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04년 4월 24일 ~ 25일
이동구간 : 차갓재 ~ 죽령
거 리 : 31.4㎞
참가인원 : 2명 (고산병, 산파리)
날 씨 : 양 이틀 맑음

4월 24일
05:26 생달마을 - 06:15 차갓재 - 06:29 작은차갓재 - 07:20 황장산 (1077m) - 07:30 출발 - 07:45 감투봉 - 08:00 황장재 - 08:08 985봉 - 09:07 폐백이재 - 09:25 928봉 - 09:28 조식 - 09:50 출발 - 10:05 공터 - 10:14 벌재 - 10:38 산불감시초소 - 10:42 823봉 - 10:15 1020봉 - 10:25 출발 - 10:50 문봉재 - 12:23 장구재 - 12:35 저수재 (저수령 휴게소: 중식) - 13:50 출발 - 14:20 촛대봉 - 14:35 투구봉 - 14:52 시루봉 - 15:33 배재 - 15:47 1056봉 - 16:00 싸리재 - 16:25 출발 - 16:50 1040봉 - 17:30 뱀재(헬기장)

4월 25일
07:10 기상 후 조식 - 08:08 출발 - 08:42 모시골 정상 - 09:08 묘적령 - 09:22 전망바위 - 09:36 묘적봉 - 10:03 1185봉 - 10:26 도솔봉 - 11:21 3형제봉 - 11:46 1286봉 갈림길 - 12:12 헬기장 - 12:30 죽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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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 고갯마루.
바지를 내리고 쉬야를 하다 무심코 하늘을 바라본다. 쏟아져 내리는 별들....
뭘 그리 볼 것이 많다고,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에 새치름해서 고개를 숙인다. "요 녀석들 맛좀 봐라.히히..." 하늘을 향해 힘을 준다.
시간 맞춰 도착한 봉고차를 타고 생달마을에 이르러, 등산화 끈만 고쳐 맨뒤 바로 차갓재를 향해 오른다. 이미 저번 코스에 하산하며 눈을 맞춘터라, 그 흙과 물이 익숙한데, 미명에 비치는 초록엔 "끙야"하고 힘을 낼만큼 싱그러움이 넉넉하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하게 맺힐 즈음 차갓재에 이른다. 작은 차갓재는 이곳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능선길로 10여분 가면되는데, 대간 마루금엔 이미 봄이 완연하다. 계속해서 고도를 높이니, 곧 10여미터의 수직 암릉에 다다르고, 대롱거리며 매달려 묏등바위에 올라서니,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온산 줄기 마다 내달리는 봄의 색깔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시산제에 정성을 들였던 산파리가 필시 산신령의 솜씨라 우기지만 그 냥만 미적 감각에 이런 일을 해내실리 만무일테고, 연초록 색깔에 음영의 깊이로 볼 때 분명 숲속 요정의 마법이라 결론을 짓는다.
황장산을 거쳐 벌재에 이르기까지 봄과 우리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한다. 가파른 내리막을 통해 벌재의 포장도로를 지나, 맞은편 산등성이 잠입에 성공하지만 이어진 오르막엔 흙먼지가 가로막는다. 대간 마루금엔 거저 주는 내리막도, 봉우리도 없다. 내리막 뒤엔 반드시 그에 상응한 오르막을 만나게 되고, 그 오르막을 통해서만 봉우리와 만날 수 있으니, 이는 자연의 섭리일 것이나, 한발, 한발 내딛는 대간꾼에겐 그저 가혹할 뿐 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 속에 마루금은 차차 고도를 높이고 있었고, 완연했던 봄 기운도 서서히 고도에 밀려 우리 뒤로 쳐지고 있다. 아직도 콧등이 시린 바람은 고도 1000m를 전후로 봄과 겨울의 금을 뚜렷히 그었고, 알몸의 나무와 새순의 산이 그렇게 두 계절의 멋진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봄으로 시작해 문봉재에서 겨울을 만났던 우리는 낙엽송 군락이 있는 장구재에서 다시 봄을 만난다. 온몸으로 봄을 담아 도착한 저수재는 우리의 중간 식량 보급소 및 점심식사 장소다. 봄기운에 나른해진 우리는 휴게소에서 매식(買食)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이 쥔집 아줌마의 요리 솜씨와 기가 막히다. 특히, 도라지를 이용한 사이비 더덕구이가 일미로서, 깜박 속은 고산병은 산파리와 짐 배분을 타이틀로 내기를 했다가 오후 내내 만유인력에 충실한 배낭무게에 시달려야 했다.
저수령 휴게소 뒤편의 촛대봉 오름길은 배와 배낭의 무게로 더 가파르다. 철쭉 군락지의 꽃망울은 봄기운을 잔뜩 머금어 빵빵하게 부풀었는데, 흡사 몸매 좋은 윤락가 아가씨들 호객행위 하듯 배낭과 몸을 채고, 잡아당겨 맘 같아선 그대로 주저앉고 싶다.
소백산에 근접해 갈수록 산등성이들이 한번씩 솟구치기 시작한다. 그럴 적 마다 산은 높이를 더해가고, 계절은 다시 겨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지나온 길 그 흔했던 만개한 진달래도 촛대봉 너머부터는 봉오리로 바뀌고, 투구봉과 시루봉 내내 칼바람에 코가 시리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1박 예정지인 뱀재에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고, 그 여유는 싸리재의 긴 휴식으로 이어진다. 고산병과 산파리는 모두 시골놈들이다. 어렸을 적 뛰어놀며 귀동냥한 풀과 나물 이름 몇 가지와 그 즈음 보았던 원색 자연도감 몇줄이 아는 풀꽃이름의 전부인 셈이다. 이런 선무당 둘이서 진달래와 철쭉 구별법을 빌미로 설전이 붙었는데, 누가 들을까 겁나는 아님말구식 식물이름 폭로전이 잠시 전개된다. 이제사 말하지만 그날 산파리에게 말한 풀이름들의 정확성은 그야말로 50대 50이다. 산파리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뱀재 인근 송전탑에서 흐르는 고압 전류 소리는 음산하기 그지 없다. 서둘러 지나가지만 왠지 고압선이 갑자기 끊어지면서 고산병 똥꼬에 침을 놓을 것 같아 어느새 종종 걸음이 되어 줄행랑친다. 완만한 경사면 끄트머리....우리의 일박지인 뱀재에 도착한다.
젖은 옷과 양말을 갈아 입고, 잠자리를 마련한 다음 잠시 누워 하늘을 본다. 참 오랜만이다. 왜 구름 한점 없냐고 투덜대던 산파리 녀석도 조용하다. 일순 찾아오는 묘한 평화로움에 잠시 허부적거리고, 박두진 할아버지 시에 서유석 아저씨가 곡을 붙여서, 양희은 아줌마가 부른 하늘이란 노래의 허밍이 고산병의 코로 새어나온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노래만으로는 살 수 없다. 우리에겐 아직 먹어야 할 불고기와 소주가 있다. 주거니 받거니 잔이 도는 사이 산파리와 고산병은 늘 그랬듯 황홀하다. 눈물나게 흥겹다. 그 즐거움을 보시하기 위해 오늘도 전화버튼을 누르니, 이 어찌 훈훈한 이웃 사랑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밤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새벽녘에 아랫배가 묵직해서 눈을 뜬 고산은 "악"하고 그만 소리를 지를뻔 했다.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의 일기장에나 있을 법한 그런 별들이 밤새 우리의 천장이 되어 초롱거리고 있었던 게다. 잠시 비닐을 걷고 별빛욕을 즐긴다.

머리를 쪼갤 것 같은 햇빛이 밀려와서야 잠자리를 정리한다. 아침식사는 남아 있지도 않은 숙취를 제거하기 위해 북어국을 먹었다. 일박을 위해 챙겼던 마실물과 먹거리를 처치한터라 몸도 마음도, 배낭도 가볍다. 완만한 오름길은 모시골과 묘적령을 넘어서면서부터 급경사로 바뀌는데, 쌀쌀한 날씨에도 땀이 비오듯 하고, 입은 연신 수통 빨대에 붙인 채 음료를 빨아올리고 있다. 묘적봉 진달래 너머 이번 구간의 최고봉인 도솔봉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기운이 소백산과 견주어 못하지 않겠다.
급경사 오르막과 고무로프로 제작된 계단을 거쳐 올라선 도솔봉엔 한겨울 강풍이 들이 닥쳐 대간꾼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구름 한점 없는 날씨에 사방의 조망까지,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강풍에 밀려 한발, 한발 죽령을 향한 내리막으로 들어설 수 밖에 없었다. 아쉬운 맘에 정상 아래 안부에 자리를 펴고 마지막 남은 행동식을 모조리 처리한다.
도솔봉에서 내려서면서 우리는 이미 오늘 산행을 마무리짓고 있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 대간 마루금은 그리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고산병이 정상에 나무 3그루(대략)쯤 있어 뵈는 봉우리를 가리켜 "조기 삼형제봉이네이-"하고 농담하며 킥킥거리는 사이, 대간은 우리에게 그 보다 3배는 높을 것 같은 봉우리 30개는 더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삼형제봉은 형제는 셋이었지만, 스물 일곱의 자매를 둔 풍족하고 빡신 가족이었던 것이다.
대간 마루금은 죽령 전 마지막 고지인 1286봉에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갈라선다. 내리막길 내내 산죽이 군락을 이루어 바람에 사각거렸는데, 충분히 계절을 잊을 만큼 상쾌하다. 고산병이 좋아하는 경사의 내리막이 이어지고, 이에 흥이 난 고산병은 멧돼지처럼 뛰기 시작한다. 차창 밖으로 사물이 지나가 듯 겨울의 나무와 풀이 휙휙하고 사라지고, 1300에 이르던 고도가 어느새 700에도 미치지 못할 즈음 낙엽송 숲을 거쳐 죽령의 봄과 만나게 된다.
잠시 뒤 내리막에서 시원하게 똥을 누고 왔다는 산파리 녀석이 가지런한 치아가 다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내려서고 있다. 그 미소에 그만 내가 똥 눈 것보다 더 개운함을 느끼는 걸 보면 녀석도 어쩌면 요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산행 마무리는 각종 잡지에 맛으로 이름을 날린, 딸이 풍기 인삼아가씨 진으로 당선된 미모로서도 빠지지 않는 죽령 정상의 음식점에서, 한 중년의 불륜 커플과 동동주에 비빔밥을 먹으며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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