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16

웰빙 산행이 뭐래요.
 
 

  

 그윽한 국화 향기가 코끝에 스치고 왠지 진한 커피향이 그리워지는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언제부턴가 무슨 기념일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의미 있는 날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올해는 좀더 뜻 깊은 날로 기억하고 싶기에 가기 싫어하는 아내를 구슬려 산으로 간다.

  

 예전에는 함께 땀 흘리면서 명산을 찾아 헤맸지만 갑작스럽게 건강이 좋지 않아 생사의 갈림길을 방황했던 이후, 취미생활 이상으로 즐겼던 산행을 어쩔 수 없이 중단했기에 혼자 산에 갈 때면 항상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병실에 누워 초점 잃은 눈망울로 쳐다볼 때, 그 심정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모든 것이 잘돼 적당한 산행은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활력 있는 산행은 엄두를 못 내기에 가급적이면 산에 가자고 조르지 않는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서 산행을 서두르면 필요한 준비물을 빠짐없이 챙겨줘 미안한 마음 가득안고 산으로 간다.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영화를 감상을 하면서 내일이 10월의 마지막 날이니 함께 산행하자고 했더니 분위기 탓인지 쾌히 승낙해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오늘은 많이 걷지 말고 단풍 구경이나 하고 내려오자면서 점심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동안 입지 않았던 커플 모자와 티셔츠를 모처럼 폼 나게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산행 입구는 많은 산우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웰빙 신드롬인지 요즘 부쩍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좋은 현상이라 생각한다. 주말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한 주간을 건전하고 유익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서 힘들지 않느냐고 몇 차례 뒤돌아보니 미안한지 천천히 올라갈 테니 쉼터에서 기다려달라고 한다. 예전 같으면 서로 경쟁하듯 쏜살같이 줄달음칠 텐데 측은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도 산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 속에 파묻혀 원숙한 산의 포옹력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쉼터에 다다르니 가을의 정취가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산자락에 원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단풍이 절정에 달해, 황홀경에서 헤어날 수 없을 지경이다. 오랜만에 이런 풍취에 젖은 탓인지 말문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애처롭기 그지없다. 앞으로는 가급적이면 혼자 산으로 쏘다니지 않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런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해본다. 
 

 지나친 조급함으로 서두르는 것이 습관화되었는지 산에 다다르면 쉼 없이 오르려는 자세로 시나브로 바꿔져버렸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관습에 젖어 그 괘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며 살아간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이런 반복적인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려고 진력하고 있다. 
 

 살다보면 수많은 문제들이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많은 사람들은 좌절감에 휩싸여 버린다. 그러나 예상하지 않는 곳에서 문제가 터지고 생각지 않는 곳에서 의외의 기회가 생기는 등 삶은 끝임 없이 변한다. 그러므로 어제와 또 다른 오늘은 위기도 될 수 있고 기회가 될 수 있기에 오늘에 충실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달걀을 세울 수 있느냐고 할 때, 위대한 항해사 콜럼버스는 달걀 한쪽 끝을 깨트려서 세웠다. 이처럼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예측한 부분만 대비하면 또 다른 것은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상 궤도에서 슬쩍 벗어나 잠시 여유를 갖는 지혜를 터득하면 예상했던 것보다 의외로 쓸모 있는 것을 얻을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을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소박하지만 정갈스런 음식을 정겹게 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추정(秋情)의 일우(一隅)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답습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계기가 또 다른 산행의 즐거움으로 다가올 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니 왠지 처연해진다. 무성했던 나뭇잎이 본연의 색을 잃고 겨우살이에 대비하는 모습에서 인생의 부침이 느껴진다. 처절한 고독의 뒤안길을 헤매던 방황의 시절, 삶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희망을 잃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원동력은 가족들의 격려와 성원이었음을 다시금 생각게 한다. 


  

  

 우리들이 마시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부부라고 한다. 함께 있을 때에는 진정 상대방이 고맙고 소중한줄 모른 채 그저 무덤덤하게 지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가 버리거나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닥치면 너무나 그립고 아쉬운 사람이 아내요 남편이기에 흔히들 “있을 때 잘해”라고 말한다. 
 

 살아가면서 항상 기분 좋은 나날을 이어 갈수는 없다.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얽히고설킨 것이 부부생활이다. 좋을 때도 있지만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미울 때도 많다. 그러므로 도타운 정을 이어가려면 서로 눈높이를 맞추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는 배려로 상생의 틀을 깨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쉬움을 남기고 줄달음치는 가을의 소리가 들려오는 산길을 걸으면서 가슴에 묻어두었던 많은 얘기꽃을 피우다보니 힘든 줄 모르고 산정에 도달했지만 내리막길은 너무 힘든지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프다. 그동안 어느 것 한 가지도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하고 모지락스럽게 고생만 시켰다는 자책감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손을 꼭 잡아준다. 
 

 가을이 저물어가는 농도에 따라 숲길의 소리가 다르다. 오늘은 바삭거리는 소리가 유별나서 더욱 운치를 자아내므로 환상에 젖게 한다. 이토록 아기자기하고 기분 좋은 길이 어디에 있겠는가. 잠시 짬을 내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가을 내음이 짙게 베어나는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걸어보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삶의 코드가 웰빙이라 할 만큼 그 바람이 거세다. 웰빙을 구현하는 방식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스타일에 알맞게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풍성한 가을에 고달픈 일상을 잠시 접어버리고 삶에 쉼표를 찍는 기분으로 소중한 사람과 함께 산을 오르는 것이 웰빙 산행이 아닐까요.(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