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꿈


* 일 시 : 2006. 8. 5 - 6
* 산 행 : 백무동 - 한신계곡 - 세석평전(1박) - 촛대봉 - 대성골 - 의신

<백무동>
유난히 길었던 장마의 꼬리를 물고 폭염은 기습처럼 찾아와 떠날 기미가 없다. 오늘도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가 배낭을 멘 어깨 위를 뜨겁게 달군다. 3일 전, 지리산을 함께 가고 싶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었고, 오늘 그와 함께 백무동 들머리로 들어선다.

함양에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술안주거리를 비빔밥을 시킨 한 식당에서 구한다. 고기를 썰어주던 할머니가 덤으로 한 움큼을 더 보태 건네준다. 아직도 메마르지 않은 후덕한 인심에 덩달아 마음이 푸근해진다.

말없이 뒤따르는 친구에게 말을 건넨다. “옛날 무당들이 많이 찾던 곳이라서 백무동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지.” 말수가 적은 친구는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


<한신계곡>
피서 나온 나들이객들이 뜸해지면서 계곡은 지리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계곡을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 짙은 녹색으로 우거진 골짜기, 이끼 낀 나무등걸, 그리고 잉크처럼 번지는 숲의 향과 지리의 너그러움, 모두가 기다렸던 그리움들이다.

갑자기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몰린다. “비가 오려나? 오후에 한 두 차례 소나기 소식이 있던데, 밤에나 오지 말았으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드득거리며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한바탕 쏟아 부을 모양이다. 발길을 멈추고 배낭에 카바를 씌우고 우의를 꺼내 입는다. 그러나 비는 바닥을 적실정도만 내리더니 금세 그치고 요란한 천둥소리만 남아 계속 겁을 준다.

가내소를 지나며 길옆 안내판에 적힌 전설을 읽는다. 옛날 수행을 하던 한 도인이 이곳에서 마지막 수행으로 가내소 양쪽에 밧줄을 묶고 눈을 가린 채 건너다가 지리산 마고할매 셋째 딸인 지리산녀의 유혹에 넘어가 그만 물에 빠져 도를 그르치고 한탄하며 “나는 이제 그만 가네.”하고 떠났다고 해서 가내소라 불리었단다. 지리의 곳곳에 얽힌 수많은 전설들, 왜? 모두가 하나같이 애잔한 사연들만 안고 있는 것일까?

방학기간이라서 아이들과 함께 산행을 하고 하산하는 가족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꼬마 녀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붉게 상기된 얼굴, 깡쭝거리는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에서 지리의 밝은 내일을 본다. “와, 대단한데, 파이팅!” 으쓱해진 녀석들이 목청을 길게 뽑아 힘찬 인사를 남기고 사라져간다.

계곡이 끝나면 악명 높은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약 1km 구간은 헉헉대며 올라야한다. 무더운 날씨 덕에 온 몸은 금세 땀으로 흠씬 젖는다. 계곡의 맑은 물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던 친구도 이젠 말이 없다. 자꾸만 현 위치의 고도를 물어온다. 산행경력이 일천한 그로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의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물을 자주 마시게 하고 휴식시간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 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다.

 


 
(한신계곡)


<세석평전>
해가 서산으로 몸을 숨기고 어둠이 살포시 깃들기 시작할 무렵, 우린 세석의 능선에 발을 올려놓는다. 산장엔 많은 사람들이 먼저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다. 웅성거리는 생활의 소음이 이곳에선 반갑게 들린다. 야영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배낭을 푼다. 오늘 하룻밤 노곤한 몸을 편히 쉬울 자리다.

코펠을 꺼내고 버너에 불을 붙여 고기를 굽는다. 주섬주섬 꺼내 놓은 먹을거리가 두 사람 한 끼 주안상으로 손색이 없다. 헤드램프 불빛에 어른거리는 술잔을 들어 축배를 든다. 맑은 계곡물을 예찬하던 친구의 말이 이제는 산정(山頂)의 운치로 바뀐다. 난생처음 지리산을 오른 그의 가슴에 어찌 희열의 물결이 일지 않겠는가.

깊어 가는 밤, 자리에 누워 하늘을 본다. 그동안 심술을 부리던 구름은 어디로 모두 사라졌는지 티끌하나 없는 창공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인다. 별들의 강, 은하수를 바라본다. 얼마나 많은 별들이 모여 저토록 무한한 강을 이루었단 말인가. 어렸을 적 고향의 여름밤이 떠오른다. 수제비를 빚어 저녁을 먹고 멍석위에 누워 바라보던 찬란한 밤하늘,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물때마다 소원을 빌던 때 묻지 않은 동심은 이제 어디서 다시 찾는단 말인가.


 

잔돌배기 밤하늘에
은하별이 쏟아지면
텐트에 개스등
불을 밝혀서
잊혀지는 산 이야기
아쉬워하며
은하수 기울도록
끝이 없는데
백무동 길목에서
헤어진 산친구
아쉬움과 그리움에
정을 더하여
님과의 산행길을
생각하다가
용담꽃 피는 밤을
나는 지샜다


 

   (권경업의 세석평전) 

 

 

<촛대봉>
어둠이 한창인 새벽부터 세석고원은 길을 떠나는 산객들로 다시 활기를 찾는다. 이슬이 흠씬 내린 비박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상큼한 고원의 맑은 공기가 폐부를 통해 온몸으로 번진다. 몸만 빠져나온 잠자리를 그대로 두고 우린 촛대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아직은 어두운 산 그림자를 옆에 두고 먼 산으로부터 서서히 밝음이 번져오고 있다.

촛대봉 정상에 이른다. 먼저 올라온 사람들이 해맞이를 기다리며 동녘을 응시하고 있다. 하늘엔 구름한점 없이 맑은 날씨지만 먼 능선위로는 엷은 구름 띠가 길게 드리워져있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건 어떤 설렘을 의미한다. 매일 뜨는 해이지만 이런 산정에서 맞이하는 해는 남다른 감회가 있다. 점점 선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루의 시작을 건너편 천왕봉도 초연한 기다림의 침묵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실, 해가 돋는 장면보다 돋기 전의 여명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건 왜일까.


 

 
(촛대봉 일출) 

 

해가 솟은 후에도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서성인다. 늘 그러하듯 조망이 시원하게 터진 이런 곳에 오르면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욕심 때문에 선뜻 돌아서지를 못한다. 천왕봉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장터목 능선에 눈길을 준 다음에야 뒤돌아 반야봉을 바라보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등산로 양 옆으로 들꽃들이 반긴다. 붉은 꽃잎의 동자꽃은 둥근 얼굴을 활짝 폈고, 모싯대는 보랏빛 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었다. 카메라를 코앞까지 들이대고 아름다운 그들의 자태를 몰래 훔친다. 산을 다니며 들꽃을 볼 수 있는 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예쁜 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신비에 경이로움과 고마움을 느낀다.

 

자리로 되돌아와 시에라 컵에 물을 끓여 커피를 만든다. 구수하고 그윽한 커피향이 안개처럼 주위에 번진다. 둘이 마주앉아 하나의 잔으로 번갈아 커피를 마시며 어젯밤의 낭만을 이야기한다. 몇 순배의 곡주에 얼큰해져 한없이 바라보던 별밤과 세석평전을 비추던 달빛과 산행의 꽃이라는 야영의 운치에 취해 밤이 이슥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친구의 말에 색다른 체험으로 인한 들뜸이 숨어있다. 


<하산>
어느새 해가 촛대봉위로 고개를 내민다. 이제 내려갈 준비를 서둘러야할 시각이다. 주섬주섬 흐트러졌던 도구들을 챙겨 다시 배낭을 꾸린다. 언제 다시 찾을는지 기약 없는 떠남이지만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기에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주변을 둘러본다. 언제 봐도 늘 편안한 세석평전의 여유로움, 아침햇살에 곱게 물든 산장, 하룻밤 우리들의 정담을 묻은 곳, 이 모든 것들이 이젠 아름다운 여름밤의 꿈이 되어 길게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대성골을 향해 몸을 돌린다. 

 

                        
  
                                                                        
(모싯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