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산악회를 따라 사량도 지리산에 갔다.
07시 40분에 시민회관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삼천포에 도착하니 10시 5분이다.
배가 10시 정각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산악회 대장이 버스 안에서 전화를 걸어
5분 정도 늦으니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배에서 멀어지는 선착장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 마시고 있으니 벌써 다 왔단다.
15분 만에 사량도에 도착했다.
 
사량도는 통영시 서남부 해상에 있는 섬이다.
어사 박문수가 고성군 하일면에 있는 문수암에서 윗섬(上島)과 아랫섬(下島)이
짝짓기 직전의 뱀처럼 생겼다 해서 사량도(蛇梁島)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 섬에 사실 뱀이 많다고 한다.
 
웟섬의 지리산(해발398m)은 원래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산'이란 뜻의
‘지리망산(地異望山)’이었으나 현재는 그냥 지리산이라 부른다.
지리산(398m), 불모산(399m)을 거쳐 옥녀봉(291m)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바위봉우리와 암릉을 번갈아 타는 산행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10시 30분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해발 0 미터부터 300미터까지 가파르게 올라간다.
40분만에 능선에 진입하니 바다가 보인다.
안개가 약간 끼어서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일망무제(一望無際), 탁 트인 시원함 그 자체이다.
 
지리산 정상에 도착하여 후미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한다.
앞쪽의 걸어야 할 산이 보통 바위산이 아니다. 강골(强骨)의 악산(嶽山)이다.
오랜 세월동안 풍우에 시달린 바위산의 위용이 참으로 당당하다.
푸른 바다위에 떠있는 바위섬이 한 폭의 그림이다. 이런 섬과 산이 있었더란 말인가.
 
정상을 넘어 얼마 동안 부드러운 산세가 이어지더니 본격적인 바위구간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구간이라도 우회하지 않고 전진하리라는 초심(初心)을 지켰으나
사량도 지리산, 그 이름이 헛되이 전하지 않는 유격훈련장이었다.
 
기어 올라가 양쪽 절벽의 칼바위를 걷는 구간도 있고
밧줄을 타고 오르내리는 구간은 수없이 많았다.
거의 수직으로 몇 십 미터를 떨어지는 계단도 있었는데 이런 계단은 처음 보았다.
앞에 가는 아줌마들 그 계단을 똑바로 못 내려가고 눈을 감고 뒤로 내려간다.
바로 앞의 아줌마 떨면서 나에게 하는 말이 “아저씨, 앞질러 가지 말고 뒤에 따라와요. 나 무서워.”
거기서 나는 “천천히 가세요”, “이제는 다 왔다.”는 말을 10번도 더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는 불모산, 가마봉을 넘어서 마지막 옥녀봉에 있었다.
수직벽이 10미터 정도 될까, 위에서 밧줄 하나만 내려와 있다.
옥녀봉에는 전설 때문에 철물을 설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우회해야겠다.
밧줄잡고 옥녀봉에 올라가니 팔이 뻐근하다.
내려가는 길에도 역시 수직절벽에 밧줄로 엮인 나무 사다리가 걸려있다.
 
옥녀봉에는 기가 막힌 전설이 있으니,
옛날에 아비와 딸 옥녀 둘이 깊은 산속에서 살았는데
색욕에 눈이 먼 아비가 딸에게 달려들어 욕정을 채우려하자
이를 말리던 딸이 산 위로 소 울음소리를 내며 기어 올라오라고 했다.
짐승이 되어 두 손 두 발로 기어 올라오는 아비를 본 딸은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고
아비는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 후로 이 봉우리를 옥녀봉으로 불렀다고 한다.
 
옥녀봉 이후로도
몇 번의 밧줄과 철제계단을 타고 산을 내려오니 14시 30분, 4시간 산행했다.
화장실에서 세수하면서 거울을 보니 얼굴이 새카맣구나.
올해 여름, 가을 동안 모자도 안 쓰고 자외선 차단제도 안 바른
뻔뻔스런 얼굴로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닌 백운대.
누가 이 얼굴 보고 흰 구름(白雲) 운운한다 하겠는가?
차라리 까마귀의 친구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17시 10분에 배가 나갈 때까지 2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하는데
이리저리 배회해보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할 수 없이 선착장 노상주점에 배낭을 내리고 소주 하나를 시킨다.
땀 흘린 후 빈속에 소주는 마시지 않지만 막걸리가 없으니 어찌하랴. 
바다에 작은 배 한척 떠가는 것을 보며 멍게와 낙지를 불러 같이 소주를 마시니
셋이 곧 하나가 되었다.
 
이윽고 해가 서쪽으로 넘어간다.
해 뜨고 해 지는 것이야 바다에서 자주 보는 터니 새삼스러울 것이야 없지만
이 섬에 다시 오기가 쉬운 것이 아닌지라 일몰사진을 찍는다.
배를 타고 섬을 떠나며 장자(莊子) 첫머리의 우화가 떠올랐다.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곤이 변하여 새가 되면 붕(鵬)이라 부르는데 그 등이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붕이 성난 듯 힘차게 날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을 뒤덮은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의 기운이 움직이면 그 기운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고 한다.
남쪽 바다는 천지(天池)라고 부른다.
  
남해 바다 작은 섬이 곤(鯤)으로 보이고, 높이 400m도 안되는 지리산이 붕(鵬)으로 보이니
나의 상상력 또한 하늘에 닿겠다. 그러나 사량도 지리산은 하늘로 날아갈 듯 힘차더라.
  
당당하여라, 지리산이여!
푸른 바다 딛고 선 옹골찬 네 모습에
나의 마음은 빳빳이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