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름의 바다를 건너 11

산행일자 : 2009. 5. 8~5. 9  무박2일 산행

산행구간 : 추풍령-금산-사기점고개-작점고개-갈현-용문산-국수봉-큰재

산행거리 : 19.67km, 8시간30분

 



 열나흘 달빛은 보름달


 오랜만에 하늘에 매달려 있는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니 반갑고도 기쁘다.

 달빛에 가리워져 별들의 성대한 잔치를 볼 수 없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달빛에 비추어진 내 그림자를 바라보던 기억이 얼마인지 아련하기만 하다.


  대간 길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사소한 것들을 통하여 감성을 자극하고 우리네 삶에 잔잔한 기쁨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보다.

  추풍령 노래비 앞에 도착한 시간이 03:20분 온 동네 개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합창으로 환영해 준다.


  산행 준비를 마친 후 힘찬 구호와 함께 백두대간 11구간 출발(03:40), 개들은 평소 훈련이 잘 되었는지 쫓아오면서 까지 짖어대는 녀석을 바라보며 돌이라도 하나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온밤 어둠을 지키던 보름달은 몸을 부풀리며 눌의산 너머로 점차 사라지고 우리들은 한걸음 한걸음 금산으로 진입한다.


  금산은 슬픈 산이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석재를 얻기 위하여 산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던 것이 해방 후에 잠시 중단되었으나 또다시 경부고속철도용 자갈로 사용되다가 끝내는 고속철도용 자갈로까지 사용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땅 마루금인 하늘길이 땅으로 내려와 침목사이의 자갈돌이 되고 공사장의 골재로 변용된 것이다.

 등산로 좌측에 설치되어 있는 로프를 잡고 마치 이등변 삼각형처럼 잘려나간 금산을 바라보며 작은 돌 하나를 던져 보자 산이 절규라도 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어둠속으로 멀어져 간다.


 산이 산으로 남고,

 풀이 풀로 남고,

 나무가 나무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땅을 보존하여야 하는데 잘려나간 금산이 자꾸만 발걸음을 되돌아보게 한다.

 

 숲 향기를 따라서


  부드러운 길을 따라 걷는다.

  바람결이 적당하고, 기온도 적당하고, 등산로까지 완만할 뿐만 아니라 꽃향기마저 기분 좋게 후각을 건드려 주고 있어 걷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랜턴불빛에 애기나리꽃, 둥굴레꽃, 양지꽃, 뻐꾹채, 그리고 내가 모르는 이름의 많은 꽃들이 수줍게 고개를 흔든다.

  랜턴불빛에 취나물, 고사리, 잔대, 두릅, 원추리, 미역취 등등의 산나물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서울에는 아직 아카시아가 피지를 않았는데 추풍령 지역만 해도 아래지방이라 아카시아 꽃이 환하게 피어나 작은 바람결에도 꽃향기가 전신을 감싸준다.


  아카시아 향기가 참 좋다.

  이 감미로운 느낌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문득 대간 길을 걷는 다는 것이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여본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괴롭고, 어떤 때는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좌절하다가 행복해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는 것이 인생인 것처럼,

  우리땅 마루금을 걷는 것도 괴로움과 고통을 겪은 후라야 정상에 올라서는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일출시간이 05:27분 이라는데 다섯시가 가까워지자 밤새 치장을 끝낸 산은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우리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세상의 많은 욕심과 헛된 꿈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꽃은 피어나고, 고운바람은 불어오고, 새들은 분주하게 노래 부르며, 바람결에 꽃향기가 무시로 날아오는 계절, 아름다운 것은 아득히 먼 곳에서 빛나는 별빛처럼 가까이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고도 하지만 지금 내 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은 부족하거나 과하지도 않게 가까이 볼수록 신비하고도 이쁘기만 하다.


  스멀스멀 달아나는 어둠,

  옅은 녹색의 옷으로 차려입은 산,

  이 길을 끝없이 걸어도 시간이 흘러가는 흔적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여 본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걷다보니 지난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 있어 사기점고개(05:45)라 불리어지는 고개를 지나자 오른쪽으로 난함산이 눈앞에 보인다.

  난함산 오르는 임도를 두 번 횡단한 후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자 꽃향기와는 상반된 농장의 분뇨냄새가 역겹게 다가온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농장 옆으로 밀을 심어 놓았는데 가슴높이까지 자라난 밀이 산자락과 조화되어 잘 그려진 풍경화에서나 나올 듯한 모습이라 카메라에 담아본다.



 산새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


  언제부터인가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라는 말을 공감하게 되었는데,  내게 있어 이말은 백두대간을 하면서 거의 신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대간 길을 알고 걷는 것과 모르고 걷는 것, 적당히 알고 걷는 것과 많이 알고 걷는 것 사이에는 완전하게 다른 느낌과 감동으로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의미가 있고 그러한 의미들이 모여 처음과 끝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대간 길에서 길위에 떨어져 내린 철쭉꽃 송이에서 자연의 진리를 발견하기도 하고, 바위틈에 피어난 붓꽃 한송이를 바라보며 이쁘다는 감탄사를 연발할 수 있듯 이러한 기억들은 하나로 모여 추억이 되고 우리들의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닐까.


  김천시 어모면과 영동군 추풍령면 경계에 있는 작점고개(06:45)에 도착하자 아침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진다.

  작점고개라는 지명은 새들이 많고 유기점들이 많았기에 “작점고개”라고 불리어졌다고 하며, 그밖에도 여덟마지기고개, 성황뎅이고개, 능치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작점고개 정상에는 김천시에서 세워놓은 표석에 천마가 구름 위를 내달리고 모습이 있는데 그 모습이 우리들이 꾸는 꿈처럼 자유롭기만 하다.


  아침 해가 밝아오자 새들은 본격적으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울음소리가 꼭 “홀딱벗고, 홀딱벗고”라고 우는것처럼 들려 “홀딱새” 라고 불리어지는 “검은등 뻐꾸기” 울음소리가 우리 일행을 쫓아오며 울어대는 듯 이산저산에서 구성지게 울어댄다.


 “홀딱벗고, 홀딱벗고” 새소리를 흉내 내며 걸어가는 산행 길은 즐거운 상상으로 한층 더 신이 나고, 내안의 숨소리를 조용히 들을 수 있어서 좋고, 푸른 숲의 기운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서 힘이 나고,  내가 걸어야할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새로운 기대를 할 수 있어 나는 지금 실실 웃음이 나올 만큼 행복하다. 


 춤추는 표지기

   

  산행 길에서 꽃을 만나고, 나무를 만나고, 숲과 새를 만난다.

  그중에서 꽃은 우리들에게 향기를 뿜어 주어 길을 걷는 우리들의 옷과 모자와 배낭까지도 꽃향기에 젖게 한다.

  꽃향기에 취한 우리들은 구름처럼 몸도 마음도 가볍다.


  대간 길에 흉물스럽게 설치된 기도터(08:10) 를 지나자 주변에 취나물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고사리도 가끔씩 눈에 보인다.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몇 줌 채취한 것이 우리가족들이 족히 몇 번은 된장찌게를 끓여먹을 정도의 양이다.


  아마도 오늘 내가 오르는 용문산행의 기억은 우리가족의 밥상위에서 된장찌개와 어우러져 또다른 맛으로 재생될 것 만 같은 즐거운 예감이 든다.


  드디어 우리 일행이 식사를 하기로 약속되어있던 용문산 정상(09:10)이다.

  먼저 도착한 대원들은 벌써 식사를 끝내고 나무 그늘 아래서 단잠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산정에서의 식사는 항상 즐겁다.

  비록 식은 밥에 마른반찬 몇 가지가 찬의 전부라지만 세상에 이보다 푸지고 걸진 정찬은 없을 것이다.

  대자연을 정원 삼고, 새들의 노랫소리를 음악  삼아 나누는 식사시간은 우리들 모두를 소풍나온 아이들처럼 들떠있게 한다.


  오늘 산행 길은 마주 오는 산행객들도 거의 보이지 않고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는데도 다른 구간에 비하여 많은 표지기들이 눈에 뜨인다.


  부부가 같이, 형제들끼리, 또는 아버지와 아들이, 혹은 우리들처럼 직장동료들이 대간 길에 나선 목적을 밟히며 뒤에 오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도록 표지기를 매달아 놓고 있지만, 표지기의 재질이나 크기, 문구 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매달았으면 좋겠다.

  내가 매달아 놓은 표지기가 길을 안내해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엉뚱한 방향에 매달아 놓아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거나, 다른 표지기를 위협이라도 하듯 커다랗게 매달아 놓아 산과 조화하지 못하고 자연에 흠집을 내지는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봄꽃에서 울리는 맑은 소리

 

  식사를 마치고 국수봉으로 가는 등산로에는 양쪽으로 갈참나무, 신갈나무, 소나무 숲사이로 나있는 길이어서 햇빛이 내리 쬐어도 나뭇잎에 걸러진 부드러운 햇살이 발밑에 어른거린다.


 오름과 풀림이 반복되는 산행길 이지만 오늘 우리가 걷는 추풍령에서 큰재 구간은 완만한 육산이라 긴장감이 떨어지는 듯 하다.


  간간히 눈에 뜨이던 둥굴레꽃과 애기나리꽃, 은방울꽃이 국수봉 정상 근처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애기나리꽃은 새하얀 색이 누렇게 퇴색되어 가고 있지만 은방울꽃과 둥굴레꽃은 서로 시샘이라도 하듯 무리지어 피어있다.

 “행복의 기별” 또는 “천국의 계단”이라는 꽃말을 가진 은방울꽃 군락지를 직접 볼 수 있다니,그것도 꽃대마다 꽃송이가 조롱조롱 맺혀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귀를 기울이면 꽃말처럼 행복의 기별이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국수봉(10:55) 정상은 충북 영동군과 경북 상주시의 경계로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으로 물을 움켜지었다는 뜻을 담아 움켜질국(掬)자에 물수(水)자를 써 국수봉이라는 이름을 지은 선인들의 지혜에 탄복할 뿐이다.


  국수봉을 지나 40여분 진행하는 중에 선두는 벌써 오늘의 도착지점인 큰재에 도착하였으니 조심해서 내려오라는 무전이 날아온다.


  큰재에 내려서자(12:10) 백두대간 상에 유일한 학교였으나 지금은 폐교가 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가 눈앞에 보인다.

  아무도 손보지 않아 수풀만 무성한 교정, 깨어진 유리창 사이를 드나드는 무심한 바람결, 참새들의 노랫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조용히 눈을 감자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서투른 풍금 반주를 따라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나무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