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못 지킨 약속

                       1. 다시 찾은 이름

   해발 340미터, 전남 보성군 오봉산. 높진 않지만 폭포와 바다와 저수지까지 볼거리를 고루 갖춘 산이다. 보성읍을 품에 안은 산들을 지나면 해평 저수지가 나타난다. 저수지 도로 주변, 바람에 날리는 억새가 자유롭다. 뛰어들고 싶을 만큼 물이 맑다. 오봉산 도착, 2002년 11월 15일 10시30분이다.

  그런대로 다듬어 놓은 간이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등산 안내판을 보면서 등산 코스를 논의하는데 차 한대가 오더니 멈춘다. 문이 열리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함께 중년 여성들이 쏟아진다. 안내판 앞으로 몰려와 우리를 에워싸면서도 수다떨기는 그치지 않는다.

  4명, 우리 일행과 숫자가 맞는다는 것 외에는 첫인상이 유쾌하지 않다. 우리는 그녀들의 존재를 짐짓 무시하며 산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녀들이 곧 뒤 따라 온다. 병풍바위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오봉산에 오면 거기로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C가 명스레 대답했다. 냉랭한 반응에 그녀들은 잠시 머쓱해지더니 함께 가자고 한다. 산은 오는 사람 쫓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법이라고 하니까 금새 명랑해진다.

  우리끼리 이야기에 열중하며 걸음을 빨리 했다. 그녀들을 떼어버리고 싶은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잘 따라온다. 그녀들이 아니라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따라오는 것 같다.

  

  용추폭포 계곡 입구가 나온다. 용추폭포는 내려올 때 들르기로 하고 곧장 버선바위로 가는 길을 택했다. 잠시 쉬기로 했다. 자연스레 대화가 이루어진다. K시에서 왔단다. 반갑다. 맨 앞의 여성이 '당혜월'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학술용어 마냥 생소하고 어렵다. 법명(法名)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본명을 묻자, 망설이더니 삼순이라고 한다. 우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그녀는 이름 때문에 속 많이 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법명을 쓴다는 것이다.

  

  "현대는 개성 있는 이름이 튀지요. 수빈이나 다혜처럼 다듬어지고 세련된 이름의 시대는 저물고 있지요. 전에는 촌스럽게 생각했던 이름들이 요즘은 뜬답니다."  C의 말이다.
 
  "정말입니까?  이제 자신 있게 이름을 말해도 되겠네요. 이름을 다시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그녀는 두 손 모아 합장한다. 모두 불자(佛者)라고 한다. 오늘은 보살들과 산행을 하는 인연인가 보다.

  

  산에서 자신을 찾는다는데 이처럼 이름을 찾는 희귀한 경우도 있다. 그녀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맑고 정숙해진다. 조용함과 떠듦의 경계를 벗어난 수양의 경지에 도달한 것일까. 대화 도중 도중에 "관세음보살!"하며 합장한다

  "관세음보살." 당혜월이 또 합장하자 Y가 "여의주를 주옵소서." 합장하며 말을 받는다. "알발타 살발타."  N이  말을 이었다. 웃음바다가 되었다. 딱딱한 분위기가 와르르 무너진다. 그녀들은 우리의 농담에 마음 상하지 않았다. 너그러움, 불교의 특성인 관용 때문일 것이다.

  

  좁은 산길을 통과한다. 아래는 계곡이다. 바위들을 이고 있는 산꼭대기가 보인다. 널찍한 돌들이 온통 산을 뒤덮고 있다.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지피던 시절, 구들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뜨끈뜨끈한 온돌방 아랫목, 등을 대고 누우면 얼마나 뜨뜻한지. 그 시절의 추억이 향수로 다가온다. 길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그 돌들로 석축도 쌓았다.

  

  저 돌들은 초겨울의 냉기를 서러워하며 지나버린 전성기의 꿈을 식히고 있을까. 아니면 다시 한번의 영화를 꿈꾸고 있을까. 사람도 나이가 들면 미래의 희망보다는 과거의 꿈을 먹고 산다는데, 점점 퇴색해 가는 돌들도 그럴까. 앞날의 내 모습을 돌들이 연출해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숙연해진다.
 
   버선바위 아래서 잠시 쉬기로 했다. 버선처럼 휘어져 얻어진 이름이란다. 보는 위치에 따라 두꺼비 같기도 하다. 바위 허리 부근까지 오를 수 있었다. 거기서 먼 곳을 바라본다. 하늘이 푸르다. 남쪽으로 작은 구름 한 점이 흐르다 사라진다. 문득 한시 구절이 떠오른다.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 (死 也 一片浮雲滅)

         생은 어디서 왔으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생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

  

                         2. 알라딘의 램프, 핸드폰을 줍다

 

   단풍이 제법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바위 사이에 뿌리를 내린 구절초를 본다. 몇 송이 꽃을 달고 있다. 뜻밖에도 진달래 서너 송이가 우릴 반긴다. 계절을 놓친 것일까, 아니면 계절을 앞질러 온 것일까. 우릴 기다리느라 차가운 밤 기운을 팽팽한 긴장으로 인내해 온 듯하다. 이제 그 긴장이 풀리면 오늘밤을 견디지 못하고 전부 져버릴 것 같다. 마음도 발걸음도 처연해진다. 병풍바위가 저 건너다. 거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숲길을 헤치고 가다가 핸드폰을 발견했다. 핸드폰 잃어버린 사람 없냐고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른 등산객이 떨어뜨리고 간 모양이다. 배터리가 다 닳아서 꺼져 있다.

  

  학창시절 소풍, 보물찾기에서 변변한 보물 하나 찾지 못했는데, 알라딘의 낡은 램프가 연상되는 구형 핸드폰을 줍다니 행운의 징조일지도 모르겠다. 핸드폰 뒤켠에 작은 글씨로 번호를 적은 종이가 스카치 테입으로 붙여 있다. 임자가 어떤 사람일까. 

  오봉산 정상, 병풍바위에서 점심을 먹는다. 가져온 밥과 반찬을 모두 합하니 진수성찬이다. 밥맛이 보통이 아니다. 땀을 식혀주는 바람도 맛있다.  보살들이 커피를 준비해 왔다. 산에서 마시는 커피 맛이 일품이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말이 맞나보다. 비로소 득량만(得糧灣)의 아름다움이 한껏 눈에 들어온다. 섬들이 다채롭다. 찡한 감동의 여운을 안겨주는 전설을 지닌 섬도 하나쯤 있을 법하다. 섬들은 공간적 고립을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는다. 머문 곳에서 자신을 어루만지며 자유로울 줄 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파도 한 점 없는 바다. 하늘도 바다도 푸를 대로 푸르다. 고기잡이 배가 한가롭다.

 

  오봉산 자락 따라 율포(律浦) 부근의 보리밭이 파랗다. 한 폭의 그림이다. 이른 봄 같은 정취가 단풍바람에 실려온다. 해안선을 따라 아스라이 평화가 펼쳐진다. 날아가 그 속에 적셔들고 싶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취하듯 득량만의 아름다움에 맘껏 취한다. 문득 나만이 찾아가는 바닷가, 나만을 기다려주는 바닷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정서를 시로 나타내 본다.


       -어느 바닷가-

 

     모래랑 바위랑 보듬고
     몇 그루 해송 키워 그늘 만들며
     나만을 생각하는 바닷가가 있다
     나 혼자 찾아가는 바닷가가 있다

     내가 지치면
     갈매기 날려 희망 보여주고
     내가 슬프면
     파도 일으켜 같이 울어주고
     연한 안개로 다정하게 감싸주는 
     나만을 기다리는 바닷가가 있다
     나 혼자 찾아가는 바닷가가 있다

     

                     3. 아주 오랜 여인과의 통화

 

  하산 준비를 하는데 느닷없이 N이 핸드폰 주인에게 전화를 걸자고 한다. 건네 주자 자기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 모양이다.

 

  "나왔어! 빨리 받아요." 재빨리 핸드폰을 내게 넘겨준다. 엉겁결에 받았다.
  "여보세요, 윤OO인데예." 경상도 여성이다. 순간 어떤 예감에 숨이 막힌다. 영국 낭만주의 시인 키츠(Keats)의 시를 좋아하고 키츠를 생각하면 키스가 연상된다던 그녀와 이름이 같다. 보성군 오봉산인데, 핸드폰을 주웠다니까 몇 년 전 가을에 여기서 잃어버렸다고 한다. 핸드폰을 어떻게 할까 묻자 그냥 폐기해 달라고 한다.

 

  "저, 혹시 부산이 고향 아닙니까? 간호사셨구요. 시인 키츠를 좋아하고, 키츠를 생각하면 어떤 단어가 연상되고…" 조심스레 물었다.
  "예? 우예 아십니꺼? 혹시 센님은" 그녀임이 분명하다.
   "맞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군요!"
   "은인을 만나게 해주다니! 잃어버린 핸드폰이 타임 머신이 됐네예. 지 이름 아직도 기억하십니꺼?. 지도 이름 안 잊고 있지예." 놀람과 반가움이 엉긴 목소리다.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통화를 마쳤다. 

 

  "옛날 애인이지요? 인생은 연극과 같다더니, 이 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 있을까요?"
   대뜸 애인으로 단정하는 N의 말에 모두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4. 아직도 못 지킨 약속

 

   산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녀에 대한 아주 오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아주 먼 여름, 남해 상주 해수욕장. 친구들과 석양 무렵 도착해서 해변 텐트촌 갓 쪽에 자리 잡았다. 벽걸이 손전등이 밝혀주는 텐트 안엔 파도 소리가 가득 찼다. 그래서일까. 우린 잠들고 있지 않았다.

 

  밤 1시쯤, 텐트촌 반대 쪽에서 "이 손 노이소!" 강하게 저항하는 경상도 여자의 목소리가 깊은 밤 정적을 깨고 날카롭게 들렸다. 신경이 곤두섰다. 잠시 후, 우리 텐트 앞에서 "사람 좀 살려 주이소!" 다급한 소리가 울렸다.

 

  텐트 입구에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뛰쳐나갔다. 거대한 몸집의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맨 먼저 나간 게 후회되었다.

 

   "무슨 일이지요?" 나는 은 목소리를 내려고 일부러 배에 힘을 주며 물었다.
   "우린 가까운 사이니, 남 일에 참견 마이소." 남자의 목소리는 훨씬 더 굵었다. 거짓말이니 제발 도와달라고 여자가 애원했다. 싸우지 않고 물리칠 수 있는 꼼수를 쓰기로 했다.
   "형씨, 보아하니 이곳 터주대감 같은데, 이 여자를 보호했다는 이유로 형씨 패들에게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여자를 도와야겠소. 아마 형씨가 우리였더라도 똑 같은 결정을 했을 거요." 단호하게 말했다.
  
  "허허, 참견 말래두 그러네. 당신들 오늘 밤 계속 여기 있을 낀가?" 주먹들이 사용하는 협박투다.
   "그렇소. 남해 보안대장 김병용 씨가 친한 선배님인데 내일 함께 해수욕할 거요."하고 둘러댔다. 효과가 있었는지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형씨, 내일 보안대장 선배님과 술 한 잔 같이 합시다. 알고 지내면 도움도 될 겁니다." 나는 악수의 손을 내밀었다. 거절하면 선제 공격을 해야한다. 다행히 그는 뭐라 얼버무리더니 악수를 받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무섭다면서 숙소까지 데려다 달라고 나를 지목했다. 혹시 그 남자가 뒤따라와 해코지하지 않을까 은근히 겁이 났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앞장서고 있었다. 즐비한 텐트 사이를 빠져나와 모래밭을 걸었다. 간이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한 상점만 불이 켜져있다. 상점 앞 비치 파라솔 아래 테이블에서 중년의 두 남자가 술잔을 건네며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감사의 뜻으로 맥주를 사고 싶다면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맥주 한 병과 간단한 안주가 나왔다. 우리는 간간이 맥주 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자신을 햇병아리 간호원이라고 했다. 첫 휴가를 얻어 선배 언니들과 해수욕 왔는데 민박을 한단다.

  언니들은 모두 디스코장에 가고, 혼자 남아 있다가 해변 모래밭을 거닐려고 나왔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단다. 나더러 은인이라고 했다. 주먹 한 번 날리지 않고도 뜻하지 않게 은인이 된 셈이어서 쑥스러웠다.

 

  그녀는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서량도 대단했다. 나는 신춘문예 소설에 응모했다가 실패한 일과 썼던 단편소설과 구상 중인 작품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3년 안에 당선하되 그 이후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당선하면 그 해 1월 3일 오후 3시 P시  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바닷물과 모래가 만나는 경계선을 거닐자고 했다. 아주 자연스레 손을 잡아왔다. 그녀는 키츠의 시를 좋아한다면서 몇 편 암송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키츠의 시를 읽지 못했다.

 

  그녀는 어깨를 기대면서 키츠를 생각하면 키스라는 단어가 연상된다고 했다. 그녀도 나도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도덕률 탓일까, 아니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소심증에서일까? 키스를 생각하면 B형 간염이 연상된다고 말해버렸다. B형 간염이 사회적 이슈가 된 때였다. 입술 접촉이나 술잔을 통해서도 전염된다고 했다.

 

  그녀는 곧바로 내 마음을 읽었는지, 숙소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민박집 사립문 앞에서 나를 가볍게 포옹하더니 오전에 함께 해수욕을 하자고 했다.

 

  텐트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갑작이 밖이 소란스러워 눈을 떴다. 새벽부터 억수로 비가 쏟아져 모두 텐트를 걷은 뒤였다. 가까운 상주중학교로 대피한 것이다. 우리 텐트만 남았다. 공수부대 출신 친구의 솜씨 때문이다.

 

  라디오 일기예보에서는 종일 비가 내린다고 했다. 논의 끝에 12시 버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민박집에서 그녀와 함께 놀다 저녁 무렵에 갈 걸, 후회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나는 심장병이 있고 키츠의 시를 좋아한다는 그녀와의 약속을 아직도 못 지지키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키지 못한 소중한 약속이 하나 둘이 아니다.
  바닷가에서 그녀가 내게 들려주었던 자작시 '첫눈 내리는 날'을 되살리면서 이야기를 마쳤다.


        -첫눈 내리는 날-

    첫눈 내리는 날
    아주 오랜
    잠든 추억 하나 깨워 옷을 입힌다
    아니,
    오랜 추억 하나
    내 기억 속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걸어 나온다
    옷 위로 목도리처럼 눈이 얹힌다.

 

  "그녀의 시가 예언이 되었군요. 오늘 아주 오랜 추억이 옷을 입고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왔으니…" N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다. "관세음보살!" 당혜월이 합장한다. 이번에는 '여의주를 주옵소서, 알발타 살발타'의 말대꾸가 나오지 않았다.

 

  주차장이 가까워진다. 등뒤로 오봉산 봉우리가 멀다. 벌써 석양 기운이 감돈다.하늘이 연한 어두움을 조금씩 토해내고 있다. 산 속의 하루는 짧다. 인연이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