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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고려궁터(외규장각)전경, 남산(남장대)에서 바라본 성곽 풍경-


강화 고려궁터&성곽길<자녀와 함께한 정기가족트레킹>
2169023058호          2023-06-11()

자리한 곳  인천시 강화군
지나온 길  중앙시장-성공회강화성당-고려궁지(외규장각)-산성북문-북산-북문-서문-남산-남문-풍물시장
거리및시간: 4시간07(08:10~12:17)         ※ 도상거리   :  10.1km     <보행수(步行數)   :  17,722>
함께한 이  : 3인 가족(딸, 아들 계백)
산행 날씨  아침엔 소나기, 비교적 구름 많음 <해 뜸 05:10     해 짐 19:53    /    ‘최저 18,     최고 26>
교통편 갈때 전철(6호선-합정역)-3000번 버스 환승-강화터미널
교통편 올때 풍물시장-강화터미널-3000번 버스 환승-전철(6호선-응암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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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고려궁터와 성곽길 개념도, 고려건국과 강화천도 내역-
가족테마 산행이 10년을 훨씬 넘어 20년으로 향해 뿌듯하다.
새벽부터 내리고 있는 비가 걱정이나 지나가는 소나기란 날씨예보를 믿고, 아이들과 집을 나서 지하철(6호선)로 합정역에 도착 강화행 버스로 환승하느라 비를 맞았으나, 오래지않아 비가 그쳤고 구름사이로 조금씩 볕이나 다행이다모자라고 못난 가장(家長)인 주제에 젊은 날에는 직장일이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집안대소사와 아이들 양육을 깡그리 집식구에게 맡겨두고, 언제까지라도 꽃피는 봄날이 계속될 것이란 착각에서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져들어 허공을 헤매다가, 금융위기(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표면화된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됐고 우리나라 경제계를 강타 위기가 찾아왔다)로 정년을 3년 남겨두고 구조조정 당하고서야 정신을 차렸으나, 집식구는 건강악화로 입원수술치료가 시급했고, 학업중인 아이들의 뒷바라지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수입단절로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서야 뒤늦게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나 경제력이 밭쳐주지 못하니 안타깝고 그간의 방탕했던 시간들이 죄의식으로 가슴을 짓눌러 반성하는 결단으로 마음을 비우고 가족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진솔하게 대화해야겠다는 절박함에서 2009년 가을 가족테마 트레킹을 시작했었는데 자연스럽게 매년 춘추 가족산행으로 발전한지 7년째에 암투병 중이던 집식구가 64세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남은가족(아들아빠)은 열심히 살아 코로나19때에도 멈추지 않았고 올해는 강화 고려궁성곽길을 찾았다.
img.jpg-대한성공회 강화성당 풍경이 이체롭다-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  : 고려시대의 궁궐과 조선시대의 외규장각이 있었던 장소다위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다. 1964년 6월 1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다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이후 최우 장군이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1234년 이 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칭했다이후 몽골에 항쟁하던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270년 몽골군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현재의 고려궁지 면적은 고려시대 궁궐의 영역 일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래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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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고려궁지 안내판이 전부다, 조선 강화유수부 정문(승평문)-
조선시대에는 행궁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1622년 (광해군 14)에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봉선전'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31년 (인조 9)에는 행궁을 건립, 1638년 (인조 16)에는 유수부 동헌을 개수, 1654년 (효종 5)에는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1695년 (숙종 21)에는 장녕전 건립, 1713년 (숙종 39)에는 만녕전을 건립하여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년 (정조6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 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외규장각을 포함한 여러 건물이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다1964년 고려 궁궐터는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 된 이후 현재는 강화유수부 동헌강화유수부 이방청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된 외규장각이 있다.              -위키 백과-

가문의 종손으로 할아버지 기일도 기억하지 못한 방탕생활
강화산성 북문에서 산책길에 접어들자 아이들은 저희끼리 관심사가 많았으므로 외톨이가 되고보니 지난날 아팠던 과거가 자연스럽게 소환된다어느 날 저녁 집식구가 숨넘어가도록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님께서 대노(大怒)하셔서 본가(本家)에 모인 형제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전화에 정신을 가다듬고 수첩을 뒤쳐보니 아차차 내일새벽이 할아버지 제삿날이다종손이란 자가 가문 최대행사였던 조부(祖父)님 기일(忌日)까지도 까맣게 잊고 거나하게 취해 흥청거리다니 용서받지 못할 행위다. 후손들 자녀(숙부님과 고모님), 손자(아우들과 사촌들), 증손자(조카)들이 모두 모였는데, 제주(祭主)가 무소식이니 기다림에 지친 아버님(종손)께서 집식구(큰며느리)에게 아범은 조부기일을 알고 있는지?를 하문(下問)하시자 놀란 가운데도 가재는게편이라고, 회사일이 바빠서 늦더라도 제사모실 시간까지는 도착하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얼버무려, 아버님 마음을 안정시켰다는 연락받자노기서린 아버님모습에 오금이 조려 택시를 불러 부랴부랴 달려가며 일각이여삼추다 느꼈으나 다행히 23시전에 본가에 도착 숙부님과 고모님들께 회사일이 바빠서 늦었다고 거짓으로 둘러대고 샤워 후 제례복으로 갈아입었으나 축문을 준비하지 못해 전전긍긍일 때집식구가 봉투를 건네주어 열어보니 아버님께서 준비해 주신 축문이다. 가슴을 쓸어내며 건성으로 격식대로 제사를 모시고 음복이 끝나자 연로하신 숙부님과 고모님들께서 자리에 드셨고옥상으로 불려가 아버님전에 무릎꿇고 많은 꾸지람을 듣고다시는 잡기 따위엔 절대로 손대지 않겠다는 맹세를 지키지 못하다가 2008년 금융위기로 구조조정당해 실업자로 추락하는 궁지에 몰리고서야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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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강화산성 북문(진송루), 서문(첨화루), 남산(남장대)-
강화산성(江華山城)  : 사적 제132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원래 내성·중성(中城외성(外城)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이 성이 규모 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1234(고종 28) 1월부터였고당시의 성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그리고 이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1250(고종 37)으로둘레가 약 7에 달하는 토성이었다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만 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松都 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昇平門)이었다한편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宣仁門), 서에 선기문(宣祺門), 남에 태안문(泰安門), 북에 북창문(北昌門)을 두었고동남에 장패문(長覇門), 서남에 광덕문(光德門), 서북에 선의문(宣義門), 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이 있었다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1259(고종 46)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외성도 허물었다그리고 고려정부가 완전히 송도로 환도하는 1270(원종 11)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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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남산 전경 사진에 개성이 눈에 들어온다, 토성과 석성이 비교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7(인조 5)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嬪宮)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다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선정부는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女墻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했다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暗門), ··서쪽의 장대(將臺)와 2개의 수문(水門등의 시설을 갖추었다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다동문은 망한루(望漢樓)인데 지금은 없어졌다그리고 서문은 첨화루(瞻華樓)로 1711(숙종 37)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남문은 안파루(晏波樓)로 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鎭松樓)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가 들어서 있었으나 1866(고종 3)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과 이방청(吏房廳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그리고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鍊武堂)터가 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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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고려궁 성곽길을 마감하고 터미널로 향한다-
고려궁터와 성곽 길 트레킹을 마감하며
기상청의 소나기예보에 은근히 걱정했는데 날씨 때문에 트레킹이 불편하거나 어려움은 없었고, 비교적 구름 많았으나 땡볕보다는 도리어 활동하기 좋은 날씨는 축복이었고, 아이들도 능동은 아니더라도 '피할 수 없다는 즐기자'는 생각으로 아빠의 요청에 협조해준 결과 계획대로 무난히 트레킹을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짧게라도 아이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그간의 불통이 웬만큼은 해소됐다. 점심은 아빠가 쏘기로 했으므로 풍물시장 식당가에서 딸아이 나는 제철이라 싱싱한 밴댕이회를, 식성이 까다로운 아들 녀석은 날것이나 생선을 즐기지 않아 바지락칼국수 그리고 맥주와 소주1병씩을 주문해, 딸과 아들은 맥주를 나는 소주잔을 가득 채우고,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려 자축하는 건배의식으로 성공적인 오늘 산행을 환호하며 후한 점수로 평가했고, 가을 산행지는 대차게 밀고나온 딸아이 의견을 존중해 더 많은 대화 분위기 차원에서 이견 없이 들레길로 확장했다.                   --.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을 찾아서~

2023-06-14
계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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