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의상봉을 넘으며.........

언제 : 2004년 4월18일
누구랑 : 나와 암을 극복하는 아저씨

어디로: 백화사--의상봉(485m)--용출봉(555m)--용혈봉--증취봉(575m)--나월봉(635m)--나한봉(665m)--문수봉(727m)--대남문--승가봉--비봉--향로봉--탕춘대--녹번역(시간 : 6시간 30분)

작년 여름이었다.
북한산 12성문을 답사한다며 대서문을 찾은 일이 있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길을 오르며 날 잘못 잡았다고 투덜거리며해 산이 어떤지도 모르고 올랐던 기억이 난다. 북한산의 북도 모르던 때였으니까?
산성매표소를 지나 대서문 곁에 있는 가계아저씨께 길을 물으니 의상봉은 미끄러워 위험하니 국녕사로 돌아가라고 일러 주어 의상봉을 오르지 못했는데 꼭 10개월만에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기필코 의상봉을 오르겠노라고 다짐을 하며 미리 준비한 지도 한 장을 들고 구파발로 향했다.
이른 시간에 다니던 버릇이 있어서인지 해가 중천에 돋은 9시에나 집을 나서니 왠지 하늘 보기가 미안했다.
지하철을 세번이나 갈아타고 구파발역에 도착하니 오늘따라 버스를 기다리는 길이 너무나 길어 보였다.
게으른 자의 자업자득이라 생각하고 줄뒤에 붙어 섰다
아마도 일요일이고 날씨가 좋은 탓에 너도나도 산을 찾아 하루를 보내려는 사람들 같았다.

산행을 하면서 잘 안 먹는 편인데 오늘은 기온이 높아 체력도 보충할 겸 길가 노점에서 오랜지를 한 망태 사서 넣었다.
줄은 좀처럼 줄어 들지 않았다. 무려 30분을 기다려서야 버스에 올랐다.
그나마 일요일만 구파발에서 산성매표소까지 왕복 운행하는 버스 덕에 시간을 줄 일수가 있었다.
안내 표지판도 없고 그냥 산성 메표소라고 만 되어 있었다.
백화사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버스에 올랐지만 버스가 움직이는 내내 긴장이 되어 시선이 창가에서 뗄수가 없었다.

웬걸, 이건 교통방송도 없고 무조건 왕복하는 버스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조차 아예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둘러보니 산꾼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묵묵히 종점까지 갈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용감하게 고함을 질렀다.
"아저씨 백화사에 세워 주세요"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버스가 멈추었다.
백화사라는 것이다. 구파발에서 10분정도 거리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백화사 정류장이라는 표시가 조그맣게 서 있었다.

남쪽하늘을 바치고 섯는 거대한 봉우리가 의상봉 같았다.
안내 표시가 없어도 동물적 감각에 산쪽으로 발길을 돌려 골목을 들어서니 멀찌감이 앞서 몇몇 등산객 차림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골목길을 접어들었다.
산을 다니면서 늘은 것이라고는 동물적 본능과 눈치인 것 같다.
백화사를 지나며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이곳에서 왼쪽 길을 따라 오르니 매표소가 나온다.
평소에는 운영하지 않고 주말에만 운영하는 매표소 같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언제부터 생겼느냐고 말을 건낸다.

그래 산을 오르도록 길을 만들어 주는 것도 고마운데 흔쾌히 1600원을 지불한다.
의상봉 오르는 길은 단아했다.
새잎 돋는 나무들 사이로 빨갛게 얼굴을 내민 진달래꽃들이 반가이 손을 내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한참 오르다 머리에 흰 수건을 맨 아저씨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건장한 체격을 아저씨는 릿지를 골라 타고 있었다.

'옳거니, 저 아저씨 따라 가면 산행의 재미를 배가시킬 수 있겠구나'
난 말을 걸었다.
"저 선생님"
힐껏 쳐다보던 아저씨는 말없이 눈으로 답을 했다.
"선생님 오늘 따라 가도 되겠죠."
"그러세요, 저하고 가면 힘이 들텐데요"
난 "그래도 혼자 가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거든요. 따라 갈께요."
난 아저씨의 대답도 듣지 않고 무작정 발자욱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산을 그렇게도 잘 타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의상봉에 오를때까지 별 말이 없었다. 몇 번의 눈빛만을 주고 받았을 뿐이었다.
의상봉에 오르니 산방천지 탁트인 조망에 또 한번의 흥분이 되었다. 북쪽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노적봉이 키제기라도 하듯 위용을 자랑하고 섯고 멀리 동장대의 누각은 한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와 박혔다. 우측으로 사무바위 비봉, 향로봉, 족두리봉이 늘어서 있고 앞쪽으로 용출, 용혈 ,증취, 나월, 나한, 문수봉이 줄을 서 있다.

의상봉을 내려서니 국녕사의 청동좌불이 온 계곡을 차고앉아 있다. 크기에만 신경을 썻는지 어찌 산과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다. 조금만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했다면 의상봉에 올라와 주위환경과 조화를 맞추지 않았을까?
나무 관세음 보살.....
가사당암문을 지나 20여분 오르니 용출봉이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아저씨와 몇마디 대화를 나누었는데 충격적인 말을 했다.
자기는 배속에 암덩이 때문에 시한부 인생을 산다고 했다.
직장도 버리고 치료를 위해 집까지 팔아야 했다며 잠시 회한에 젖기도 했다.

난 행복 한놈이란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물을 수 없어 그런데 어떻게 산을 그렇게 잘 타느냐고 만 물었다.
누워 있으면 죽을 것 같아 한발 한발 걷다 죽으려고 걷다보니 죽지는 않고 산 타는 실력만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5발자국 걷고 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고 했다. 6월 밖에 못산다는 사람이 지금 그 시간이 넘었다면서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했다.

오랜지 한 개씩 먹고 또 걸었다. 증취봉을 지날때는 위험한 고비도 넘겨야 했다.
바위에서 미끄러지면서 발목도 접질리고 손가락은 피마져 흘렀다.
난 고통을 참아야 했다.
나약한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다. 산을 타면서 자만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오늘은 달랐다. 발목이 시려왔다.
절뚝거릴정도는 아니었지만 고통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왜 산을 즐기러 다니면서 꼭 위험한 길로 다녀야 하는지, 어쩌면 하나의 과시욕 같은 느낌이 든다. 남들에게 나 이렇게 산 잘 타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짓이란 걸 잊은체.

증취봉을 지나 바위난간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었다. 초라한 도시락이지만 맛은 진주성찬에 비할만했다.
아저씨는 밥을 적게 먹었다. 내 도시락의 1/3밖에 되지않았다.
" 아저씨 밥 더 드세요"
"아니 됐어요, 이것도 많은 걸요"
아저씨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르키며 만져 보라고 했다.
암덩이가 이거라며.
난 도저히 내 손이 떨려 만질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위암말기에 간까지 전이된 암 때문에 밥을 소화시키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산에 다니고 부터는 이것이라도 먹을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고. 아저씨에게 산은 완전히 생명의 탯줄같은 느낌을 받았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저씨의 딸이었다
산에 간 아버지가 걱정이 된다며 산행하는 동안 몇 번씩이나 벨이 울렸다.
"아저씨 행복하세요. 효녀가 있었어요"
아저씨는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저씨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서로가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난 주머니의 명함을 꺼내 건냈다.
아저씨는 " 난 아무것도 줄 수 없는데" 그랬다.
병마와 싸우면서 직장도 버리고, 자신도 버린지가 이미 오래되었을 테니까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이름이 뭐 필요하냐며 삶을 초월한 도인같은 말을 내 뱉았다.
30여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쉬어서 그런지 발목의 통증이 심하다.

그래도 아프다는 표시를 하기 싫었다. 오늘같은 산행이 나에게 또 주어지랴.
꾹 참고 걸었다. 나월, 나한봉을 지나고 청수동암문을 지나 대남문에 도착을 했다.
물을 구하기 위해서 문수봉을 지나쳤는데 대남문에서 샘은 너무 멀리 있었다.
포기 하고 물을 아껴 먹을 수밖에.
아저씨는 몸이 땀이 나는 것이 병이라면서 몇 번씩이나 수건을 벗어 짰다.
작은 배낭에는 온통 물 종류가 들어있는지 수시로 꺼내 드셨다. 문수봉과 승가봉을 지나 사모 바위를 지나는데 누가 부른다. 아저씨의 후배란다. 난 인사를 하고 비켜서서 이야기가 끝날때까지 기다렸다. 이야기 내내 건강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난 다시 한번 아저씨가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비봉정상에 올라 또 한번의 휴식을 취했다.

우린 말이 없었고 오랜지를 까 먹으며 서산으로 기우는 해만 바라보았다.
비봉에서 아저씨 집이 보인다며 나에게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었다.
일부러 산에 다니려고 산밑으로 이사를 했다며 인왕산 아래 아담한 아파트를 가르켰다.
오리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 오르면 내려가야 하는게 산이라면, 이 세상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게 우리네 인생일진데 삶이 길고 짧음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간다는 것이 아쉽고 미련이 남는 것일까?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갈꺼요"
"저 아저씨 가는 곳으로 갈 건데요."
"그럼 갑시다"
우리는 비봉 서쪽사면의 릿지를 타고 내려서 또 걸었다.

이제 체력이 많이 소진되어서인지 아저씨의 발걸음이 많이 무디어 졌다.
아저씨는 나보고 자꾸 먼저 가라고 말을 했다.
보조가 맞지 않으면 서로가 피곤하다는 것을 아저씨는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 같았다.
향로봉을 우측으로 끼고 우리는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걷는 속도가 많이 떨어졌다.
길도 안보이는 비탈길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걸어갔다. 샘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수십번 비봉을 올랐지만 이곳에 샘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샘으로 가면서 아저씨는 꿈이 하나 있다는 얘길 꺼냈다.


나는 호김심이 갔다. 덤으로 사는 삶을 가진 사람의 꿈.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꿈이 뭐예요" 난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토바이를 타보는 것이라 했다"
참 우스운 꿈이라 생각했다.
"아저씨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오토바이는 위험하잖아요"
"그래도 그게 그렇게 타고 싶어요"
" 막 달리고 싶은 거 있죠"
어쩌면 저 세상 끝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고 싶은 지도 모른다.

아직 살수 있는 날이 얼마인지도 모르기에 달려가고 싶은 곳이 많은 것일까?
이야기가 끝날 무렵 우리는 거대한 절벽아래 다 달았다.
샘이었다. 꼭 절터 같았다. 아저씨는 이곳이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라 했다.
잘 정돈된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는 곳인 것 같았다.
바가지에 물을 떠서 건냈다.
물은 목 줄기를 타고 갈증에 젖은 몸을 적시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모금 물을 들이킨 아저씨는 바위에 걸터 앉았다.

정말 힘이 든다고 했다.
그랬다 아저씨 말대로 온몸에 힘을 다 소진할때까지 걷고 나면 밥이 좀더 들어간다고 한말이 생각났다.
먹기 위해서 걷는 지도 모른다. 그래야 몸에 힘이 생기고 면역이 생긴다고 아저씨는 믿는지도 모른다.
아저씨의 삶에 대한 애착을 느끼고 나니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불평불만에 배부른 돼지고.

10여분의 휴식하고 탕춘대로 향했다.
이제 아저씨의 발걸음은 더 무디어져 있었다.
속도를 맞추기가 힘들 정도였다.
말도 없어졌다.
더 이상의 힘이 남아 있지 않은 듯 했다.
의상능선에서의 힘찬 발걸음은 어디로 갔다 말인가?
탕춘대 성벽을 지나 녹번역까지는 말없이 걸었다.
더 이상 말을 건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을을 내려와 녹번역 입구에서 차 한잔을 대접하고 싶다며 말을 건냈다.
아저씨는 말 만들어도 고맙다면서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이름도 모르는 쉰세살의 아저씨는 악수만 인연이 있으면 의상봉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섰다.

따라 내려가고 싶었지만 발길이 떨지지 않았다.
난 속으로 아저씨 오래 오래 살아야한다며 빌었다.
암을 이기고 건강한 모습으로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다음주 또 의상능선을 오르려 한다.
혹 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 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아저씨 건강해야 되요....
.
(아저씨 저 항상 빌고 있을 께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산행 하시기를......

▣ 서배현 - 님의 글을 읽으며 많이 울었습니다. 산에 다니며 인생을 배우고 사랑하며 이웃과 함께하는 법을 연습하렵니다.
▣ 떠떠머리 - 산행기를 읽고 이렇게 숙연해 질 수도 있는 가 봅니다. 진정한 불치의 병은 없다 합니다. 반드시 산의 효험으로 병마를 극복하리라 믿고 싶습니다.
▣ mjlhalla - 그저 산에서 노닐다 보면 건강이나 만족감은 저절로 따라오겠지 했는데, 그 분은 입산은 암세포가 주는 육신의 고통을 줄이고 삶의 연장이라는 엄숙한 뜻이 있었네요. 산과 더 오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저희 부친께서도 연전에 암수술 받으셨어요. 서선배님, 이제야 생사 확인됩니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남녘산행 신청자중 안뵈던데 무슨 급하신 일이 있으신가요?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 회원 - 아름다운 경험이네요
▣ 김용진 - 가슴이 웬지 뭉클해지는 산행기를 읽었습니다. 쉰 세살의 그 분의 같은 산객으로서 쾌유하시길 기원하고 또 기원해 봅니다. 우리 모든 산님들 역시 건강을 위하여.... 즐산 하시고 안산하십시요. 남한산성에서 성남분당 방향으로 종주를 하다보면 망덕산의 왕기봉이란데가 있습니다. 이곳 정상석에 진흥산악회에서 써 놓은 글귀가 생각납니다. “산을 오르지 아니하면 병든 후에 뉘우친다”는 내용의 글이.......강건하시고 동행하신 그분 또 다시 의상봉 능선에서 만나시길 빌겠습니다.
▣ 똘배 - 산에는 꼭 즐거운 사람만 오는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케 합니다. 그분의 병환이 완쾌되길 빌어봅니다.
▣ 김찬영 - 목이메입니다 어거지로 참아가며 읽고는 ....주어진 삶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이름모를 그분의 악마가 몸밖으로 빠져나오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 산초스 - 슬프지만 아름다운 한편의 동화를 읽는것 같습니다. 아픔과 죽음의 그림자를 이겨내면서 힘든 산행을 하시는 모습이 감명을 주시는군요. 암을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하여 오래사시기를 빕니다.
▣ 박용현 - 김용진님 오랜 만입니다. 여전히 즐산하고 계시지요.
▣ 박용현 - 산초스님 지면으로는 처음뵙는 것 같군요, 한국의 산하에서 자주뵈어 익숙한 분 같아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산하를 사랑해주십시오.
▣ 이두영 - 몇 차레 가보았지만 북한산 정말 대단하군요 보아도 보아도 끝이 없군요 정말 우리나라 최고의 산입니다 잘보고 갑니다 언젠가 나도 북한산에서 몇일을 두고 먹고 자고 할날이 있을것이라 믿고 잘 기역 해두겠읍니다 감사합니다
▣ 빵과 버터 -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빈 사무실에서 님의 글을 보고 울음이 나오는걸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글을 씁니다.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은 아니었을 껍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태우는 그분의 인생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감사합니다....
▣ 박용현 - 님의 글도 몇번 읽었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즐산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 김유찬 -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산에서 만난 그분 암을 이기고 오래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 김정목 - 님의글이 저를 또울리는군요.저와동갑내기 친형수님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시어 그제 삼우제를 모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을땐 이것저것에 바둥거리며 ,때론 이것저것에 욕심도 부려보지만.........떠날땐 고작 삼베옷에 버선한컬레 뿐이더군요.다음달이면 어린이날,어버이날도 있는 5월입니다.이런기회에 가족의 소중함도함께 느끼시는 산하가족이 되셨으면 하는바램입니다.그분 정말 건강회복 하시어 사랑하는 가족과오래오래 산행하시길 빌고 또 빌어봅니다....산하가족여러분도 항상 건강 하십시요
▣ 김영건 - 글을 읽고 눈물을 훔치려는데 서배현 선배님의 댓글이 보여 더욱 반갑군요. 댓글을 잘 쓰지 않는 분이신데 ... 암벽강사를 지내신 서 선배님 말씀처럼 저도 이웃에 대하여 대하여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볼랍니다.
▣ 박용현 - 제글을 읽어주신점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건강하게 산을 사랑하시는 님들의 마음에 그저 겸손할 따름입니다. 즐산하시고 안산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