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0일. 가야산으로 


 

 날씨가 더 더워지기 전에 삼보 사찰 중의 하나인 해인사를 안고 있는 가야산을 오르기로 했다. 가야산은 상봉을 중심으로 두리봉, 남산, 비계산, 북두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가야산 남쪽 계곡에서 발원한 홍류동 계곡은, 계절 따라 다른 경관을 연출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천년 노송과 어우러진 무릉교에서 학사대까지 십여 리에 걸쳐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밖에도 홍필암, 음풍뢰, 광풍뢰, 제월담, 낙화담, 첩석대 등 수 많은 유서 깊은 곳이 있어 대가람과 함께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곳이다.


 

 아침 6시에 출발한 버스는 어느새 중부고속도를 거쳐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들어섰다. 시원한 아침 공기 따라 차창으로 비친 바깥은, 완연 여름으로 바뀐 산과 들로 한 폭의 풍경화를 펼쳐놓은 것 같다. 어느덧 여름이 바싹 다가선 줄도 몰랐던, 일상이 어느 새 그림 속으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세월이 내닫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여름 속을 우릴 실은 차가 달음박질 하나보다.


 

   오월이라 중하(仲夏)되니   망종(亡種) 하지(夏至) 절기로다

    남풍은 때 맞추어  맥추(麥秋)를 재촉하니

    보리밭 누른빛이  밤사이 나겠구나

    문 앞에 터를 닦고  타맥장(打麥場) 하로리라

    드는 맛 베어다가   단단이 헤쳐놓고

    도리깨 마주 서서  짓내어 두드리니

    불고 쓴 듯하던 집안  졸연히 흥성(興盛)하다

                                                -농가월령가-


 

 누렇게 익어가는 보릿가을 이른 시간인데, 들녘 여기저기에선 일손들의 분주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 같으면 한창 보릿고갤 넘느라 숨이 찼을 텐데... 채 익지도 않은 보리, 밀 잘라다 그 어려운 고빌 어찌 넘겼을까. 너무나도 살기 좋아진 오늘이, 그때 그 시절을 기억이나 할는지. “분식하라, 도시락 열어보자”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덕유산 휴게소에 잠시 들러 기지갤 펴본다. 다들 잠을 설쳐, 얼굴엔 졸음기가 덕지덕지 매달렸다. 매천 선생은, 이것저것 챙기느라 정신없이 돌아치면서도 피곤한 기색은 보이질 않는다. “철인(?)인 개비유” 어느 부회장이 툭 던진 한 마디다. 아침 요기로 휴게소엘 다녀온 산우들을 인솔 다시 가야산으로...


 

 오전 10시 경 성주로 들어선다. 이 고을이 참외로 이름난 곳이라지 아마. 푸른 줄이 선명하게 그어진 개구리참외, 그 속이 왜 그리 빨갛던지, 그저 침만 꼴깍꼴깍 삼키면서 참외가게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유년의 시절이 잠간 오버랩 된다. 그날 밤,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또래 서넛이 얼굴에 숯검정을 바른 채 원두막으로 갔다. 어슴프레한 달빛이 별스럽게도 밝게 느껴져 가슴은 방망이질 치고... 결국 잡혀서 경을 치렀던, 그 어릴 적 보리 몇 됫박이면 입이 호사를 하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 돌아보면   서리하면서 마음 조리던 일도, 아련한 추억으로, 애틋한 향수로 떠오른다.


 

 30분 쯤 지나 백운동 매표소에 도착, 산행 준비를 하고 곧장 선두는 앞서기 시작한다. 역시 노익장을 과시하던 김 고문이 저만치 앞장서 선도하고 있다. 조금 올라가니 이정표가 눈에 띈다. 오른 쪽으론 동성재-암릉-칠불봉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이 대피소-산성-철계단-상왕봉 코스다. 놓인 표지를 보니, 역시 왼쪽으로 길을 잡은 것 같아 안심이 된다. 한참을 오르고 내리면서 가파른 오름길에선 숨이 턱에 닿을 듯했다. 무리한 듯해 잠깐잠깐 선 채로 쉬면서 오르기로 하고, 부채질 하며 앞서가는 매천 선생 뒤만 따라 붙을 수 밖에... 숲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 외려 더 뜨거운 것 같다. 엄청 더운 날씨다.


 

 서성재를 오르는데 2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고개 마루에 서니 막혔던 가슴이 조금은 트여진다. 남쪽으로 해인사가 내려다보이고 되돌아 백운동 쪽을 보니 아스라히 아래로 보인다. 거기서 부턴 고행이 시작 되는 것 같다. 가도 가도 돌무더기길이다. 계곡 따라 별 전망도 없는 너덜길을 조릿대(난장이대나무)숲을 벗 삼아 치고 오르니 돌무더기가 쉬어가라며 발목을 붙잡는다. 그냥 돌서들인 줄 알았더니 그게 산성터란다. 내려오는 등산객들은 다 왔으니 조금만 더 가란다. 그런 줄 믿고, 이제 고비를 넘겼으려니 해서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돌서들을 넘고 계단이란 계단은 다 넘고 올라도 끝이 안 뵌다. “얼마나 남았지요” 묻는 말에 만나는 사람마다 “다 왔심더, 쪼깨 더 가이소”다. “제에엔장” 점잖은 체면에 그러고 말았다.


 

 이제 정상이 얼마 남진 않은 것 같아 잠시 주위 암벽의 절경에 도취된다. 지나온 길 바라보니, 어찌 왔을꼬. 기특하다. 나아갈 길 바라보니, 더 못가겠다고 고개는 뒤로 “열중쉬어” 자세로 버틸 태세다.  갈 길이 바쁘니 땅만 보고 또 오른다. 도중 혈압이 높아 오르기 힘들단 산우 한 사람을 내려보냈다. 지금 심정 같아선 나도 그만 중도 하차할 걸... 후회 막급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말했던 성철 스님이 저 아래 해인사로 출가하면서,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빨간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彌天大業紅爐雪)

         바다를 덮을 만한 큰 기틀이라도

         뜨거운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레.

            (跨海雄基赫日露)


 

   세상 일이 다 무상하다는데 요까짓 걸 고행이라고 입을 더럽힌단 말인가. 배도 출출한데 점심이나 하자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등로를 비켜 자릴 잡고 도시락을 폈다. 정상이 바로 앞이라 하고, 다리마저 천근의 무게로, 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곁들여 이슬 한 방울씩 하니 비로소, 여기도 극락이라. 시계를 보니 두 시를 넘었다. 허기도 떼웠고 땀도 식혔으니 다시 가잔다. 식사 후 등산이 얼마나 어려운데 너무 생각이 짧았다는 걸 후회했으나 어쩌랴 오를 수밖에...

 

 철계단을 올려다보니 오금이 저려온다. 저길 어떻게 오른단 말인가. 앞이 캄캄했다. 몇 번을 쉬어가며 오르니, 바로 코앞이 정상이다. 온통 바위 덩어리가 아닌가. 마치 채석장 밑에 선 것 같았다. 소머리 모양으로 생겨 우두봉(1,430m)이라 불리는 정상, 맞은편에 칠불봉(1,433m)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지 않는가. 조금 더 높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일행 중 한 명이 우두봉으로 오르는 걸 보면서 매천 선생과 난 아래서 돌부처가 되어버렸다. 도대체 엄두가 나질 않아서였다. 강권에 못 이겨 정상 표석 아래 서니 그야말로 통쾌하다. 오를 때의 신고와 간난이 눈녹듯 사라져 버린다. 가야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한 폭의 산수화로 감탄을 자아낸다.


 

 벌써 3시가 지났다. 언제나 산이란 오른 만큼 내려가야 하는 법, 마당바위를 지나 마애불을 버려두고 토심골로 내려서니 길자란 산죽 사이로 건너고 돌면서 내리는 길이 꽤나 지루했다. 족히 수백 년은 자란, 우람한 나무들을 보면서 도대체 나무들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인간도 저 나무들처럼 오랜 수명을 누린다면 저렇게 청청할 수 있을까. 서로 다툼하지 않고, 분을 지키며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큰 나문 큰 나무로 작은 나무는 작은 대로, 풀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숲을 이룬 모습에서 과연 우린 무었을 깨달아야 하는가.

 

 4시 좀 지나 해인사 일주문 앞에 다달았다. 가람 옆으론 옥류천이 맑은  소릴 내며 굽이쳐 돌아 나간다. 가을이면 홍류천이라 한다지 아마. 헌데 지금은 그저 파랗다. 녹음에 물들어선가. 시간이 촉박해 해인사 경내를 바라보기만 하고 길을 재촉하다, 갈증이 발걸음을 잡아 세운다. 늘어선 가게에서 캔맥주 몇 개 달래서 다리에 기대선 채 원샷, 물병이 빈 지 한참이나 되어 목이 탔었다. 시설지구에 기념관도 들리지 못하고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직행, 5시에 버스에 올랐다. 이제 어둠을 가르며 서울로 갈 것이다. 편히 몸을 누일 집을 향해서...


 

                                                                            -목   어     백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