한번 나올 뿐이다.

(08:12) 안테나와 너른 헬기장이 닦인 정상에 도착하니 ‘감악산 해발 675m’ 표석과 백면석비(白面石碑)가 자리하는데, 석비 설명문에는 ‘삐뚤대왕비’로 불리며, ‘설인귀비’, ‘진흥왕순수비’ 등의 전설과 견해가 있다고 되어 있다. 가스로 조망이 안 되고 몸이 날려갈 듯이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서둘러 정상을 떠났다.

(08:15) 철망 담장을 따라 북서쪽으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곧 이어 주등산로는 서북쪽으로 휘어내려 쉼터를 지나니 대략 서쪽으로 뚜렷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08:23) 바위로 이루어진 까치봉에 이르니 등산로 안내도가 있고, 시야가 다소 트여 정상과 임꺽정봉이 바라보였다.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 철난간 내리막길을 거치니 호젓한 능선길이 잠시 이어졌다.

(08:33) 왼쪽으로 갈림길이 보였는데, ‘↖범륜사 1.4km, ↑산촌체험마을, ↓정상 1.3km’ 이정표가 있다. 아직 시간에 여유가 있어 좀더 능선길을 타기로 하고 직진하였다. 쌍소나무 언덕에 이르니 역시 왼쪽으로 갈림길이 보였으나 앞으로(북서쪽)으로 나아가니 ‘119구조’와 ‘화생방’ 표시판이 보이고 아래에는 성터인지 참호인지 자리하였다. 이어 난간이 설치된 바윗길 내리막이 잠시 이어지고 다수의 막사 자취와 헬기장을 지나 왼쪽에서 임도를 만났다.

(08:54) 임도를 따라 안부에 이르니 ‘객현二리→’ 표시목이 있다. 그러니까 이 고갯길은 설마리와 객현리를 잇는 것이다. 왼쪽(남쪽)으로 난 임도를 내려서니 계류에는 황토물이 거세게 흘러내렸다. 도로 직전의 주계류에 이르니 무릎까지 물이 차는데, 왼쪽을 보니 가게(원조감악산휴게소)로 넘어오는 철제다리가 있다.

(09:06) 도로에 닿아 설마치 쪽으로 나아가니 오른쪽에 인공폭포 시설이 보였으나 당연히 오늘은 가동하지 않고 있다. 9시 20분 경 ‘법륜사휴게소’에 닿아 산행을 종료하였다. 옷을 갈아입고 잠깐 기다리니 25번 버스(15분 간격)가 들어온다.

※ 허정구의 이야기 기행에 따르면 감악산 설인귀비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 우주의 주인공이 된 기분, 그것도 인상적이지만 감악산에 오른 이유는 따로 있다. 산정에 있는 ‘비똘대왕비’ 때문이다. 인근의 마을 사람들은 비석을 신성하게 여겨 빗돌대왕으로 부른다. 그 비석을 두고 설인귀라는 인물의 비라 하기도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이 근방까지 와서 고구려군을 정벌하였던 신라 진평왕이 세운 비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다섯번째 진흥왕 순수비가 아니겠는가 추정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비석에 아무런 글자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쑥돌 화강암이 비바람에 마모되어 글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이 때문에 어떤 학자는 도교적인 영향을 받아 애초에 글자를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누구의 비인지, 원래 글자가 없었는지, 해석이 분분한 채로 미궁에 빠져 있는 상태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세워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마을 전설에서는 그 비석의 주인공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다. 설인귀(613~682)는 나당 연합군의 일원으로 고구려를 공격한 적이 있고,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당나라가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의 초대 도호로 임명된 인물이다.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설인귀의 비석이 파주 땅에 세워진 것일까?
  비석 곁에는 설인귀 사당이 있어서, 설인귀를 감악산의 산신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350년전에 감악산에 올랐던 허목은 ‘미수기언’(眉璟記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정상에 있는 감악사의 신단은 높이가 3장이었다. 그 단 위에 비석이 있는데 아주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설인귀 사당이 있는데, 혹 왕신사(王神祠)라고도 하는 음사(淫祠)다.” 유학자다운 결말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감악사에 관해 민간에서 전하기를, 신라가 당나라의 설인귀를 그곳 산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계속하여 이 산을 중요하고 영험하게 여겨서 봄 가을로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고 전해 온다. 정상에 있던 감악사라는 절도, 설인귀 사당도 지금은 없다.
  그런데 파주 적성면의 감악산 아랫마을에 전해 오는 얘기는 훨씬 구체적이다. 아예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라고 한다. 임진강가인 적성면 주월리의 백옥봉 아래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율포리 임진강가의 용마굴에서 뛰쳐나온 지혜로운 말을 타고,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질하다 캐낸 큰 궤짝에서 갑옷과 투구를 얻어 쓰고, 눈 쌓인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무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가 지혜로운 말을 타고 다닌 동네는 ‘마지리’(馬智里), 눈 위를 말 타고 달렸다는 동네는 ‘설마리’(雪馬里), 무술을 연마한 동네는 ‘무건리’(武建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설인귀가 어떻게 당나라 장수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그는 을지문덕의 막하에 있다가 미움을 산 나머지,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범한 보장왕 4년(645년)에 당나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나당 연합군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안동도호부의 책임자가 되고, 도호부가 요동성으로 철수한 뒤로는 평양군공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마을 사람들이 설인귀 추모 사적비를 감악산 꼭대기에 세웠고, 훗날 산신으로까지 모셔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설인귀비에 얽힌 전설의 전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