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지맥 답사기◈

  

[제 1지맥]

 

제 2구간

 

[죽정치-천마산-견두산-밤재]

 

2009. 4. 2(목) 날씨 : 맑음(약간 흐림)

 

산행(종주)거리

총 산행거리 : 도상 약 15km

(섬진지맥 14km, 진입 1km)

 

산행(종주)시간

09 : 20 - 15 : 01(총 5시간 41분 소요)

 

산행(종주)코스

죽림정사→죽정재 안부→도장봉→비득재→620봉(능선분기점)→깃대봉(691m)→둔사치(임도)→

천마산(656.1m)→상무봉→망루터→둔사재(십자로 안부)→견두산(774.7m)→660봉→자귀나무쉼터→삼거리봉→밤재

 

위치 : 전남 구례군, 용방면, 산동면, 곡성군 고달면, 전북 남원시 수지면, 주천면 등 접경

 

시간별 진행

09 : 20 죽림정사

09 : 43 죽정재 안부

10 : 21 도장봉

10 : 35 비득재

10 : 47 620봉(능선분기점)

10 : 59 깃대봉(691m), 삼각점(남원 28, 1991복구)

11 : 26 둔사치(임도)

11 : 43 천마산(656.1m), 삼각점(남원28, 1991복구)

12 : 18 상무봉

12 : 30 망루터(중식 25분)

12 : 55 중식후 출발

13 : 02 둔사재(십자로 안부)

13 : 45 견두산(774.7m)

14 : 15 660봉, 삼각점(남원24, 1991복구)

14 : 33 자귀나무쉼터

14 : 44 삼거리봉

15 : 01 밤재


 


 

☛섬진 제 1지맥의 개요

요천의 남쪽 울타리로서 백두대간 지리산 만복대 북쪽 1,360봉에서 분기되어 다름재(1,044m)-영재봉(877.9m)-숙성치-밤재(19번국도)-견두산(774.7m)-둔산치-천마산(653.8m)-깃대봉(691m)-비득재-두계치-형제봉(621m)-천왕봉(695m)-누룩실재-갈미봉(494m)-까막재-27번고속국도-깃대봉(242m)-제비재-병방산(160m)등의 산과 고개, 도로를 지나며 전남 구례읍 원방리 병방마을부근에서 남쪽으로 황전천과 만나는 섬진강에 꼬리를 내린다(도상거리 약 39km)

 

☛제 2구간 특기

○제1구간 처럼 구례군에서 등산로와 편의시설(쉼터, 화장실, 음수대등)을 잘 정비 하였고, 군데군데 탈출로 마다 이정표를 설치하여 산행시 지형파악 및 숙지에 많은 도움이 됨.

 

 

★산 행 후 기

 

≪호석(虎石)과 유서 깊은 견두산(犬頭山)을 찾아서≫

 

 

고즈넉한 산사인 죽림정사에서

진홍색으로 피어올라 환한 미소로 답례하는

동백꽃의 환송을 받으며 위로 오른다.

 

곧바로 절 위로 오르면 졸졸졸 흐르는

계류의 물소리가 숲의 활기를 넘치게 하고

 

앞에서는 여느때처럼 오늘도 산새들의

숲을 찬미하는 청려한 소리가락이

 

산하에 메아리치며 고요와 적막에 휩쌓인

산사주위를 맴돌고 있다.

 

숲에서는 피톤치드 향기 가득한 솔 내음을

새들이 입에 물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산속에 전파하여 숲은 온통 솔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넘쳐 흐르고 있다.


 


 

<죽림정사 도착전에 바라몬 형제봉>


 


 


 


 

<죽림정사에서 죽정재 오르는 길>


 


 

09시 43분 죽림정사를 출발하여 23분후 죽정재 안부에 올라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곧바로 우측으로 돌려 섬진 1지맥의 제 2구간 답사를 개시한다. 지난번 1구간처럼 등로는 쾌적한 송림숲으로 전개된다.


 


 

<죽정재 안부>


 


 


 


 

곧이어 내림의 끝에는 반드시 오름이 있다고 하면 산은 다시 그 법칙을 알려 주겠다 하며 지난번 형제봉에서부터 죽정재까지 한동안 뚝 떨어뜨린 고도를 만회하려고 서서히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고 한동안 쉼 없이 오름을 계속한다.

 

 


 

<도장봉>


 


 


 


 

<도장봉에서 당겨본 천마산>

 

10시 21분 한참동안 올라 이정표가 있는 도장봉에서 직진하여 나간다. 조금 지나면 깃대봉과 천마산, 견두산으로 이어지는 지맥의 연릉이 나무사이로 들어온다. 2-3분후 좌측으로 돌아가며 조금 내려오면 비득재다.


 


 

<비득재>


 


 


 


 

10시 35분 우측에 임도가 나있는 비득재에 내리선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전남 구례군 산동면 둔사리 둔기 방면이다. 둔기마을은 임진왜란때 의병이 마을뒷산에 머둘다 갔다하여 ‘둔터’라고 호칭하다가 한자로 기록하면서 둔기(屯基)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10시 47분 좌측(남서쪽)에 곡성군 고달면 호곡리쪽으로 지릉이 분기되는 620봉에 올라 우측으로 돌려나간다. 호곡리(虎谷里)는 옛적이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어 유래된 지명이라 한다.

 

10시 59분 삼각점(남원 28, 1991복구)과 이정표 그리고 구례군에서 설치한 표석이 있는 깃대봉(691m)에 올라본다. 천마산이 지척에 있고 그 뒤로 견두산으로 이어지는 연릉도 확연히 잡힌다. 
 


 


 


 


 


 


 


 


 


 

<깃대봉 삼각점>


 


 


 


 

<깃대봉에서 본 천마산(좌) 및 견두산(우)>

 


 


 

<당겨본 천마산>


 


 

<당겨본 견두산>

 

여기서는 우측으로 내리서야 되고 10분후 둔사봉을 지난다. 곧이어 좌측(서쪽)에 전남 곡성군 고달면 목동리에서 우측(동쪽)에 구례군 산동면 둔사리를 잇는 새로 난 포장도로가 내려다보인다.


 


 

11시 26분 임도가 나있는 둔사치를 가로질러 나간다. 좌측으로 내리서면 민가와 새로난 포장도로로 탈출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부근 아래에 새로 난 도로 터널이 있다. 다시 오름길로 이어지고 10여분 이상 조금 더 오르면 천마산이다.

 

11시 43분 삼각점(남원28, 1991복구)과 이정표 그리고 구례군에서 설치한 표석이 있는 천마산(656.1m)에 올라본다.


 


 

<천마산 정상>

 


 


 


 


 


 


 

 


 


 


 


 


 


 

<천마산에서 지리산 반야봉 및 노고단 조망>


 


 

<천마산에서 본 노고단>

 

천마산(天馬山)은 고대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 산 중턱에 천마시풍(天馬時風)이란 명당이 있는데 산명은 이러한 천마시풍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50여평 정도의 너른 공터가 있고 구례군에서 주변을 잘 정비를 해놓아 인근의 산군이 모두 잘 조망된다.

 

전남 구례군은 산을 찾는 등산객의 안전산행과 다양한 산행코스를 제공키 위해 2006년부터 3년간에 걸쳐 사업비 1억 3천만원을 들여 천마산 및 견두산등산로 구간외 계족산, 산동, 오산, 문척 등 9개구간 약 70여km 등산로에 이정표, 등산 안내도, 로프등을 설치하고 산정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하여 가는 곳 마다 천혜의 조망터를 만들어 놓아 등산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또한 앞으로도 구례군 관내의 산을 찾는 등산객을 위해 음수대, 화장실 등을 추가 설치하는 등 편의시설을 확대 설치하여 전국의 관광명소로 발전시키고 웰빙등산로의 지역명소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방침이라 한다.

 

이러한 결과로 현재 인터넷등 매스컴을 통하여 날이 갈수록 전국에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등산객들이 날로 찾고 있다고 한다.

 

다시 여기서 부터는 전북과 전남의 도경계를 따라 가야 된다 20분후 좌측(서쪽)에 전북 남원시 수지면 유암리와 우측(동쪽)에 전남 구례군 산동면 신학리를 있는 서리내재를 가로질러 오른다.


 


 

유암리에는 유촌(柳村), 포암(包岩), 갈촌(葛村)등의 마을이 있는데 유촌마을은 마을앞에 버드나무를 심었더니 꾀꼬리가 모여 들어 집을 지은 유지앵소(柳枝鶯巢)의 풍수설에 의해 버드나무 첫 자 "버"와 버드나무가 섰다는 밑자리의 "터"를 합쳐 "버터"라 불러오다가 버들 류(柳)자와 마을 촌(村)자를 따서 유촌(柳村)이라 불렀다한다.

 

포암마을은 논, 밭, 길, 산, 시냇물 어디를 가나 바위와 돌이 많아 바위에 둘러싸인 곳이란 뜻으로 [포바위]라고 부르다 [포암(包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갈촌마을은 본래 함박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함박골]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견두산에서 내려 뻗은 칡이 마을 전체를 에워싸고 있어 [갈벌]이라 불렀다가 다시 후일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갈촌(葛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2시 18분 한차례 올라 이정표가 있는 상무봉을 지난다. 거목사이로 견두산이 지척에서 어서오라 손을 내밀고 있다. 산정을 향해 아래에서 올라오는 골바람은 너무도 상쾌하여 발걸음을 가볍다.


 


 


 


 

<상무봉에서 본 견두산>


 


 

<당겨본 견두산>

 

12시 30분 이정표가 있는 망루터를 지난다. 그 옆에는 ‘세거무은동’(世居霧隱洞)글자가 돌에 음각되어 있는데 이성계가 난을 일으켜 조선을 세우자 고려말 충신 중 이름 모를 한사람이 숨어서 살아온 곳이라 한다.

 

그리고 그 위에는 최근에 발견되었는지 주변을 둥굴게 돌로 쌓아 성역화 해놓았고 그 안에 바위에 는 천안전씨유허(天安全氏遺虛)와 그옆에 작은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어떻게 글씨를 새겼을까 그저 알송달송하기만 한다. 한켠에 앉아 점심을 때우고 다시 출발한다(12시 55분)


 


 


 


 

<세거무운동?>


 


 


 


 


 


 

<천안전씨 유허비?>


 


 

<망루터에서 만야봉 및 노고단 조망>


 


 

<당겨본 반야봉>


 


 

<당겨본  노고단>

 

13시 02분 좌측에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와 우측에 구례군 산동면 둔사리 상무마을을 잇는 십자로 안부인 둔사재를 가로질러 나가 죽산박씨 묘지위로 올라 진행해나간다.


 


 

호곡리는 처음 마을 지형이 누워 있는 범 형국이고, 호두산(虎頭山:지금의 견두산)에 범이 많아 범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호음실(虎音室)이라 불렀다한다.

 

그 후 차차 마을이 번창하자 앞 산 줄기를 경계로 안홈실과 밧(바깥)홈실로 나누었는데 그 중 안 홈실을 행정구역 개편때 호두산 전설로 범호(虎)자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좋을 호(好)자로 바꿔 내호곡(內好谷)이라 개칭 하였다고 한다.

 

상무마을은 주야로 안개가 가득하여 그곳에서 피난을 하였다 하여 무은(霧隱)이라고 하다가 무은의 윗마을이라 하여 상무라 불렀다 한다.

 

13시 32분 헬기장을 지난다. 2분후 도경계 안내판과 우측(동쪽)에 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현천쪽으로 탈출로가 있는 안부를 가로질러 오른다.


 


 


 


 

현천마을은 마을뒷산인 견두산이 ‘현(玄)’자 형으로 되어있고 뒷내에는 옥녀봉의 옥녀가 매일같이 빨래를 하고 선비가 고기를 낚는 어옹수조(漁翁水釣)가 있어 그 아름다움을 형용하여 ‘현천’이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산수유나무라고 알려진 시목이라고 살고 있는 계천마을과 견두산 정상부 아래에 위치한 현천마을은 산수유마을로 전국에서도 유명하다.

 

이곳 지리산 주변에 피는 산수유는 중국 산둥성(山東省)에서 한 처녀가 이곳에 시집오면서 갖고 온 산수유나무 한 그루가 시초라고 한다. 또한 산동면(山洞面)이라는 마을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견두산에서 본 남쪽 조망>


 


 

<천마산 조망(중앙 우측)>


 


 

<당겨본 천마산(중앙)>


 


 

<견두산 정상부>

 

13시 45분 구례군에서 설치한 표석과 무명묘지 1기가 있는 견두산(774.7m)정상에 올라본다. 사위가 시원스럽게 열리면서 만복대에서 분기되어 영재봉과 밤재 그리고 이곳을 거쳐 천마산, 깃대봉, 형제봉, 병방산등으로 이어지는 섬진1지맥의 산줄기가 모두다 완연히 들어온다.

 


 


 


 


 


 


 

<견두산에서 밤재-영재봉-만복대로 이어지는 섬진 1지맥의 연릉>


 


 

<지리산 반복대(좌),반야봉(중),노고단(우) 조망>


 


 

<영재봉(중앙)>


 


 

<만복대>


 


 
 <반야봉>

 


 

<노고단>


 


 

<섬진 2지맥의 남원 금지 고리봉-삿갓봉-문덕봉라인 조망>

 

견두산(犬頭山)은 본래 호두산(虎頭)이라고 했는데 이산에는 들개가 많이 살았고 이놈들이 떼를 지어 울고나면 반드시 남원고을에 큰 불이 나거나 호환(虎患)이 나서, 영조때 관찰사 이서구가 부임한후 이를 풍수로 해결을 하였으니 호두산의 이름을 견두산으로 바꾸고 개의 천적인 호랑이의 호석(虎石)을 고을에 세워 견두산을 향하게 한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고 한다(★산행기 하단에 상세기재)

 

그리고 여기에 있는 무명묘지는 숙부인 남원윤씨(淑夫人南原尹氏)묘지라 전하는데 남원윤씨는 조선조 정 3품 통정대부 벼슬을 지낸 죽산박씨(竹山朴氏) 재현(在鉉)의 부인이라는데 남편과 합장하지 못하고 산정에 모신 사연을 아래와 같이 전해 져 온다고 한다.

 

견두산과 천마산 줄기는 금장지지(禁葬之地:매장을 금지하는 땅)으로 누구라도 묘를 쓸 수 없었으며 더군다나 견두산은 돌산(石山)이었다.

 

그러나 돌들로 가득 채워진 견두산 산정에 5척 단신의 한 사람만 누일 수 있는 명당의 묘지터가 있는지라 죽산박씨 집안에서 고을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묘지를 쓴 후 100일 안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묘를 이장하겠다는 확약을 하고 묘지를 쓰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날 묘지를 쓰고 돌아오는 길에 곧바로 빗줄기가 내리니 그 당시가 가뭄이라 고을 사람들이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고 여간 기뻐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묘가 정상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남원윤씨 묘지?>

 

휴식과 조망을 마치고 밤재쪽으로 조금 곧바로 이정표(도문화재 0km, 철쭉군락지 0.4km)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10여m지점에 높이 5m 내외의 거대한 암벽이 자리하고 있다.

 

암벽의 하단 약 2.5m 지점에 새겨진 이 마애불은 현재 무릎 이하 부분이 결실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연화좌대를 포함한 불상의 높이는 3.2m, 어깨폭 78㎝, 두부길이 58㎝에 이르는 대형의 마애여래입상이 나오는데 제작연대는 고려시대 전반에서 중반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내려가면 남원시 수지면 그평리 골짜기에 극락사가 있었는데 이 사찰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백제 시대쯤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고 하는데 극락사가 있었던 견두산 북쪽 골짜기를 지금도 주민들은 '극락이', '극랙이'등으로 불러오고 있는데, 극락이는 '극락사'의 극락을 말하는 것으로 사찰의 이름이 골짜기 이름으로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찰이 없어진 이유가 이 사찰에 빈대가 어찌나 많은지 견딜 수 없어 사찰이 폐허가 되었다 한다. 빈대들이 방안 구석구석에 꽉 들어 박혀 불을 끄고 잘 때면 사람을 괴롭히니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한다.

 

기둥의 벌어진 틈새기, 방바닥, 벽 틈 할 것 없이 온통 빈대가 득실거리니 사찰이 아니라 빈대 소굴이 되어 빈대의 극성을 아무도 견뎌내지 못하고 하나 둘 떠나 버렸다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빈대의 극성 때문에 짖 궂은 승려가 불을 질러 절을 태워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극락이' 골짜기 부근의 바위나 자갈을 떠들어 보면 빈대껍질이나 허물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견두산 마애여래 입상>

 

도문화재인 음각된 석불상을 관람하고 되돌아와 곧이어 암벽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철쭉군락이 시작된다.

 


 


 


 


 

<철쭉지대 가는길에 뒤 돌아본 견두산>

 

14시 15분 다시 한차례 올라 이정표가 있는 계척봉에 올라 4분후 삼각점(남원24, 1991복구)이 있는 660봉을 지난다. 견두산에서부터 따라온 철쭉군락은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660봉 삼각점>
 


 

<660봉에서 본 영재봉(우측)>

 

14시 23분 구례군 산동면 산하회원일동이 2007.4.27설치한 자귀나무쉼터 표석이 있는 너른쉼터를 지난다. 지역주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등산객들을 위해 이렇게 편안하고 쾌적한 쉼터를 만들어 준데 대해 너무도 고마워 그저 황송할 뿐이다.

 

장송 숲 가운데에 위치한 쉼터는 삼림욕장 역할을 충분히 해주어 이곳을 지나가는 산객들에게 항상 쾌적한 산행을 하도록 일조 해줄 것 같다.

 


 


 

<자귀나무 쉼터>


 


 


 


 


 


 

14시 44분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봉에서 우측으로 돌려 내림을 한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온 철쭉군락은 아마 밤재에 도착할 때 까지 계속될 것 같다.


 


 


 


 

<견두산에서 부터 계속 이어지는 철쭉지대>


 


 

<도마뱀?>


 


 

14시 53분 둥그런 참호가 있고 잡목만 무성한 봉우리에 올라 좌측으로 내리 선다. 조금 내려오면 우측에 영재봉과 만복대, 반야봉들이 올려다 보이고 1분후 다시 우측으로 돌려 내림을 한다.

 





 

<삼거리봉에서 본 영재봉 및 만복대>


 

 

 

<당겨본 영재봉>



 


 

<당겨본 만복대> 

 

잠시 후 전방에 밤재터널을 향해 오르내리는 차량들의 힘겨운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고 곧이어 밤재가 눈앞에 나타난다.

 


 

 

 

<밤재로 오르는 19번 국도> 

 

15시 01분 임도가 양쪽으로 잘나있고 표석이 세워져 있는 밤재에 내리선다. 밤재는 원래 그 아래로 밤재터널이 뚫리기 전만 해도 19번국도의 역할을 했던 도로인데 터널개통으로 인하여 지금은 임도로 전락되어 버렸다.

 

밤재정상에는 구례군에서 시멘트 포장된 너른 주차장과, 등산로 안내판, 화장실 그리고 음수대등을 설치하여 등산객들에게 많은 편의 제공을 해주고 있다.



 


 

<밤재의 너른 주차장>


 








 


 


 

<밤재에는 아주 시원한 생수가 이렇게 펑펑 쏟아져 나오고....>


 


 

☞전주김의 산행정보방 http://cafe.daum.net/sjgltrs<산줄기를따라서>

 

 

 

 

▣호석(虎石)과 견두산(犬頭山)

 

◉자료(1)

 

전북 남원시 천거동 광한루원과 수지면 고평리 고정부락 마을회관 앞에는 호석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수지면 고평리에는 견두산이 높이 솟아 남원시를 바라보고 있는데 옛날에는 들개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었다.

 

이 들개들이 떼 지어 살면서 한 마리가 짖으면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짖어대므로 산이 울리고 땅이 뒤집힐 지경으로 소란하였다 한다. 이렇게 개들이 한바탕 짖어댈 때마다 남원부 중에 호환(虎患)이 있어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물려가거나, 큰 화재가 있어 많은 집과 인명을 손상시키는 괴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호환을 막기 위하여 오랫동안 고심하여 오다 원래 호두산(虎頭山)인 이 산을 견두산(犬頭山)으로 바꾸고 개는 호랑이라야 진압할 수 있는지라 부중에 호랑이를 돌로 깍아 만들어 놓으면 견두(犬頭)의 들개 짖는 소리를 막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호환을 막을 수 있다고 믿어 이 무렵 전라관찰사 이서구가 남원부사에게 명하여 호석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호석을 설치하자 과연 호환과 재난이 씻은 듯 없어졌다.

 

그런데 6.25 이후 이 호석을 광한루 경내로 옮겼더니 시내에 화재가 잦아 이를 다시 원래 자리로 환원시켜 지금의 위치에 견두산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 호석이 서있는 부근을 지금도 '호석거리'라고 부르고 있으며 수지면 고평리 고정부락 마을회관 앞 호석도 이 무렵에 마을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남원 광한루의 호석>


 


 


 


 

 

<남원 수지면 고평리의 호석>

 

 

◉자료(2)

 

남원 광한루에 가면 ‘사랑의 화신’ 춘향이보다 더 민중적인 유물 하나를 볼 수 있다. 바로 호랑이 석상이다. 오작교 앞, 완월정(玩月亭) 옆 잔디밭에 있는 호석(虎石)이 바로 그것이다.

 

이 호랑이 석상은 조선 순조 임금 때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남원의 지세를 보고 세운 것이라 한다. 이 광한루의 호랑이 석상과 똑같은 것이 남원 수지면 고정 마을에도 있는데 역시 이서구가 만든 것이라 한다.

 

이서구는 정조 18년(1794)과 순조 20년(1820) 두 번에 걸쳐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풍수에 능했다는 전설이 호남 지방에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 내려온다.

  

이서구(1754-1825)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 강산(薑山), 석모산인(席帽山人), 소완정(素玩亭), 녹천관(綠天館) 등이다.

177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지평과 교리를 거쳐 대사간,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지냈다.

박지원(1737-1805)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실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글씨와 시문에 뛰어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와 함께 사가시인(四家詩人)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문집 《강산집》, 《척재집》이 있다.

 

 

전설은 그렇다 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광한루의 호랑이 석상과 그곳에서 30리 떨어진 수지면 고정 마을에 세워진 호랑이 석상이 동일 시대에 동일인 석공 혹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 석상의 모양과 양식이 같고, 세워진 동기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왜 호랑이 석상을 세웠을까? 이는 지극히 풍수적인 원리에서 비롯된다.

호랑이를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개다. 남원 남동쪽 30리 거리에 견두산(犬頭山·개머리산·790m)이 있다. 견두산을 바라보면 실제 개처럼 생겼다. 사납고 굶주린 형상으로 구례나 곡성 쪽이 아닌 남원을 노려보는 모습이다.

 

이렇듯 험한 산세는 이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그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대비책이 필요하다. 견두산의 거센 기세를 누를 수 있는 것은 호랑이밖에 없다. 당연히 호랑이 석상을 세워 그 기운을 진압하는 ‘진압 풍수’의 논리가 개입돼 있는 것이다.

 

한편 이곳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이 산에 성질 사나운 들개들이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씩 떼지어 살면서 사람과 가축을 해쳤고, 또 이놈들이 일시에 소리를 지르면 무서운 재앙이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재앙을 막기 위해 광한루와 수지면 고정 마을에 호랑이 석상을 세워 견두산을 바라보게 했는데, 이후 들개 떼의 재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들개 떼는 짐승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들개 떼만큼 사나운 산적이나 남원 고을을 괴롭히던 무장 세력일 수도 있다. 실제 두 마리의 호랑이 석상이 마주보고 있는 견두산 정상 아래에는 백제 사찰로 추정되는 극락사가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 폐허가 되었다 한다. 사찰을 폐사지로 만든 것은 실제의 빈대가 아니라, 백성을 괴롭혔던 빈대 혹은 들개 떼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광복 전까지만 해도 남원 사람들은 호랑이 석상을 대단히 중시했다. 지금은 비록 춘향이가 ‘살고 있는’ 광한루 담장 안으로 편입되었지만 이전에는 광한루 오작교 앞에 우(牛)시장이 들어섰고, 이곳 일대를 ‘호석(虎石)거리’라 불렀다. 그만큼 호랑이 석상을 ‘춘향이’보다 중시했던 것이다.

 

또 수지면 고정 마을에 있는 호랑이 석상도 마을 사람들이 한때 대단히 중시하여 마을 회관 안에 세워놓았다. 그러나 마을의 새 회관이 다른 곳에 세워지면서 호랑이 석상 역시 구 회관 담벼락 밖 시궁창길 위로 밀려났다.

 

이렇게 광한루와 수지면의 호랑이 석상 모두 견두산의 살기를 더 이상 누를 수 없게 돼버렸다. 전통과 문화의 도시임을 내세우는 남원에서 호랑이 석상을 홀대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감이 든다. 특히 호랑이 석상을 잃어버리는 것도 시간문제일 성싶다.

 

골목에 방치된 호랑이 석상을 불량한 골동품상들이 트럭으로 밤새 실어가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장 소중히 다뤄야 할 문화유산이 너무 홀대당하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 자료인용(남원시 문화관광과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