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짜 : 2010년 4월 11일(일요일)

* 날      씨 : 맑음

* 산 행  지 : 춘천(화천) 용화산

* 산행거리 : 약 10km

* 산행시간 : 약 6시간 반(09:30 - 15:52)

* 산행속도 : 천천히 여유있게

* 산행인원 : 5명(시인마뇽, 범솥말님, 성봉현님, 조부근님, 그리고 저)

* 산행코스 : 배후령 - 사여령 - 고탄령 - 830봉 - 2008년 사고지점 - 정상 - 큰고개

 

1. 산행동기

지난 일요일 춘천(화천) 용화산을 올랐습니다. 매주 가는 산인지라 커다란 동기야 있겠습니까만은 이번은 조금 달랏습니다. 용화산은 친우인 시인마뇽이 2008년 10월 24일 이 산 주능선상의 암릉을 오르다가 실족하여 크게 다쳤던 곳인데, 당사자가 현장을 다시 방문하여 사고를 재구성해보고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며 차후 유사한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지혜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가 계획하였고 그를 알고 있는 산우 네 사람도 그곳을 답사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마음이 있던 차에 동반 산행하게 된 것입니다.

 

당사자가 현장을 다시 방문하여 무사히 그곳을 통과하는 데에는 사고를 겪은 사실 때문에 생긴 공포심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위험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 위험에 안전하게 대처하며 무사히 통과하여 마음속의 공포를 극복하는 행위가 꼭 필요하기도 할 것입니다.

 

공포를 억누르고 한번 실패했던 위험지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시인마뇽이 마침내 그 용기를 내게 되었고 네 사람이 만에 하나 어려울 때에 돕기 위해 동행하였고 위험지역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그날 산행을 GPS로 기록했다가 주요지점과 트랙을 구글어스로 본 것들입니다.. 평면도와 동, 서, 남, 북, 네 방향에서 기울여 본 이미지입니다. 간단한 지도도 한 장 첨부하였습니다.

  

  

  

  

  

  

  

2. 산꾼들 - 무림의 고수들

아침 6시 40분쯤 동서울 터미널에서 5인이 모였습니다. 먼저 범솥말, 성봉현, 조부근, 세분이 와 계셨고 시인과 제가 합류하여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세 분은 제가 처음 뵙게 되었고 제게는 영광이었습니다. 세 분 모두 산에 부지런히 오르는 분들로 대간은 물론 정맥과 지맥, 단맥 등을 이어가며 부지런히 산행할 뿐 아니라 산행기록을 충실하게 남기는 분들입니다. 그저 가끔 자주 가는 카페와 블로그에 산행기랍시고 끄적거리는 하수인 제게는, 시인마뇽까지 네 분 모두 산의 고수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림의 고수 세 분이 시인마뇽의 극복산행을 지켜보고 돕기 위해 오셨고 거기에 곁다리로 제가 낀 셈이 된 것입니다. 이 넘이 한 수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한 셈입니다.

 

저를 제외한 네분이 만나게 된 인연도 재미있는데, 각자 열심히 나홀로 산행을 하다가 우연히 산길에서 만나게 되고 한국의 산하 산행기를 통하여 서로의 산행을 확인하며 가끔 어울려서 산행을 하는 사이라고 합니다. 언감생심 제가 낄 자리는 아니지만 시인마뇽의 친구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그날 여러 가지 많이 배웠기에 감사드립니다.)

 

3. 산행의 대강 줄거리

산행준비와 기념촬영을 하느라 4차선 차도가 지나가는 배후령에서 20분 가량을 보내고 9시반경 임도와 평행으로 북쪽을 향해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이 불고 약간은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씨였으나 조금 걸어가니 몸에서 나는 열로 인해 추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용화산의 큰 줄기(주능선)을 걷는 산행인데 고도를 비교적 서서히 높여가는 길인지라 힘들 것이 별로 없는 산행이었습니다. 시인마뇽은 스틱을 양손에 쥐고 안정된 자세로 차분하게 산행에 임하였습니다. 현장을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약간은 긴장했을 것입니다.

 

크게 서두를 필요가 없는 산행인지라 쉬엄쉬엄 가느라 저희들은 보통 사람들의 주행속도보다는 조금 늦게 산행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대개의 시간을 묵묵히 걸으며 여느 때처럼 산이 주는 감흥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늘은 맑고 산친구들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정원을 걷듯이 산길을 걷습니다. 꿈속에 나타나는 평화로운 풍경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만든다 하였으니.....'

  

'그런데, 하이맛 너 고향은 언제 떠났지? 그래서 마이 행복했니?'

돌처럼 완고한 이 넘의 마음을 녹이고자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산이 마련해 주는 자문자답의 마당이겠지요.

 

점심식사는 정상을 앞에 둔 삼거리 안부에서 자리를 잡고 둘러 앉아 느긋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범솥말님의 가정식 반찬들이 돋보였습니다.

 

정상 직전에 만난 바위길이 약간은 험하였으나 그런대로 진행할 수 있었고, 오후 2시 12분경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상에는 2층으로 된 돌기단위에 龍華山 878.3m 라고 새겨진 네모난 정상석이 서 있었는데 최근에 건립한 듯 돌들이 아주 새 것으로 보였습니다.

 

정상에서는 멀리 보이는 경치를 감상하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조금 지체하였습니다. 시인마뇽은 정상에서 북쪽으로 산줄기를 따라 두 시간 정도 진행하면 파로호 나루터가 나오므로, 이왕 온 김에 거기까지 가서 배를 타자고 하며, 선착장으로 알던 곳으로 전화를 했으나 배의 운행여부와 출항시각도 알 수가 없었기에, 가까운 큰고개로 하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큰고개로 내려가기 전에 막다른 길로 남쪽으로 조금 내려 갔는데, 거기는 바위로 된 절벽 위에서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였습니다. 바위위에서 촬영도 하고 앞으로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하며 잠시 호연지기를 맛 볼 수 있었습니다.

 

전망대길에서 다시 돌아와 큰고개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거쳐 서쪽을 향했습니다. 이 부근도 경치가 아주 좋았는데 용화산의 전면을 장식하는 바위들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포인트들이 죽 연결되는 길이었습니다. 범솥말님이 바위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해 주셔서 더욱 재미있게 용화산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바위들 중의 하나인 ‘주전자부리’ 바위에 얽힌 전설입니다. 옛날 비가 오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이 주전자부리처럼 허공을 향해 튀어나온 바위에 돼지피를 뿌려서 산신령을 자극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산신령은 피가 묻어 불결하게 된 바위 표면을 비를 내려 깨끗하게 씻었다고 합니다. 보통의 기우제가 신신령에게 무조건하고 비는 것이라면 이 바위의 경우에서 보는 기우제는 산신령에게 비를 뿌리지 않으면 안되는 구체적인 이유를 만들어 주는 진일보한 형태의 기우제라는 설명을 범솥말님에게서 들었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니 바위와 소나무와 절벽이 어울어진 멋진 장소가 나타났습니다. 그날 산행의 클라이막스인 듯 했습니다. 여기에서 쉬면서, 남쪽으로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거나 약간 동쪽으로 암봉들을 배경으로 증명사진들을 찍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아예 퍼질러서 록클라이밍 때 하강하는 방법을 로프를 가지고 실습할 수 있었습니다. 조만간 그 기술을 낙남정맥에서 써먹어야 할 학생은 시인마뇽이었고 암벽등반에 능한 성봉현님이 훌륭한 교사이자 조교가 되어 주셨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눈과 마음으로 동참하는 청강생이었습니다.

 

소나무 가지에 줄을 걸어서 내리고 내려온 두 가닥의 자일을 하강기에 걸어서 실습할 수 있었습니다. 8자형 하강기를 줄에 결합하기 전에 몸에 하네스를 두르는 방법과 카라비너를 사용한 확보방법에도 교사의 시범과 학생의 실습이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있는 경치를 뒤로 하고 내려가다 보니 얼마 안되어 오늘의 산행 종점인 큰 고개가 나타났습니다. 시각은 오후 3시 52분이었습니다. 약 6시간 반의 느긋한 산행이 끝났습니다. 큰고개에는 약수가 파이프를 타고 졸졸 흘러내리고 있어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마실 수 있었습니다. 관광버스가 두 대나 서서, 사람들을 태우려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오산을 베이스로 하는 ‘신우리산악회’ 회원들이 타고 온 버스였는데 마침 그분들이 산행을 끝내고 뒷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옷과 신발의 먼지를 털고 산행을 정리하며 버스가 다니는 양통마을로 어떻게 갈까 궁리하다가 산악회에 부탁해 보기로 합니다.

 

산악회의 ‘채두병’ 회장님께 저희의 사정을 말씀드리니 흔쾌히 허락을 하시고 춘천의 버스터미널까지 태워주셔서 쉽게 교통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그날의 선의에 대해 글의 한 귀퉁이지만 사의를 표합니다.)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터미널에서 큰길 건너편에 있는 닭갈비집에 들렀습니다. 오늘의 안전산행과 현장확인을 축하하고 후일의 만남을 기약하며 잔을 들었습니다.

 

주요장소의 도착/출발시각을 알려 드리기엔 표가 적당할 것 같아 운행표를 실어 봅니다.

  

주요장소

도착/출발시각

비 고

동서울터미널

06:45/07:00

7시 출발, 춘천까지 1시간 10분소요

춘천터미널

08:20/08:40

08시 40분 양구행 승차

배후령

09:10/09:30

버스하차, 산행 시작점

헬기장

11:35

 

헬기장

10:44

 

사여령

11:09

안부, 입간판

고탄령

11:39

안부, 입간판

사고지점

12:12/12:14

주의하면 충분히 진행 가능

정상

14:12/14:22

고도 878.3m

큰고개

15:52/16:30

산행 끝점, 산악회 버스로 춘천까지 옴

춘천터미널

17:30/19:10

뒤풀이를 닭갈비집에서

동서울터미널

20:30

 

  

산행 중에 찍은 사진들입니다. 사고지점의 사진들은 4장에 싣습니다. 

  

  

  

  

  

  

  

  

  

  

  

(행복한 동행) 조부근님,                      하이맛(저)

 시인마뇽,                 범솥말님,             성봉현님

  

  

  

 멋진 소나무 옆에서 바위하강법 강의와 실습이 있었습니다.

  

  

4. 사고를 넘어서서

고탄령을 지나 20여분을 가니 약간은 오르기 어려운 암릉이 나타납니다. 뒤에서 오는 시인마뇽을 기다려서 1년반 전에 사고가 났던 지점에 같이 도착하였습니다. 12시 12분. 조금 어려운 오르막의 바윗길을 지나가니 2m 쯤 바위를 타고 내려와야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사고지점이었습니다.

 

진행방향으로 보면 바위위의 왼쪽에 로프가 매어 있어서 그 로프를 잡고 내려가거나 오른쪽의 바위 모서리를 잡고 발을 짚으며 내려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좌우로는 절벽이어서 조심해야 할 곳이었습니다. 제 생각으론 난이도가 아주 큰 곳은 아니게 보였습니다. 그날 많은 여성등반객들이 있었는데 남성들의 간단한 도움으로 모두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남성의 경우는 대개 자력으로 진행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시인마뇽이 쓴 산행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인용해 봅니다.

 

‘높이가 2m가량 되어 보이는 바위를 타고 내려 가야하는데 길이 분명치 않아 찜찜한 기분으로 소나무 오른쪽으로 내려서서 바위를 안고 왼쪽으로 조금씩 이동했습니다. 바위 끝머리에서 왼 손을 놓고 왼쪽 발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잘못되어 경사가 70도 이상 되는 암벽으로 10m(?)가까이 굴러 떨어지면서..... 다행히도 중간에 넓은 턱이 있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멈췄습니다.’

 

그때 시인마뇽은 왼쪽의 로프는 보지 못한 것 같고 뒤로 돌아서 오른편의 바위 모서리를 안고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저와 성봉현님도 같은 방법으로 내려왔습니다.) 바위 오른쪽으로 내려설 때 왼발을 짚을 곳이 마땅치 않아 약간은 왼쪽으로 이동해서 아래 쪽의 바위가 튀어나온 곳을 짚어야 하는데 2008년 가을 시인마뇽의 경우에는 왼쪽으로 필요이상 더 이동하는 바람에 왼발이 허공을 짚어 추락했다고 보여집니다.(현장의 사진을 몇장 실어서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해 봅니다.)

 

그의 말대로 10여미터 아래 절벽의 중간에 턱이 있어 더 이상의 추락은 면했기에 그나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사고로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몇 개월의 치료기간 동안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현장을 방문하여 논리적으로 사고를 분석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날의 사고원인은 돌아서서 바위를 안은 자세에서 왼쪽으로 더 진행한 판단착오가 가장 큰 것이지만, 마침 바람이 제법 불어 주의력이 분산되었었고, 화천의 파로호까지 보통의 종주산행보다 2시간 반 더 오래 산행하겠다는 의욕이 앞서 산행을 서두르게 했을 것이고, 오른쪽의 로프를 이용하지 않은 것이 또한 이유일 것 같습니다.

 

시인마뇽은 성봉현님의 차분한 안내로 무사히 그 지점을 통과하였습니다. 사고를 넘어서는 중요한 순간이었겠지요. 전술한 대로 그곳은 그렇게 통과하기 어려운 지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앞서 가던 조부근님은 사고지점이 그곳이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여느 길처럼 무심히 지나쳐서 훨씬 앞에서 기다리신 것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님은 좀 더 앞의 험준한 암릉을 사고지점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암릉앞에 가셔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곳은 저희가 점심을 먹던 곳의 바로 서쪽 앞이었습니다.(실제로도 저와 시인마뇽이 우회할 때 그곳을 통과한 세분의 말씀에 의하면 제법 험한 암릉이었다고 합니다.)

 

시인마뇽이 무사히 사고지점을 극복하였으니 앞으로는 마음의 짐을 벗고 여유있고 힘차게 산행할 것을 기대해 봅니다. 시인마뇽을 위한 산행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를 위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저를 위한 산행이라고도 해야 할 것입니다. 용화산 주능선종주 산행으로 위험을 줄이고 산을 즐기는 데에 지혜가 더해져서 제 자신도 조금은 성숙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 4장입니다.

  

  절벽 아래의 턱이 그를 살렸습니다. 화살표가 재구성해 본 추락선입니다.

 

  모자를 쓴 여성분처럼 내려오다가 O표 지점 근처에서 너무 좌측으로 이동했덩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화살표 방향으로 추락.

 

  

  

 

5. 산행하는 사람들이 기대는 곳

산에 가는 사람들, 대개는 한번 쯤 아니면 몇 번, 어려운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절대자인 그분께 도움을 청하며 기도할 경우가 있었습니다. 지난 번에 사고를 당한 시인마뇽은 절벽의 턱에 몸이 걸려 살아났으나 3면의 바위와 1면의 절벽에 갇혀 오도가도 못할 시점에 그분께 기도하였습니다. 다시 그의 글을 인용해 봅니다.

 

‘한 순간 숨이 탁 막혀 고통스러워 하다가 간신히 숨을 되찾은 후 주기도문을 외우며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살아있음에 감사한 후에야 휴대폰으로 119에 구조요청을 했다고 합니다.(그의 깊은 믿음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평소에 좋아하는 성경귀절을 읽거나 암송하며 절대자가 안전한 산행을 도와주도록 기원하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은 구약의 시편 제23편(다윗의 노래)입니다.

 

‘그분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얼마 전 레게음악의 천재가수인 밥 말리의 전기를 읽었습니다. 1981년 31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가 암에 걸려 투병하는 중에 자주 읽던 성경 귀절이 바로 위에 쓴 제23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이 시편 귀절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의 멋진 시편귀절이 있습니다.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대한산악연맹회장을 역임하셨던 김영도옹이 에베레스트 원정의 어려움과 심리적 부담을 덜기 위해 애송하던 성경귀절은 시편 제121편(순례자의 노래)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이 산 저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그분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

네 발이 헛디딜까 그분, 너를 지키시며 졸지 아니 하시리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 졸지 않고 잠들지도 아니 하신다.

그분은 너의 그늘, 너를 지키시는 이, 그분께서 네 오른편에 서 계신다.

낮의 해가 너를 해치지 않고 밤의 달이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너를 모든 재앙에서 지켜주시고 네 목숨을 지키시리라.

떠날 때에도 돌아올 때에도 너를 항상 지켜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졸지 않고 잠들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지켜주시는 그분! 이 귀절을 읽으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시 산행하는 사람들에겐 김영도옹의 선택(시편 제121편)이 탁월하게 보입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산행 중에도 늘 기도하고 의지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6. 건배사를 불어로?

낮의 산행에는 위험구간을 가야 하기 때문에 반주를 준비하지 않았었기에 저녁에 만나는 반주는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맞을 수 있었습니다.(술을 즐기시지 않아 한 잔 밖에 드시지 못한 조부근님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만...) 소주와 맥주를 적절히 섞어 조제한 소맥 글라스를 들고 저는 ‘불어’로 건배사를 하겟다고 나섰습니다.

 

‘산 친구들이여 우린 같이 있어 행복합니다. 제가 선창하면 복창하십시오’

 

‘더불어!’ 저의 건배 구호.

  

‘더불어!’ 웃음 띤 산친구들의 후렴.

 

맛있는 식사와 약간의 음주를 마친 후 춘천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선 7시 1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고 동서울 터미널에는 밤 8시 30분경 도착하여 의미있는 하루를 마쳤습니다.

 

7. 후기

일요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울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시간은 짧고 할 일은 많습니다. 산행기를 쓰며 울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이 왔습니다. 졸지 않으시고 저를 지키시는 그분께 여쭈어 봅니다.

 

‘시인 마뇽은 이제 극복했습니까?’

 

‘누구? 만용이라고? 이름이 왜 그러냐? 만용을 부렸겠지.’

 

‘만용이 아니고 마뇽이옵니다.’

 

‘그래, 그가 시를 쓰냐?’

 

‘그가 쓴 산문들은 다 내재율을 가진 시인 줄 압니다. 다시는 사고 안 나게 해 주십시오.’

 

‘내 비법을 알려주마. 아주 조심하면 된다고 일러라.’

 

(헉!, 겨우 그 말씀, 안전의 담보에 왕도는 없다는 말씀인가?)

  

이 산행기는 저의 45년간의 친우인 시인마뇽의 무사무탈한 산행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동반산행에 같이 했고, 산행 후 꼭 산행기를 써야 겠다는 마음의 부담을 가졌기에 완성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이 글을 태어나게 한 시인마뇽에게 감사하며 필을 놓습니다.

  

(끝)