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산 산행기

 

출발시각인 7시가 거의 다 되어 출발장소인 교대역에 당도하니 법원 건너편 도로 한편에 대형 관광버스가 마치 출동을 기다리는 경찰버스처럼 즐비하게 서 있었다. 일을 하다 급히 출발장소로 나가느라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는 광화문에는 훨씬 많은 버스들이 서 있었다고 했다.

 

4월 초순의 막바지 세상은 봄기운이 번지고 있다. 봄은 연한 녹색을 띠고 피어나는 나뭇가지에서 가장 뚜렷이 느끼게 된다. 바삐 오가는 일상의 도시 가로에서 담장 밖으로 보이는 나무나 담장에 걸쳐 앉듯 자라는 진달래 개나리 등이 피어나는 모습을 대하며 마음에 덩달아 봄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도시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봄이 아닌 대자연의 품에서 봄을 느끼고 싶어 하고 그러한 순간을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기도 하는데, 오늘 수많은 버스에 몸을 싣고 도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 마음 모두 그런 심정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했다.

 

이번 달 정기 산행지는 영월과 단양에 걸쳐진 태화산으로서 그 앞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강원도 높고 험준한 산기슭에서 발원해 정선, 영월, 단양, 제천, 여주 인근을 지나고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서해로 빠져나간다. 한강은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그 강은 입지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한북정맥의 기세로 이루어진 북한산 등과 조화되어 산수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서울의 힘은 곳 산줄기 물줄기가 가장 잘 어우러진 큰 장소라는데 있다. 그런데 오늘 가는 남한강 상류는 번화한 도시 속을 관통하는 그 강물들이 산바람 들바람, 꽃 이야기들과 어울러 자연의 본래 성품대로 흘러온 곳을 목격하는 나들이 길이 되기도 한다.

 

오늘 가는 태화산은 영월군과 단양군의 경계지점에 있는데 그 동쪽으로 남한강이 흐른다. 영월에 있는 청령포도 남한강 줄기에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우리 역사상 가장 슬프게 다가오는 단종의 유배지였던 곳인데 전에 서울에서부터 그의 유배길을 따라 찾아온 적이 있다. 영월군청 앞에서 동서에서 흘러든 동강, 서강이 합류하여 본격적인 남한강 물줄기가 된다. 태화산에서 느낄 수 있는 풍치의 아름다움은 남한강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이번 산행은 산을 찾아간 다기 보다 그 남한강을 탐사하는 기분이 더 든다.

 

올해는 깨어나는 봄의 약동이 더 특별히 느껴진다. 사무실 작은 마당과 옥상에 심어 놓은 나무들이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동해(凍害)를 입어 생사의 기로에 선 모습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문 마당의 감나무는 죽었는지 말라비틀어진 모습이다. 옥상의 백일홍도 죽어 아주 뽑아내버렸고 사무실을 옮기며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려는 심정을 갖고 작은 화단을 만들어 심었던 홍매화도 죽은 갖지가 많아 앙상해진 모습이다. 가지가 모두 튼튼한 상태에서 꽃을 피운 작년과 재작년에는 꽃이 피어날 때 주변 공간이 모두 화사하게 느껴졌었는데 올해는 겨우 생명이 살아 있음만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여름에는 물을 주고 가꾸었지만 겨울에는 나 스스로 위에 움츠린 채 그 나무들이 추위 속에 생사의 기로에 선 것을 미처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10시 40분 태화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남뽁 방향으로 올려 보이는 산세의 모습은 평이했는데 거기서 태화선 정상은 보이지 않는 곳이다. 다른 등산객 몇 명이 앞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영월을 지나오면서 보았던 강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오늘 산행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마루 능선을 가면서 옆에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는 것이다.

 

일행은 빙 둘러서서 몸을 풀기 위해 준비 운동을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잠시 도로를 따라 걷다 좌측으로 몇 채의 집이 있는 마을 어귀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 입구서부터 계속 오름길이 이어졌다. 오늘 오르는 태화산 정상이 1027m 이니 한참을 올라야 될 것 같았다. 우측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 주변에 아직도 군데군데 얼어붙은 눈 조각이 보였다.

 

오르고 있는 등산로가 북사면이어서 그런지 나무들이 한겨울의 까칠한 모습 그대로였다. 주변에 보이는 숲은 겨울의 칙칙함을 털어내고 이제 막 봄기운이 깨어나는 분위기이다. 남녘에는 이제 잎이 무성히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서울의 도봉산에도 진달래가 피었다는데 이곳에서는 생강나무와 버들강아지 그리고 들풀 등만 피어난 모습이었다.

 

이득우 건축사가 맨 앞에서 빠르게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뒤따른 일행의 발걸음도 덩달아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일행이 출발한 지점이 저 아래에 보였다. 그리고 일행이 경사길 에 죽 늘어서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잎이 돋아나지 않은 가운데 일행의 활기찬 모습과 나름대로 맵시 있게 차려 입은 복장들이 더 명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다보니 뒤에서 천천히 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앞쪽 일행이 이정표 옆에서 멈춰 쉬었다. 그리고 후미를 기다리면서 그 이정표 옆에서 뒤 산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뒤에 오던 일행이 도착해 함께 쉬다 다시 출발해 올라갔다. 능성 이까지 한참동안 그렇게 올라가는 코스였다.

 

오름길이 길어 땀이 흘렀다. 한낮이 되며 기온도 더 높아져 있었다. 한참을 올라 일행이 숨을 고르며 다시 쉬었다. 거기서 위쪽으로 보이는 능성이 너머 하늘이 더 가까이 트여 보였다. 그 능선에 오르면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게 될 것 같았다.

 

다시 올라 능선에 닿았다. 그 곳에 세워 놓은 이정표에 좌측으로 태화산성이 150m 거리로 쓰여 있었다. 지도를 펼쳐보니 옆으로 강이 흐르고 있어 조망이 좋을 것 같았다. 서둘러 올라가다 보니 산성에 얽힌 이야기가 표지판에 쓰여 있었다. 옛날 아들과 딸을 둔 어머니가 아들에게는 태화산 건너편의 계족산성을 쌓게 하고 딸에게는 태화산성을 쌓게 했다. 그런데 딸이 흙으로 쌓는 태화산성이 먼저 완성되려 하자 어머니가 딸 몰래 성을 허물어버렸는데 그 때 딸이 흙더미에 깔려 주었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였다.

 

산성에 올라 남한강쪽으로 다가가니 예상대로 주변 풍광이 시원스레 조망되었다. 맞은편의 계족산과 올라선 태화산 사이로 남한강의 흐르고 그 상류방향으로 영월 시내도 보였다. 강 건너에는 지나면서 보았던 영월의 천연가스 발전소도 보였다.

 

이 지역의 강은 어라연처럼 유독 물길이 크게 휘감기는 곳이 많다. 단종을 유배했던 청령포도 그런 곳이다. 전에 그 유배길 을 답사하던 날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청령포 안으로 들어가니 그 곳은 삼면을 강이 휘감고 있고 뒤로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감옥이었다. 절벽은 한 양쪽으로 시선이 향하는 방향인데 단종은 가끔 그곳에 올라 한 양쪽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청령포는 서강의 끝 지점에 가까이 있는데 서강의 최상류는 대관령이며 영월군 서면에서 다시 평창강이 북에서 남쪽 방향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동강처럼 굽이굽이 깊은 산간지대의 계곡을 흐르고 있다. 상류 주변은 전부 깊은 산악지대여서 흘러도 흘러도 그 산중을 맴돌아 흐르는 듯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동강의 물줄기 또한 마치 산봉우리들을 붙들고 매달이듯 급히 휘감아 흐른다. 동강은 영월에서 정선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영월에서 정선족으로 조금 상류에 명승지로 유명한 어라연이 있다. 그 강은 정선 공설운동장에서 소금강과 합류되고 그 북쪽 여랑면 아우라지에서 다시 동북쪽 구미계곡을 지나온 물과 합류한다. 영월을 흐르는 강물은 그처럼 심원의 산지로부터 산세와만 침묵의 대화를 하며 흘러든 물줄기이다.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검룡소는 정확히 말하면 남한강의 발원지이고 북한강의 발원지는 금강산 옥밭봉이다.

 

스케치를 하는 동안 일행들이 속속 도착해 조망을 반기며 사진을 찍었다. 너른 산세와 물줄기가 어우러진 모습을 빠른 시간에 스케치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어디서든 늘 스케치를 하는 편이지만 그 부담감은 늘 갖게 된다.

 

스케치를 마치고 뒤돌아서 갈림길로 가니 일행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일행은 태화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앞에 보이던 봉우리를 넘다 보니 헬기장이 훤칠하게 나타났다. 새로 휜 페인트를 칠해 놓아 선명하고 정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장소가 넓어서인지 편안하게 느껴졌다. 달아오른 햇살이 봄기운을 더 가득 고이게 했다. 일행은 그 기운에 취한 때문인지 거기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당초에는 태화선 정상으로 가서 먹을 예정이었다.

 

일행 모두 북사면을 한참 오르느라 시장했던지 모두 마음이 동해 자리를 폈다. 그리고 각자 적당한 자리를 잡고 갖고 온 음식들을 자리에 올려놓고 점심을 먹었다. 막걸리잔 을 나눠 들고 건배를 하고 음식들도 서로 권하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냈다. 인원이 많아 두 곳으로 나뉘어 앉았는데 내가 앉은 곳은 옆으로 길게 마주보며 앉았고 다른 팀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았다.

 

마주 앉은 관악의 강명원 건축사는 족발을 푸짐하게 내 놓았다. 밥은 따로 준비한 것이 없고 그것을 점심으로 준비해온 것 같은데 다 나눠 먹었다. 저쪽 자리에 앉은 안치규 건축사가 라면이 다 끓었다고 하자 일행들이 그리로 가서 한 젓갈씩 맛을 보고 왔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태화산을 향해 걸었다. 좌측으로 계속 강줄기가 지나가는 모습이 내려 보였다. 오늘 코스는 그 남한강 강줄기를 따라 능선 길을 걷게 되어 있었는데 산행을 하며 남한강 상류의 표정을 생생히 대하게 되었다. 한국의 강들이 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발원해 휘돌고 에두르며 사람들의 삶터에 젓줄기도 되고 또 지나다 접하는 삶터의 애환이나 그 강에 투영된 산세의 모습과 어우러지며 우리나라 산수(山水) 특유의 체취를 띠어 보인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남한강은 가장 깊고 험준한 산세 틈을 굽이쳐 흐르면서 온갖 풍상속세 그 모습을 갖추게 된 유장한 강이다.

 

남한강은 강줄기 산줄기가 본래 태생의 모습으로 치렁하게 어우러진 모습이어서 언제나 강의 본연의 체취를 간직하고 잇을 듯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 내려보이는 풍광처럼 산수의 조화로운 멋을 풍긴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시원의 풍광 속에 군데군데 어우러진 몇 채의 집도 보였다. 이러한 입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의 태도나 마음이 퍽 순박하고 평화로울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전등불이 없던 시절 살았던 집에서도 그런 자연과 밀착된 삶을 살았었다. 맑은 날 해가 지고 사방이 모두 어둠에 묻혔을 때 밤하늘에 쏟아질 듯 한 별들이 보였다. 그리고 앞 산 쪽 개울에서 고기를 잡기도 했다. 그 시절과 내가 지금 살아가는 환경에서 느끼지는 정서는 너무도 다르다. 내가 머물러온 공간은 문명의 이기가 극대화되는 상황으로 변해왔고 나 스스로 그러한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적응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면서 세월이 흘렀다.

 

한참 가다보니 소나무 가지가 강 쪽으로 비스듬히 눕듯이 뻗쳐진 장소가 나왔다. 나무위로 오르니 강의 체취가 더 생생히 느껴졌다. 오늘 사진기를 갖고 가지 않아서 그 모습을 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뒤에 오는 박기현 전회장의 카메라를 빌려 몇 컷 찍은 다음 나중에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다시 가다보니 다시 좋은 조망 장소가 나타났다. 옆에 세워진 표지에 조망장소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다시 스케치를 하고 출발해 잠시 후 태화산 정상에 닿았다. 일행이 정상석 옆에서 각자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거기서는 지나오면서 보았던 것 같은 훤칠한 조망은 없었다. 모두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능선을 종주하여 시작지점의 반대편에 위치한 북벽교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코스이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가다보니 다른 팀 일행들이 올라오면서 벌써 하산하느냐고 했다. 완만한 내림길을 가는 도중 다시 군데군데서 강과 어우러진 풍광이 나타났다.

 

평평한 길을 지나가다보니 바닥에 다른 팀에서 일행을 위해 길 표시를 해 놓은 것이 눈에 띠었다. 하지만 지도상에 나타난 우리 일행의 산행 코스는 바로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그곳을 지나 가다보니 절벽 끝에 선 것처럼 아래쪽에 S자로 크게 휘돌아가는 강줄기가 시원스레 펼쳐보였다. 거기서 뒤의 일행을 기다리며 짐시 쉬었다.

 

그 풍광이 훤출했다. 다시 절벽 아래 경관을 보며 스케치를 했다. 절벽 아래 강이 흐르고 그 절벽 위로 다시 아스라이 산세가 펼쳐 보였다. 그 앞으로 먼 방향에 소백산이 있다. 배화산에서 8시 방향으로 조금 멀리 월악산이 있다. 월악산을 벗어나면 폭이 넓어진 남한강 물줄기는 훨씬 활달한 모습을 띠게 된다. 중앙 고속도로가 나기 전까지는 이쪽 지역으로 오려면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고 지금보다 훨씬 더 깊게 느껴졌었다. 하기야 지금도 중앙고속도로 동쪽의 동해까지의 내륙은 모두 고원산간지대이고 깊은 산지의 삶의 모습도 여전하다. 그 런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입지의 느낌대로 심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험준하고 고절한 환경에서 형성된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옆 일행이 뒤에 오는 일행에게 연락을 하니 아까 지나며 보았던 다른 일행의 길 표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하산 지점이 그리 멀지 않아 어차피 잠시 후 만나게 될 것 같았다. 다시 길을 나서 급하게 경사진 길을 내려갔다. 잠시 후 길이 조금 완만해진 능선 길을 걷다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갔다.

 

경사가 급한 곳에 길이 이리저리 길게 에둘러 나 있었다. 좌측으로 가다 다시 우측 방향으로 가다보니 강 건너에 멋진 풍경이 펼쳐 보였다. 함께 내려가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풍광을 찬탄하며 휴대폰 등으로 사진을 찍었다. 거기서 잠시 멈춰 스케치를 하고 뒤따라갔다.

 

주차장에 닿으니 버스가 보였다. 입구에 주변에 대해 설명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바라보이던 절벽이 북벽이었다. 알고 보니 그 곳은 충북의 명승지로 꼽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바로 건너 보이는 남한강에 면한 깍아지른 듯 한 절벽을 말하는데 그 석벽위에 봄의 철쭉과 가을의 단풍 풍광이 절경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북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이름이 응암인데 매가 비상하는 모습이어서 그리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내용을 알고 보니 내려올 때 모두 풍광에 반해 사진을 찍고 했던 것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인근에서 6,25 전쟁 때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내력도 설명되어 있었다. 북벽교에서 500m 떨어진 지점의 마을에 1951년 1월 20일 미군의 오폭으로 360명이 집단으로 희생된 곳이라는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차에 오르니 다른 일행들이 와 있지 않았다. 전화로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일행이 잇는 곳으로 이동했다. 버스가 영월 쪽으로 가다보니 길가에 모여 있는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일행이 모두 타고 함께 운전기사가 안내하는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그가 점심을 먹었는데 음식이 맛있었다고 했다.

 

다시 북벽 방향으로 되돌아 북벽교 인근의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곱창전골, 버섯전골 등의 이미 주문한 메뉴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식당 창밖으로 다시 북벽의 풍광이 펼쳐 보였다. 그러고 보니 식당을 잘 선택한 것 같았다. 모두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모두 맛있다고 했다. 식사도중 김의중 회장이 전임 이종호 회장과 박기호 재무에게 공로패를 전달했다.

 

소주와 맥주로 조재한 폭탄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전에 백두대간 종주때 산행을 마치고 식사를 하기전 그렇게 한잔 마시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혼자 낙동정맥을 할 때는 거의 술ㅇㄹ 마시지 않았다.

 

조금 일찍 먹고 창으로 내다보이는 북벽 풍경을 그렸다. 다시 번져오는 봄기운을 맞으며 살아 잇는 강의 체취가 오롯이 느껴진 날이었다.

(2011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