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내 탓이오.

 

-언제: 2005. 6. 24.

-누구와: 일출님. 천운님. 백야님. L님. 나.

-어디를: 중산리- 천왕봉- 세석- 벽소령- 의신.

 

 

 

 

 <천왕에서 해돋이를>

 

지리산 당일 종주를 하게 된 동기는 일출님의 제안이었다. 5월초로 산행 일을 잡았지만 시간적인 타이밍이 맞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맨 처음 계획된 인원은 L님을 제외한 4명 이었지만 최근에야 그는 우리와 합류하게 되었고 직장동료인 우리는 3~4일간 서로의 준비를 하고 하는 과정에서 중산리에서 1박 후 새벽에 산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럴 즈음에 마침 모 산악회에서 지리산 당일 종주코스가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하였다. 경비는 물론 이거니와 시간적으로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박종주에 들어섰던 것이다.

 

-떠나면서.

23일 근무를 마치고 일찍 퇴근하여 이루지 못할 수면을 생각해서 저녁 먹고 난 후 잠자리에 들어본다. 곰도 멍석을 깔아주면 재주를 부리지 못하듯이 막상 취침을 하려고 하니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그냥 눈만 감고 있다가

23:00에 일어납니다. 2개의 도시락과 약간의 과일을 준비하니 배낭의 부피가 커 집니다. 00:00시에 출발한 버스에는 의외로 인원은 많지 않았다.

우리를 포함한 15명이 전부였으니까. 3시부터 산행 할 수 있다는 산악대장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문제는 과연 그 시간에 출발하여 천왕의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앞선다.

 

 

 

 

 <천왕에서 초암능과 두류능선을 바라보며>

 

어차피 3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고 알고 있는 우리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중간의 휴게소에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중산리 주차장에 새벽 2시 40분에 도착 하였다. 컴컴한 아스팔트의 길을 올라서는 우리는 의외로 힘든 산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본다. 이미 나에게는 산악대장께서 무전기를 쥐어주고 앞에서 리더를 하였으며 하는 모양이니. 여간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매표소에는 이른 새벽인데도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입장하는데 의외로 제지 없이 쉽게 입장하고 만다. 분명 어느 산행 기에서 봤듯이 일출 일몰 2시간 전 후로 산행을 할 수 없다고 제약하는 사이 서로 실랑이를 주고 받았다는 내용을 봤는데 아무튼 다행 이었고 좀 더 일찍 출발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워하면서 오늘의 산행이 시작됩니다.

 

 

 

 

 

 

-02:50 산행 시작.

보름이 지난 3일 뒤인 음력 18일 만개한 보름달은 아니지만 유난히도 맑은 파란 하늘에 창연히 떠도는 둥근 달은 우리들의 헤드랜턴을 무색 캐 할 만큼 밝게 비춰주고 있으며 간간히 불어주는 산들바람은 마침 가을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쉴 줄 모르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는 어둠을 가르며 흘러 청래계곡의 물과 합류하여 덕천으로 부지런히 빠지겠지……

 

 

 

 

 

 

 <일출님사진: 개선문에서 해돋이 모습>

 

우리 일행 5명은 15명의 그룹 속에 선두를 유지 해가며 산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끔씩 뒤 사람을 챙겨야 하는 자신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지만……

산행 후 10여분이 지나고 나니 일자대열이 군데군데 이빨 빠진 모양의 형상이다. 칼바위 근처에서 우리 일행인 백야님을 기다리기로 하고 마지막 주자까지 확인하고서 서서히 고도를 높이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산행으로 천왕 일출을 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15명의 그룹 중 7~8명은 벌써 우리를 앞질러가며 시야에 불빛마저 감춰져 있었고 우리 일행은 자꾸만 뒤처지기만 하는데…… 가장 염려를 했던 L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합니다. 자기 페이스 데로 산행 해줄 것은 당부 드리며 서로를 격려합니다만, 그러던 중 천운님께서 제안을 해 온다. 어차피 5명이 이런 식의 산행은 안되니 자기가 함께할 테니 천왕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와 일출님을 몰아붙입니다.

 

 

 

 

 <해돋이 후 사람들은 천왕을 떠나는데>

 

아쉽지만 일단 천왕에서 만나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고도를 높인다.

망바위에서 3~4명을 추월하고 또 다시 산장아래 샘터에서 마지막 선두주자를 따돌리고 힘찬 걸음을 내 올립니다. 이제부터 어둠 속의 그림자와 함께하며 홀로 독백을 씹어야 합니다. 법계사의 달빛이 너무도 고고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디카를 꺼내 들지만 이내 성이 차지 않은 작품에 그냥 지우고 맙니다. 오히려 디카에 신경 쓰지 않으니 산행속도를 더욱더 빨라질 수밖에……

 

         

 

 

 <개선문 이정표와 청왕을 오르면서 우측 써래봉 능선을 바라보며>

 

-개선문에서.

4시30분인데 벌써 개선문의 우측 써래봉의 검은 물체가 확연히 드러나고 그 뒤로 뻗어 내리는 여명의 새벽 줄기가 파란 도화지 위의 검정과 빨강의 색조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 어찌 표현 하리오. 정녕 부지런자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왠지 가슴이 뭉클 해 집니다. 일출시간이 5시10분으로 알고 있는데 벌써 주위를 벌겋게 달구고 있으니……

 

 

 

 

 <일출 직전 주위의 모습>

 

행여 일출을 놓칠까 노심초사하며 발길을 재촉 합니다.

천왕샘의 물맛을 보고 싶었으나 주위의 이끼 낀 모습으로 내키지 않아 그냥 지나칩니다. 천왕쪽에서 웅성거림이 시작되고 마지막 너덜 길을 향해 빡센 오름이 시작됩니다. 정확히 2시간 만에 천왕에 도착한 나는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 천왕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주로 젊은 대학생들이 장터목에서 올라왔던 모양이다. 주위의 웅성거림과 적당한 위치도 찾기 어려워 맞은편 암 봉으로 다가갔다.

 

 

 

 

 

 

 <해오름의 기다림 속에서>

 

가깝게는 써래봉과 웅석봉이 조망되는 저 뒤편 동해안에서 솟아나는 빨간 불덩이는 순식간에 지구를 달구듯 용광로의 불빛 보다 더 밝은 솟음이 시작 될 때 우리 모두는 탄성을 울려댄다. 정말 뭐라고 말로 표현 하기 어려울 만큼 장엄하며 아름답다.

 

 

 

 

 

 

 <해 오름의 기다림>

 

-기다림.

일순간의 함성이 울리더니 그들 모습 표현이 다채롭다. 조용히 기도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박수치고 함성을 질러대는 사람들. 사진 찍기에 바쁜 사람들. 두 손을 합장하고 큰절 올리는 사람들……이제 그 많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나 홀로 천왕에 덩그러니 서 있다. 갈 길 몰라 주체 못하는 자신의 마음 속에 한없는 갈등과 후회가 범벅이 되고 있다. 후미의 산행대장도 조금 전에 도착하여 이제 떠났고 마지막 남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쓸쓸함이 몰아친다.

일출님이 나타난 기쁨도 잠시 후 걱정으로 앞서고 행여 올까 기다리기를 1시간이 넘게 기다렸지만 그들은 시야에 들어 오지 않는다. 오늘 산행은 아마도 여기서 접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을 해 본다. 백야님과 천운님은 몇 번 함께한 산행으로 그들을 알고 있었지만 L님은 평소에 뒷산에서 체력관리를 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천왕주변과 사람들>

 

내가 천왕에 올라 온지 1시간 40분 뒤에야 그들과 합류하였다. L님의 일그러진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였고 몹시 지쳐 있었다. 잠시 마음을 안정 시키고 아침을 해결하는 사이 마음 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하였다. 본인은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우리 먼저 계속 종주를 떠나라 하지만……서서히 옮겨지는 그의 발걸음을 뒤에서 지켜보며 천왕의 문을 나선다.

 

 

 

 

 <장엄한 지리의 산 그리메>

 

길을 가면서 수 많은 갈등과 생각들이 혼재 되어 어떻게 해야 될까 하는 사이 내가 먼저 말을 건 낸다. 우리 모두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나와 L님은 세석에서 거림으로 빠질 테니 너희들 3명은 끝까지 완주 하기를 바란다 하였지만 그들 역시도 거부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함께 하기로 하였으니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저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래 가는데 까지 가 보자 그리고 함께 빠지자고……

 

 

 <함께한 일행들:좌 천운님.L님.백야님.일출님>

 

         

 

         

 

 

 <14년전 천왕에서 필자의 모습과 일행들>

 

-내려 오면서.

이제야 말문이 트이는지 14년 만에 천왕을 다시 밟았다는 L님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것도 필자인 나와 함께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랬다. 그랬다 몇 년 전인가 정확한 기억은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떠오른 그날의 기억들이 새롭게 투영되고 있었다. L님은 벅차 오르는 감동을 억제할 수 없었는지 여기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큰 행운이라며 천왕의 정상석을 어루 만지고 있었고. 백야님은 생전 처음 천왕을 밟아봤다고 오늘의 흔적을 영원히 남기고 싶다며 제석봉 내려 올 때까지 자기에게 카메라 앵글을 맞춰 줄 것을 요구한다. 정말 그들은 천왕에서 무엇을 빌었으며 어떤 감흥에 젖었는지는 나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알고 있다.   

 

 

 

 

 <제석봉의 고사목과 반야봉을 바라보며>

 

-연하선경에서.

장터목 거의 다 내려 왔을 때 산악대장께서 무전 연락이 왔다. 세석을 지나 영신봉을 오르고 있다는 보고였고 일행 중 한 명이 탈진으로 여기서 탈출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일행은 내가 알아서 차후에 보고 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L님은 약간 다리가 풀린 듯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인지는 몰라도 잘도 걷고 있었다. 오후 5시까지 그리고 한 시간의 인절미 타임을 생각해서 성삼재까지 갈 수 있겠다는 기대 아닌 기대도 해 본 우리들이었다. 잠시 후 연하봉과 삼신봉을 지나 연하선경에 올라섰다. 사방 팔방으로 펼쳐지는 지리의 파노라마를 한동안 감상하고 우리가 걸어 온 길과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가늠해보며 또 다른 힘든 여정 속으로 떠난다. 

 

  

 

 

 

 

 

 

세석쯤에 왔을 때 천운님의 세석 무용담이 늘어진다. 18여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세석의 그때 상황과 지금은 이렇게 숲이 우거질 수 있었는가 그리고 미래의 상황이 제석봉과 이곳이 어떻게 될 것이란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한때는 그 역시도 시간만 나면 이곳 지리에서 살았다는 등등……세석을 지나치기로 하고 영신봉으로 향하였다. 영신봉에서 잠시 머무르면서 또 다시 천운님께서 터지지도 않은 핸폰을 꺼내 들고 계속 어딘가로 연락을 시도 하지만, 그래도 지리에 오면 잘 터지는 내 폰을 쥐어주니 마누라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천왕에서 통화를 못했으니 이곳에서나마 지리의 비경을 얘기 해 줘야 한다면서……

 

 

 

 

 

 

그럼 나는 뭐야.

정말 무심한 사람이란 말인가. 지리만 들어 오면 핸드폰을 죽여놓고……

사실 아내는 내가 등산 하는 날이면 좌불안석의 불안한 하루를 보내는 모양이다. 혹시 꼭대기를 향해 오르다가 또는 바위를 타다가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온갖 억측으로 내가 현관문을 들어 설 때까지 잡상(雜想)에 몰두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산행 후에는 가급적 전화는 하지만……

5일전에 이 길을 걸었다. 11시간의 산행 중에 계곡과 연계된 산행이 시원함을 더해주고 있었지. 널널산행 이었지만 아직도 우리가 모를 생생한 지리의 비경을 찾아 떠난다는 설렘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한 인연은 또 다른 감흥을 주었던 산행. 마음 속으로 그려보며 이 길을 나는 걷고 있다.

발길은 현저하게 느려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어렵게 칠선봉에 닿자 물 한 모금 마시고 선비샘으로 향한다.

 

           

            <칠선봉에서 천운님>

 

 

 <나무가지 사이로 바라 본 초암능과 두류능선>

 

쉬는 시간이 늘어만 간다. 자꾸만 물어오는 행로는 저들의 암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안다. 벽소령에서 의신으로 빠지기로 이미 마음은 굳혔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시간을 소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름대로 시간 계산을 하여 성삼재로 향하는 버스를 화개까지 유도하기 위한 시간 벌기 작전을 나는 하고 있었다. 칠선봉에서 10여분 선비샘에서 30여분을 쉬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 하기도 하다.

 

 

 

 

 <벽소령 가는 길과 천왕이 처음이라는 백야님 모습>

 

-벽소령에서.

천왕에서 여기까지 11.1KM 오는데 거의 5시간을 소비하였고 성삼재까지 남은 거리가 11.4KM 이다 계산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어림없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그들에게 일깨운다. 여유 있게 쉬다가 의신으로 내려가기로 하였지만 내리쬐는 태양빛이 너무도 뜨거워 어찌할까 하면서 우리의 탈출구를 산악대장께 메시지로 남긴다.

 

 

 

         

 

 

 <의신 가는 길에서>

 

-산행을 접으면서

이제 정리 할 시간이다.

조그만 내려가면 좀 더 수월한 평탄한 길이 나오리라는 안심을 심어주고 중간 계곡 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천왕에서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던 우리들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인지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여운님의 초밥이 천왕의 초밥과는 새롭게 혀끝을 자극 하였고 일출님의 김치찌개도 새로운 감칠맛이 식욕을 당기게 한다. 숲으로 우거진 일명 작전도로가 빨치산 소탕을 위하여 지리산의 허리를 잘라놓은 사실을 그들에게 얘기를 해 주는 사이 우리는 벌써 삼정리를 지나고 있었다. 삼정리를 벗어나자 달아 오른 아스팔트 길은 정말 힘든 산행 보다 더 어려운 걸음이었다.

 

 

 

 

 

의신 주차장에서 콜택시를 불러 화개까지 이동하는 사이 전화 연락을 취해본다. 어쩔 수 없이 구례터미널까지 가서 연락을 취하지만 아직도 내려오지 않은 2~3명이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결국 마지막 한 명을 남겨두고 6시가 되어서 버스는 성삼재를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지막 하산 주를 기울이면서 우리는 오늘의 종주산행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깊이 반성 하면서 언제 함께할 그날을 기다리면서 건배를 합니다.

 

 

 

 

 

<에필로그>

모두가 내 탓이오.

아직도 내공이 쌓이지 않은 자신을 질책해 봅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부족하다는 것이라면 우리 산 꾼 모두를 매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는지 상대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산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도 하여 봅니다. 이 글을 통해서 함께한 일행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과 말씀 올립니다. 그리고 오늘의 못다한 종주는 내일이 있고 또 다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 할지라도 결코 산은 항상 우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산은 항상 그곳에 있습니다 라고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삼으며 이만 산행 기를 마칩니다.                                                

 

 

-일정정리.

02:50 산행 시작(중산리 매표소)

04:00 법계사

04:50~06:55 천왕봉

07:45 장터목 산장.

07:55 연하봉.

08:40 촛대봉.

09:00 영신봉.

09:50 칠선봉.

10:35~11:00 선비샘.

11:40~12:17 벽소령 산장.

14:00 삼정리(벽소령 4.1/의신 2.7)

14:50 산행종료(의신 주차장)  

 

2005. 6. 29.

                                       청 산  전 치 옥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