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서 한참을 달콤하게 자는데 산행준비를 하란다. 4시40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이화령을 출발한다. 계단을 따라 잠시 오르다 보면 능선에 다다른다. 달이 운무에 가려져 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능선에는 몇개의 헬기장이 산불을 용이하게 진화하기 위해서 자리 잡고 있었다. 날씨는 바람도 없이 포근하여 걷기엔 아주 적당하다. 수북이 쌓인 낙엽은 밟을 때 마다 빠작빠작 소리를 내고 있으며 저 건너편에는 앞으로 지나야할 능선이 희미한 달빛에 길게 늘어져 있다.

뒷사람을 위해 표시기를 달고 앞으로 가다 보니 희미한 갈림길에서 7~8명의 인원이 능선 옆사면으로 가고 있었다. 잠시 후면 만나겠거니 하고 올라가다보니 합류지점이 보이질 않는다. 아차 싶어 뒤돌아서서 소리쳐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다. 할 수 없이 앞으로 뛰어가 확인해보는 수밖에 달리 묘책이 없었다. 황악산을 넘어서 조금 내려오다 보면 좌측에 억새밭이 있는데 억새는 없고 몇 그루의 낙엽송만 듬성듬성 서있다. 그곳이 갈림길이 만나는 곳이다. 백두대간을 한다면 반드시 주능선을 타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인정을 안 한다는 농을 자주하곤 한다. 하지만 어쩌랴 벌써 보이지 않을 만큼 저만치 앞서간 것을....

벌써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고 바위지대를 조심스레 통과한 후 비탈길을 올라서면 헬기장이 있다. 그 위가 바로 백화산(1,063m)이다.(7시14분) 그리고 이곳은 방향이 서쪽으로 완전히 꺾기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적당한 안부에서 아침을 먹는다. 몇몇 분의 식단을 보면 보온밥통에 따뜻한 밥과 각양각색의 반찬... 피자 한 조각, 후식으로 각종과일... 그리고 따끈한 커피까지... 완전히 한상 가득하다. 어차피 오늘 집으로 가지 않고 민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도 없다.

9시 사다리재 도착. 여기까지는 제법 능선이 완만하며, 지나오는 동안 중간 중간 갈림길이 나오는데 아무생각 없이 땅만 처다 보고 가다간 샛길로 빠져서 엉뚱한 곳으로 갈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실제로 한분이 흰두뫼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두시간여 만에 다시 돌아온 경우도 있다. 사다리 재에서 곰틀봉까지는 경사가 가파르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 숨소리가 예사롭지 않으며 인상 또한 거의 조폭에 가깝다.

9시46분 한참을 낑낑대고 올라서니 이만봉(989m)이다. 날씨가 희뿌연 것이 별로 좋지는 않으나 멀리 우리가 아침에 지나온 능선이 손만 뻗치면 닿을듯하다. 이곳은 갈림길이 있는데 좌측으로는 희야산성 방향이며 우측으로 가야 대간능선이다. 아직도 음지에는 눈이 남아 있으며 낙엽에 숨어 있는 얼음은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하지만 양지에는 얼음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물기를 볼 수 있다. 이미 대지 속에서는 봄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10시43분 능선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오면 안부인 배너미평전에 도착한다. 이곳은 평평한 지대이기 때문에 야영하기에는 그만이다. 그리고 옆 계곡에는 작은 개울이 있어서 식수를 보충 할 수도 있다. 888m 봉우리에 올라서면 희양산이 정면에 보인다. 그러나 바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갔다가 올라야하니 사람들의 입에서 고운소리가 나올리 만무하다. 가끔은 평탄한 길도 있어야 걷는 맛도 나지.... 이건 죽기 살기로 올라서면 앞에는 더 큰봉이 턱 버티고 있으며, 그것도 반드시 내려갔다가 가야지 그냥 가는 법이 없다. 그러니 맥이 풀릴 수밖에...

은티 마을로 가는 성터 갈림길을 지나 희양산 8부 능선에 도달하면 지름티재로 내려가는 세미클라이밍 지대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곳에 밧줄이 매어져 있어서 지름티재에서 올라오기가 수월했는데, 산행객들이 이곳에서 너무 시끄럽게 다니는 바람에 수행에 방해된다 하여 스님들이 모두 끊어 버렸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왠지 아쉽기도 하다. 갈림길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희양산을 향해 올라간다. 물론 일행들에겐 조용히 가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바 있다.

11시58분 희양산 도착. 이곳은 육중한 바위산으로 주변둘레가 모두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마당바위에서 멀리 내다보면 아담한 봉암사 절이 선명하게 보이고 또 우리가 가야할 구왕봉이 건너편에서 손짓하고 있다. 이곳에 잠시 걸터앉아 시름을 잊고 있노라면 왜그리 마음이 홀가분하고 편안한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대장은 미리 지름티재로 올라와서 중간까지 몇개의 자일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자일을 중간지점까지 연결시키고 일행들을 조심스레 유도하면서 내려갔다. 이곳이 음지이기 때문에 아직도 얼음이 있으며 내리막길이라 자일 없이는 대단히 위험하다.

1시8분 지름티재에서 간식을 먹고 다시 구왕봉을 향해 올라간다. 워낙 직벽이라 한발 한발 옮기는 것이 여간 쉽지가 않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발은 미끄럽고.... 다행히 뒤를 돌아보면 하얀 뱃살을 불룩 들어낸 희양산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는다. 1시54분 구왕봉을 통과하여 나는 듯이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오늘 제일 힘든 곳을 지났기 때문에 발걸음도 가볍고 저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2시28분 능선위에 묘가 한기 있는데 오른쪽에 표시기가 여러개 달려 있다. 그래서 이곳이 은치재인줄 알고 은티마을로 하산을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앞의 봉우리(주치봉:683m) 한개를 더 넘어야 했다. 하지만 내일은 거리도 짧고 오늘보다 난이도가 낮기 때문에 아쉬울 건 없다. 임도를 따라 은티 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3시20분이었다. 총산행시간 10시간40분.

민박집 앞에서 삼겹살에 곡차 한잔을 하니 이 세상 근심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잠시 후 땀을 씻어내기 위한 문경 온천욕..... 그리고 또다시 토종닭 백숙..... 배가 불뚝불뚝..... 여기에 더덕주를 곁들여서 ‘먹새 그려 먹새 그려 수놓고 가지꺽어 놓고 무진장 먹새 그려~’ 머리가 빙글빙글..... 온몸이 나른....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간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3-04 1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