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4년 08월 29일 (음력 07월14일)

날씨 :맑음

산행지 : 북한산

산행자 : 한산협창립 1차 산행 57명

산행코스 : 불광역~족두리봉~향로봉~ 비봉~사모바위~ 승가사

산행시간 : 5시간 (식사시간 포함)

 

 

개요 :

 

1395년 12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새로 지은 경복궁에 들게 되니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새 도읍의 만년태평을 기원하는 가사를 지었다. 그 내용을 담은 '악장가사'에 북한산을 일러 '삼각산'(三角山'이라 쓰고 있다.

 

또 고려조 성종 12년(993년) 서희가 성종에게 아뢰기를 "삼각산 이북도 또한 고구려 땅입니다"하였고, 그뒤 고려사에 20여회나 삼각산이 등장하면서 각종 문헌과 비석 등에도 삼각산으로 굳어져 세종실록지리지, 대동여지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한결같이 '삼각산'이 북한산의 본 이름으로 사용되어 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남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시에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 떠나려.'라며 '삼각산'이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주객이 전도되어 '북한산'이 산의 본명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북한산'은 산이름이라기보다는 백제 건국 이후 한강 이북지역을 뜻하는 이름, 또는 고을 이름이었던 것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으르렁대며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었을 당시에는 개차산, 열야산, 진악산, 삼년산, 마시산 등 '산'이 붙은 이른바 고을 이름이 많이 나온다.

 

여기서 '산'은 고구려계 땅이름이 달(達), 홀(忽), 골(骨) 등과 함께 고(高) 또는 성읍(城邑)을 뜻하는 땅이름의 접미어로 쓰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여러 문헌을 눈여겨보면 산을 이야기할 때는 '삼각산'이라 하였고 한성부의 옛 고을 명칭을 이야기할 때는 '북한산'이란 이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각산 이름에 대하여 풀이하기를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솟아있으므로 삼각산이라 부른다 "고 풀이하고 있으나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

 

북한산이 어찌 이 세 봉우리뿐이랴.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과 맞먹는 노적봉, 보현봉, 문수봉 등 여러 봉우리들을 제외하고서 어찌 세 봉우리만 가지고서 논할 것인가. 이것은 뒷날 사람이 '삼각'(三角)이란 한자풀이에 너무 얽매어 부회한 결과일 뿐이다.

 

여기서 '삼각산'이란 이름은 '서울산'을 한자로 나타낸 것 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서울'의 본딧말이 '셔불'(세불)이다. 그러니까 '삼각'(三角)의 '삼'(三)은 '세'(서)이고, '각'(角)은 '불'(뿔)로 곧 '서불→서울'이 된다.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의 삼각산,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의 삼각산 등 여러 곳에 산이 삼각형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말의 '셔불', '세부리'를 한자로 뜻빌림(意譯)한 것 뿐이다. 그것은 옛날 그 지역이 부족국가의 군장(君長)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울'(셔불, 세부리)은 그 지역의 '수부'(으뜸도시)라는 뜻이다.

 

특히 신라의 17관등급 가운데 첫번째 품계인 '각간'(角干)을 '셔블한'(敍弗邯)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각=셔블'과 '간=한'의 대등관계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삼각산'에서 '삼=셔(서)'와 '각=셔(서)불'에서 '셔'(서)가 다만 중복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북한산=삼각산'에서 뭇사람 사이에 사용해온 산이름은 백제의 도읍 이후 삼각산이었으며 그것은 이 산이 사람들 사이에 '서울산'의 뜻으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서울산'이 있음은 온당한 일이다.

 

                                         -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

 

산행 전 :

명심보감(明心寶鑑) 장자편에 이르기를......

 

貧客不來  門戶俗(빈객불래 문호속) 하고

 

時書無敎  子孫遇(시서무교 자손우) 니라......

 

집 안에 손님이 들지 않으면 집 안이 빈곤하여지고

時 書을 가르치지 않으면 후손이 우둔하여 지니라

 

한산협이 발족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산행에 많은 회원님들이 참여를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어찌해야 하는 우려속에 잠 자리에 든다.

 

산행 글 :

 

한산협 1차 산행에 참석하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리고, 오늘의 산행기는 평소에 제가 좋아하는 글로 대신 하고자 합니다.

 

남의 글을 빌려서 글을 쓴다는 것이 조금은 어리석은 일이기는 하지만 이 번 산행기는 나 자신을 반성 하면서 써 내려가는 글이니 어떤 오해나 종교적인 해석 또는 학술적인 해석이 없기를 바랍니다.

 

 도끼자루를 만들 나무를 찍으러 산에 간 자가 그 길이와 굵기를 어느 정도로 할까 망설인다. 그러나 찍어낼 도끼는 지금 내 손에 있으니 그것을 눈으로 견주어 보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 충서이기 때문이다. 즉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곧 도를 향해 가는 길인 것이다.

군자는 현재 자기가 처한 지위, 사명을 자각하고 그것을 행하는 데 노력하고 그 밖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부귀에 처해 있으면 부귀한 데서 행하고 빈천에 처해 있으면 빈천한 데서 행한다.

그럴 만한 훌륭한 적임자가 자리에 있으면 정치는 잘되어 나가게 되고 적임자가 없어지면 그 정치는 잘못되게 된다. 공자가 한 말. 정치가 잘되고 못됨은 오직 인물의 유무에 달렸다는 말.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상도가 있다.

첫째 자신의 덕을 닦는 것,

둘째 현량한 인을 존중하는 것,


셋째 어버이를 어버이로서 받드는 것,


넷째 대신을 공경하는 것,


다섯째 군신을 자신의 몸처럼 소중히 하는 것,

여섯째 서민을 자식처럼 아끼는 것,


일곱째 모든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우대하는 것,


여덟째 멀리 객지에서 온 다른 나라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


아홉째 제후들을 따르게 만드는 것.


이것을 성취시키는 근본된 도리는 오직 하나, 그것은 인간의 진실이다.

충서(忠恕)는 인(仁)에 달하는 첫걸음이고 사람의 성(性)을 따르는 것이니 도(道)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자기한테 가해 보아서 싫으면 역시 남에게 가하지 말아야 한다. 공자가 한 말. 충서(忠恕)는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忠)이고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쳐 나가는 것이 서(恕)다.


남이 한 번 해서 잘하게 되면 자기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 해서 잘 하게 되면 자기는 천 번을 한다. 어떤 일에서라도 이 방법을 잘해 낸다면 아무리 우매한 자라도 반드시 총명해질 것이고 아무리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굳세어져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밖에 보이지 않는 편벽한 것을 찾고 또 일반 사람들이 행하지 않는 괴이한 짓을 한다. 공자가 한 말. 공자가 한 말. 공자는 이것에 대해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실함은 만물의 처음이요 끝이다. 성실은 만물의 근원이 되고 성실함이 없으면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안방 구석에 있어도 사람이 보아서 부끄러운 태도는 갖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자는 어버이나 선조(先祖)의 뜻을 잘 계승하고 어버이나 선조의 행한 사업을 잘 발전시키는 것이다.

위에 있는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하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무위(無爲)한 중에서도 가장 큰 일을 하고 있다.

은밀한 일일수록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없고, 미세한 일일수록 더 뚜렷하게 세상에 밝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자기 혼자만의 경우에도 조심스럽게 구는 것이다.


의금상경(衣錦尙絅).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다 홑사포 겉옷을 걸친다. 아름다움을 밖에다 나타내지 않는 것이 좋다.


인(仁)의 덕(德)을 지니고 있음으로써 사람이라 할 수가 있다. 만일 인(仁)을 잃게 되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연유는 인(仁)이 있게 때문이고, 또 인(仁)의 도(道)야말로 사람의 도(道)이다.


일이란 미리 준비하면 되어 나가고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폐(廢)하게 된다. 말이 먼저 정해지면 막히지 않는다.

일이 먼저 정해지면 곤란을 보지 않는다. 행하는 것이 먼저 정해지면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도(道)가 먼저 정해지면 궁핍해지지 않는다.


지성(至誠)은 하늘을 움직이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오직 천하의 지극히 성실한 사람만이 남을 교화시킬 수 있게 된다.


정성스럽다, 그 인자함은 깊고 깊다, 그 심오함은 넓고 넓다. 하늘과 같은 지혜와 천덕(天德)을 완전하게 갖춘 자는 이와 같은 것이다.


정치를 하는 근본은 정치를 행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적임자가 자리를 얻어 정치를 하면 정치가 잘되어 나가는 것이 빠르다. 좋은 땅에다 나무를 심으면 빨리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어느 쪽도 중용일 수는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쳐서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을 생각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와 반대로 모든 것이 미치지 못하다.

조금 더 생각해도 좋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한쪽은 과하고 한쪽은 미치지 못한다.

 과부족 어느 쪽도 중용이 아니다.

중용의 도는 군자는 알맞게 행동하고 반대로 소인은 중용과 반대되는 짓을 한다. 군자는 중용을 지킴에 있어서 군자로서 그때 그때 사정이나 주위 환경에 가장 적절히 행동한다.

그러나 소인은 군자와 반대되는 체면이나, 염치 또는 주위 사정에 거리김 없이 본능적인 용구에 따라 제 멋대로 행동 한다.

하여, 중용의 뜻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위대하고 소중하다.

때문에 백성들을 가르치어 중용의 뜻을 따르도록 하여야 될 터인데, 이미 오래 전부터 올바로 교육을 못해서 중용의 길을 제대로 지켜 나가는 이가 거의 없다.

총명한 자는 자기의 지혜만 믿고 약게 행동하기 때문에 중용의 도에 지나치게 된다.

못 난 사람은 행동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중용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먹고 마시지 못하는 이가 없을 터이지만 음식의 참다운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문것처럼.사람이라면 누구나 중용의 도를 떠날 수가 없는 것인데도 그것을 옳바로 이해하고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하여 사람들은 거의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그들을 몰아다가 그물이나 덫에 걸리게 하거나 함정속에 빠뜨린다 하여도 그것을 피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세상사람들은 거의가 다 자기는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중용의 도를 택하여 한 달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청파 윤도균님과   

산001님의 개인사진을 위 글과는 상관이 없으며 산행 후 회식 자리에서 찍은 사진을 회식자리의 기념으로 남기고자 올린 자료 입니다. 회식자리의 유일한 두 컷 입니다.

 

 

산행 후기 :

 

윗 글에 쓰인 중용의 내용으로 대신 할렵니다.

 

혹시라도 건방지게 보이는 글이라도 이해와 용서를 구합니다. 지천명을 앞에두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반성의 기회로 삼고자 함이니 ...................

  

흐르는 음악은 장사익님의 "허허바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